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랍자들을 위한 변명
피랍자들을 위한 변명
  • 김신곤
  • 승인 2007.07.26 0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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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네티즌들의 논란에 대한 한 단기선교 참여자의 호소

아프가니스탄 납치 사태와 관련된 네티즌들의 논란을 보면서 마음이 무척 무겁습니다.

첫째, 현재의 사태는 주류 기독교가 뿌려온 씨앗의 결과입니다. 돈과 힘이 우상이 된 세상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아니 오히려 그것을 능가하는 기독교의 모순과 위선이라는 씨앗이 이제 무성한 잡초가 되어 그 기독교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이지요. 이건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무척 아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누구의 탓이겠습니까? 저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의 자업자득이지요.

둘째, 그럼에도 몇 가지 해명은 할 필요를 느낍니다. 지금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는 여러 소문들의 태반은 근거 없는 것입니다. 정부가 수차례 아프간에 가는 걸 막았다느니, 유서를 쓰고 갔다느니 하는 등의 소문들이 그것입니다. 작년에 아프간에서 대규모 행사를 준비했던 모 선교단체(참 황당한 일이고 정부가 막길 잘 한 것입니다)와 관련된 일이 마치 이번 분당샘물교회의 납치된 사람들과 관련된 일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습니다.

셋째, 이번 분당샘물교회 단기선교팀의 사역이 봉사냐 선교냐 논란이 많은데, 기독교인들은 선교란 말을 자신의 삶을 통해 행해지는 모든 것을 포괄하여 얘기합니다. 흔히 말하는 “예수 믿으세요”라는 식의 전도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닌 게지요. 봉사나 사회개혁도 선교의 개념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70년대 독재 반대에 앞장섰던 도시산업선교회는 사회 개혁의 맥락에서 선교를 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개념의 혼선이 있는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간 단기 선교팀이 소위 전도를 의미하는 선교를 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이지요.

물론 타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적 관점에서 선교를 진행해오고 있는 단체들도 있습니다. 비판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번 단기선교팀과 이들을 초청한 한민족복지재단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이번 분당샘물교회 단기선교팀의 목적지는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의 ‘힐라 병원’이었습니다. 힐라 병원은 매일 150명 이상의 환자들을 사실상 무료로 치료해 주고 있으며, 현지인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병원입니다.

현재 한민족복지재단 소속의 한국인 의사 부부가 1년 이상 이곳에서 진료하며 현지 아프간 의사를 교육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피랍된 분들은 이곳을 방문하여 도우려다 변을 당한 것입니다. 저도 의사로서 해외 단기선교를 몇 번 다녀온 사람인데 제가 썼던 글 일부를 옮겨봅니다. 읽어보시면 단기선교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의 마음가짐과 자세, 그들이 하는 일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긍휼’을 뜻하는 영어단어 ‘compassion’은 라틴어 파티(pati)와 쿰(cum)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고통하다’의 의미가 된다. 긍휼은 우리가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도전한다.(헨리 나우엔의 <긍휼>중에서)

영성이 깊어질수록 영성의 방향은 ‘자신’으로부터 ‘타자’로 향하게 된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우리의 시선은 이웃을 향하게 된다. 그리고 이웃의 아픔이 곧 자신의 아픔이 된다.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고통이 성부 하나님의 아픔이자, 성령님의 탄식이 되었듯이 성삼위 일체의 신비는 그들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속에서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웃이 내가 되고 내가 곧 이웃이 되는 것이다.

내가 스리랑카에 간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들과 ‘함께 고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영성의 수준은 먼 이웃 땅에서 벌어진 비극(쓰나미)을 ‘슬프고 안 된 일’ 정도로 바라보는 것이다. 정말 나의 고통이지는 않았다. 이게 아닌데? 그들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었으면 했다. 그러자면 나처럼 영성이 일천한 사람의 경우 직접 가서 보고 느끼는 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중략)

육체적으로 힘든 여정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진정한 기쁨(JOY)은 예수(Jesus)를 처음에, 다른 사람(Others)을 두 번째에, 그리고 자신(You)을 마지막에 놓을 때 얻어지는 것이라 하였는데 정말 그랬다. 그들에게 준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받고 돌아왔다. 그들을 도운 것이 실상은 나를 도운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아픔이 정말 나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기독교가 미워도, 피랍자들의 경솔한 행동(의도가 어디에 있었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이 분통터져도 인간과 생명에 대한 예의를 가집시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과 그들의 가족을 두고서 그렇게 된 이유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 온당한 일입니까? 생명의 위협 앞에 있는 피랍자들과 이로 인해 고통하고 있는 가족들 앞에서 지금 네티즌들이 보이고 있는 반응은 인간의 기본적 도리와 예의가 아닙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그 이후에 더욱 가열 찬 비판도 하고 욕도 하십시오. 얼마든지 찬성합니다. 모든 게 다 때가 있는데, 지금은 아직 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생명을 살리는 데 우리의 마음과 뜻을 모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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