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한국 교회의 '겸손한 실패'를 바란다
2007년, 한국 교회의 '겸손한 실패'를 바란다
  • 박삼영
  • 승인 2007.02.02 23: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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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한국 교회는 거의 모든 시대에 부흥을 꿈꾸어왔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부흥을 경험하고, 부흥을 기대하고, 부흥을 갈망하며 지내온 셈이다. 몇 차례 부흥을 경험하면서도, 더 큰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 늘 목마르고 굶주린 모습을 보였다. 부흥하면서도 부흥을 뜨겁게 노래하였고, 부흥이 시들어져갈 때도 부흥을 애달파했다. 진정 부흥에로의 열정이 숨 쉬는 교회, 딱 그런 모습이 한국 교회다.

아울러 한국 교회는 기념에 도취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매사에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기념비적인 행사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부활절 새벽이나 대형 집회 시즌이 되면 놀랄 만한 동원력과 응집력을 발휘하곤 한다. 더구나 기념식마다 확인되는 얼굴 마담의 등장은 교회의 세속적인 세 과시의 전형적인 풍경 그대로다.

이렇게 부흥과 기념에 집착하는 한국 교회가 ‘어게인 1907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형 이벤트를 맞아 흥분의 새해를 맞았다. 두 개념 모두 한국 교회의 성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 곧 둘도 없는 기회로 부각되고 있지만, 염려되는 것은 평양 부흥의 100주년에 대한 접근이 그렇게 기분 좋은 기대와 꿈 같은 성취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부흥의 부메랑이 날아가던 방향을 바꿔 되돌아오는 판국이니까 말이다. 예컨대 ‘어게인 1907년’이 혹여 집단적 광기로 비쳐지는 문제가 발생되기도 하고, 그런 조짐은 이미 사찰이 망하도록 기도하는 철딱서니 없는 주장으로 표출되기까지 했다.

진정한 부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과연 한국 교회가 꿈꾸는 부흥은 무엇인가? 아니, 교회가 경험하고 경험하기를 소원하는 진정한 부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한국 교회는 부흥에 대해 어떤 성경과 역사적 전거를 가져야 할 것인가? ‘어게인 1907년’을 무조건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 근거로 ‘어게인 1907년’을 비판해야 할 것인가? 교회의 부흥에 대한 부작용이 엄연히 있지만, 그렇다고 부흥의 완전한 뿌리까지 뽑아야 되는 태도만을 갖는 것은 옳은가? 예수께서는 겉으로 나타난 행동이나 생활의 모습 그 자체보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내면적인 관심을 더 중요한 동기로 생각하시며 사람들을 교훈하셨다지만, 우리 중에 누가 그런 권위를 가지고 대담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교회와 부흥의 주제를 논하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통하여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지혜로울지 모르겠다.

첫째, 역사상 유래 없는 부흥을 경험한 한국 교회의 부흥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 교회 성장을 가져다 준 통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부흥의 결과는 숫자적인 성장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통계로 보곤 한다. 이것이 더 단순해지면, 종종 어떤 단체들이 주장하는 대로 기계적 생산이나 배가 운동으로 주장하는 슬로건으로 등장하게 된다. 물론 통계는 보다 체계적이고 발전적인 전략을 세워야 하는 분야에서 보여주듯이 아주 중요한 숫자의 예술이다. 그래서 통계는 숫자 그 자체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지향점을 흔들어주는 모종의 권력과 연결된다. 한국 교회가 주로 인식하는 부흥의 경험도 대부분 이 통계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부흥을 통계로 인식하는 한 한국 교회의 부흥은 교회 성장의 숫자적 측면의 집착을 보여주는 우를 계속 범할 것이다.

둘째, 한국 교회는 부흥의 전제 조건을 얘기할 때 아주 그럴 듯하게 회개와 말씀 사경회라고 말하지만 그게 너무 교과서적인 제스처요, 표현일 때가 많다. 소위 말은 번지르르하게 선택하지만, 속 다르고 겉 다른 스테레오 타입의 대외 과시용 행사가 많다. 회개의 내면적 능력과 변화의 결과는 별로 강조되거나 중요하지 않고 회개의 지극적인 세리모니만이 강조되고 확인될 뿐이다. 심지어 회개의 그림은 골방에서의 경험이나 골목 어두운 그늘에서의 경험이라기보다, 길모퉁이나 테이블 앞에서의 기자회견장과 같아서 그 진정성이 떨어져 보인다.

말씀에 대해서도 한국 교회만큼 강조하는 교회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말씀이라 말은 하지만 그 실상은 모두 말씀을 너절너절 풀어주는 설교에 머무를 뿐이다. 말씀 그 자체의 위엄을 경험하기도 전에 그것을 둘러싼 주해가 난무하는 교회가 바로 한국 교회인 것이다. 더욱이 말씀은 교회의 숫자적 성장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런 형편에서는 말씀의 현실을 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교인들의 숫자를 증가시키기 위한 자극적인 레토릭이 다양하게 개발될 수밖에 없다. 한국 교회의 회개와 말씀의 강조가 빠트리는 문제 중 하나다.

