'영혼과 육체를 파괴하는 영적 기생충을 경계하라'
'영혼과 육체를 파괴하는 영적 기생충을 경계하라'
  • 김종희
  • 승인 2012.07.19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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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칼럼] 한국교회의 '연가시'

토요일 아침이다. 늦잠을 자고 싶다. 작은딸이 같이 영화를 보러 가 달라고 아침부터 조른다. 15세 이하 관람 불가라서 보호자가 필요한데, 무서운 장면이 나오니까 아빠랑 가야 한단다. 요즘 시대에 좋은 가장이 되려면 이런 때 억지로라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영화 제목을 물어 보았다. '연가시'라고 한다. 처음 들어 보았으니 당연히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다. 그저 무서우면서도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영화려니 예상해 볼 뿐이다.

동네 극장에 갔다. 무서운 영화가 아니었다.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았다. 상황 전개도 단순했다. 부성애를 억지스럽게 강요하는 느낌이었다. 주인공을 맡은 배우 김명민에게 영화의 운명을 맡긴 것은 아닌가 싶었다. 이 영화에 대해 사전 조사까지 하면서 잔뜩 기대했던 아내와 아이의 반응도 별로였다. 재미있든 재미없든, 가장으로서 의무 방어를 끝냈으니 그걸로 됐다.

주일 아침 일찍 눈을 떴다. 기분이 별로였다. 어제 본 영화 '연가시' 장면들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가시들에게 당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기생충, 목사와 연가시. 이 무슨 억지스러운 조합인가. 하지만 언어 세계에서는 도저히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현실 세계에서는 너무나 생생하게 어우러져 있다.

철사 벌레라고도 불리는 기생충 연가시의 변종이 영화에서는 사람의 몸을 숙주로 삼고 사람을 파멸시키는 존재로 묘사된다. 치사율 100%다. 영화를 보면, 연가시의 유충은 사람의 몸에 들어간 다음 소장에 자리를 잡는다. 숙주인 사람들에게 들어오는 영양분을 빼앗아 먹으면서 자란다. 연가시는 사람의 몸에 기생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장의 일부분이 된다.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에게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냐'고 타박하곤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이때가 되면 사람들이 아무리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 대도 살이 찌기는커녕 영양실조에 걸린다. 그 모든 것이 사람이 아니라 연가시를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연가시가 어느 정도 자라면 성충으로 독립할 준비를 한다.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된 연가시는 갈증을 유발한다. 숙주는 마시고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연가시가 자기들의 세상, 배란할 장소인 깨끗한 물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부르는 갈증이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던 사람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미친 듯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강도 좋고 개울도 좋다. 심지어는 욕조와 변기에 얼굴을 처박는다. 물에 뛰어들어 얼굴을 처박는 순간 연가시들은 숙주의 몸에서 빠져나가면서 숙주를 파멸시킨다. 연가시가 숙주에게서 탈출한다는 것은 곧 숙주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건 단지 영화 속의 공상이 아니다. 단국대 의대 기생충학과 서민 교수는 <경향신문> 7월 12일자 칼럼, "숙주의 뇌 조종하는 기생충, '연가시' 말고도 더 존재한다"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기생충을 하등한 동물로만 알았던 사람들에겐 충격일 수 있지만, 기생충 중엔 이런 식으로 숙주를 조종하는 게 여럿 알려져 있다. 고양이한테 가기 위해 쥐가 고양이를 덜 무서워하게 만드는 기생충도 있고, 소한테 가려고 개미로 하여금 풀잎에 올라가 하루 종일 있게 만드는 놈, 새가 종숙주라 물고기가 깊은 물 대신 수면 주위를 헤엄치게 만드는 놈 등 자기보다 수천 배 더 큰 숙주를 조종하는 기생충의 능력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원문 보기)

▲ 실제로 연가시는 곱등이 같은 곤충의 몸을 숙주 삼아 기생하다가 성충이 되면 깨끗한 물로 가도록 숙주의 뇌를 조작해서 곱등이의 몸에서 나와 교배를 한다. 이때 곱등이는 결국 죽게 된다.

동영상 보기 : 연가시가 귀뚜라미 뱃속에서 나오는 모습. ⓒ강기희

변종 연가시를 퇴치하려면 구충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제약회사가 떼돈을 벌기 위해서 약을 감추어 두고 변종 연가시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연가시의 배후에는 훨씬 더 엄청나고 교묘하고 탐욕스러운 '대부(大父) 연가시'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연전에 신종 플루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때 다국적 제약 회사의 음모론이 무척이나 강력한 설득력을 품고 널리 유포된 적이 있다. 이런 음모론이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연가시라는 놈의 정체가 그렇다고 치자. 그것과 한국교회가 대체 무슨 상관인가.

기생충이 인간의 내장에 들어가 서서히 자라는 것처럼, 한국교회에도 교인들의 영혼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뇌를 조종하면서 영양분을 빼내 먹는 기생충들이 있다. 설교를 가장한 기생충의 말재주에 중독된 숙주 신자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영적 목마름과 배고픔을 달래주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 기생충이 내장 안에 가만히 웅크리고는 사람들의 갈증과 허기를 유도한다.

믿음 좋은 사람들이 영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을 느끼는 것 같지만, 실은 기생충의 욕구만 채워 줄 뿐이다. 말씀을 송이꿀보다 더 달콤한 것처럼 마구 쑤셔 넣는다. 하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영적 영양실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셔도 인간들의 갈증과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고 기생충의 욕망만 채워진다. 숙주에게서 영양분을 빨아먹을 만큼 빨아먹은 기생충은 자기 종족의 번식을 위해서 인간의 몸에서 빠져 나가려 한다. 영혼과 정신을 파괴해 온 기생충은 드디어 육체마저 망가뜨린다. 그제야 악의 실체를 깨닫는다 해도 때가 이미 늦다.

연가시는 청정 1급수 깨끗한 물에 유충을 낳는다. 거기서 먹잇감을 노린다. 종교적 연가시도 '물 좋은' 곳에 유충을 풀어 놓고는 잠재 숙주들이 몰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갈증을 충분히 느끼는 신자들이 그 물에 뛰어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결말은 뻔하다. 영혼뿐만 아니라 몸까지 기생충에게 빼앗기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 거짓 갈증과 식탐은 연가시의 속임수이다. 거기에 속아서 물과 음식으로 배를 채우려 하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진짜 해결책을 발견할 때까지 무조건 참고 견뎌야 한다. (사진 출처 오죤필름)

예수는 그를 따르는 죄인들을 자신에게 중독시키지 않았다. 뇌를 조종하지도 않았다. 노예로 만들지 않았다. 숙주로 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 주었고, 인간을 인간 되게 만들어 주었다. 각성하게 도와주었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영화 속 남편처럼 감염된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이 절실하다. 그러나 아내가 공갈 갈증과 식탐을 깨닫고 그 유혹을 참아내지 않았다면 사랑스러운 가족들은 기생충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김종희 / 한국 <뉴스앤조이> 발행인

* 이 기사는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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