셋째, 왜 지나간 과거의 역사인가? ‘어게인 1907년’의 환상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일제하의 어려운 여건에서 찾은 복음의 능력에 대한 향수일까? 사실 한국 교회는 한동안, 아니 지금도 계속 사도행전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반복하길 좋아한다. 사도행전의 초기 교회의 어떤 모습을 닮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사도행전의 역사적 모델에 대한 평가와 인정 때문일까? 그렇다고 한국 교회가 역사적인 전통이나 교훈에 대해 눈이 밝은 입장도 아닐진대, 마치 역사적 인식의 높은 수준을 드러내고자 할까?

한국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로 돌아가자거나 ‘어게인 1907년’을 외치는 이유는 조금도 역사적인 모델에 대한 교훈 때문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 있었던 교회의 숫자적 부흥의 결과에 천착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역사를 되돌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왜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할까? 사도행전의 교회나 1907년의 교회로 돌아가기보다 그들이 남긴 어떤 기독교적인 삶과 그 원리가 두드러지는지부터 살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은 쉽고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슬로건화가 되기 힘들 것이다. 

넷째, 어떤 부흥을 소망해야 하는가? 부흥(revival)은 라틴어의 어원(re+vivere)을 갖는데, 라틴어 ‘vivere’는 살아나다는 뜻과 함께 방문(visit)한다는 뜻도 있다. 여기서 후자를 취한다면 즉 부흥이란 누군가의 재방문(re-visitation)을 뜻한다. 보통 종래의 부흥에 대한 어원적인 의미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이 다시 소생한다는 뜻이었다면, 역사적 현실에서 경험되는 부흥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다시 찾아와주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재방문이라는 뜻이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흥은 인간적인 조작이나 운동으로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다. 따라서 일부의 한국 교회가 종종 사용하는 부흥 운동이란 말은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그것은 부흥이란 말의 지나친 남용의 한 예가 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부흥을 진정으로 소망한다면 부흥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방문을 맞이할 준비로서 그분의 재방문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다섯째, 개교회의 부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이 이 문제에 답해왔는가? 살아있는 유기체는 성장해야 한다는 생물학적 이론부터 운동을 통한 교인 증가의 전략이라는 물리학적 이론까지 아주 많은 성장 이론이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부흥이 인간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심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때, 부흥의 진정한 결과인 인간의 변화를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변화란 삶에 대한 태도와 자세, 그리고 삶의 방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다른 말로 말해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변화 받았다고 할 때, 그 변화는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과 가치관으로 닮아간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이 변화에 성실하게 실천해온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지적 앞에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과 가치관의 핵심적인 기준이 당신을 내어주시는 것, 또는 희생이나 사랑이라고 한다면, 불행하고도 놀랍게도 한국 교회는 그 반대의 길을 더 많이 보여온 게 사실이다.

교회마다 부흥과 교회 성장을 외칠 때마다 주변의 가난한 형제 교회를 돌아본 적이 몇 번인가? 숫자를 세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탐욕의 강도를 지적하는 말이다. 나를 내어주어 너를 살리는 부흥을 경험해보았는가? 반대로 나를 더욱 채우는 자기중심의 탐욕적인 이빨을 드러내 보이는 부흥의 외침만이 주된 관심사이지는 않는가? 만일 인간의 삶의 질이 진정으로 변화되는 부흥을 경험하길 바란다면 그것은 이제까지 한국 교회가 부르짖는 부흥의 염원과는 다르지 않을 것인가?

나를 비워 너를 채운다면

한국 교회여, 왜 부흥을 꿈꾸려고 하는가? 왜 부흥을 그토록 갈망하는가? 누군가의 말대로 인간의 역사에 자국을 한번 남겨보고 싶은 충동인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기 때문인가?

 1907년의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7년을 역사의 캘린더에 새겨보고 싶은가, 아니면 100주년을 빙자하여 탐욕의 통계표를 작성해보고 싶은가? 말씀은 영원하지만 역사는 흘러 지나가지 않는가? 왜 지나간 역사를 힐끗거리며 다시 탐욕의 근성을 발휘하려고 하는가? 사도행전의 초기 교회도 1907년의 과거 교회도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씀 아래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이 세상에서 준비하고 이 세상에 기록되기 위한 역사는 다 지나가는 것이지 않은가?

 더구나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유익이 있다는 걸 기억한다면, 이번의 ‘어게인 1907년’은 실패로 돌아가도 좋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1907년에 대한 향수가 곧바로 부흥의 경험을 주기보다, 오히려 스스로를 더 낮추고 겸손하게 만들며 자신을 비워 다른 이들을 채우는 경험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십자가의 경험처럼 한국 교회가 죽는 경험을 통해서 한국의 다른 사람이나 사회를 살려내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흥이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된다면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는 진정한 부흥의 경험이 되지 않을까? 2007년, 한국 교회의 겸손한 실패를 바란다.

박삼영 / 새길교회 목사

* 이 글은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린 것을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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