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해보는 선교
다시 생각해보는 선교
  • 김영봉
  • 승인 2007.08.01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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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한국 교회가 탈레반보다 더 비난받는 이유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활동을 떠났다가 탈레반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 때문에 마음이 아주 무겁습니다.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씨는 벌써 살해되었으며, 나머지 21명의 팀원들은 아직까지도 억류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교회의 선교 활동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으며, 사건의 당사자인 분당 샘물교회는 큰 시련에 직면해 있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한국 교회 전체가 시련에 직면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샘물교회와 박은조 목사가 대신 진 십자가

문제의 핵심이 된 분당 샘물교회는 아주 모범적인 교회로 주목 받아왔고,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박은조 목사님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존경받아온, 미래의 한국 교회 지도자감으로 촉망받아온 분입니다. 박 목사님은 서울 논현동에 있는 영동교회에서 17년 동안 목회하면서, 교회가 지나치게 커지지 않게 하려고 2년 혹은 3년 간격으로 교회를 분가시켰고, 부목사를 따라 나가는 교인들이 많지 않자, 1998년에는 모체 교회인 영동교회를 다른 목회자에게 맡기고, 자신이 분당으로 나와 개척했습니다. 이 교회는 또한 장애인 사역으로 유명하며, 기독교 대안학교(alternative schools)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칭찬받아 마땅한 일들이 많은 교회이며, 또한 그런 목사님입니다.

저는 이 사건에 대한 뉴스를 따라 잡으며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정을 알지도 못하고 교회와 박은조 목사님에게 비난을 퍼붓는 여론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 아픕니다. 이번에 인질로 잡힌 봉사단원들이 마치 광신자들인 것처럼, 혹은 분당 샘물교회와 박은조 담임목사가 분별력 없는 선교지상주의자인 것처럼 매도하고 있어서 가슴이 더 아픕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는 동안,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났어야 했다면, 만일 인류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그리고 종교인들의 각성을 위해 이런 사건이 필요했다면, 분당 샘물교회와 박은조 목사님은 이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어제, 우리 교회의 31명의 멕시코 단기선교단이 1주일간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까깔첸으로부터 돌아왔습니다. 또한 21명의 청소년들이 애쉴랜드에 있는 농장에 나가, 추수하고 남겨진 곡식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Harvest of Hope’ 봉사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할 때면 자꾸만 박은조 목사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인질로 잡혀 고통 받고 있는 청년들이 생각납니다. 마치 우리 교회 교인인 것처럼 마음이 아픕니다.

한국 선교의 자화상…일방적인 자기중심적 선교

이 사건을 두고, 평소에 기독교의 선교 방식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거 보라고! 그럴 줄 알았어. 그냥, 자기들이 믿는 신을 믿고 살도록 내버려 두지, 왜 꼭 예수만 믿어야 되냐고! 그 사람들이야 믿든지 말든지, 제발 그냥 좀 두라고! 제발 너희들이나 잘 해!”

사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행하는 선교 활동 중에는 이렇게 비판 받아 마땅한 것들이 많습니다. 공개적으로 말씀 드리기에 주저됩니다만, 저는 선교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잘 믿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겪은 부정적인 경험 때문입니다. ‘선교’를 구실로 제게 오는 메일과 전화와 편지가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은 모르실 것입니다. 그분들의 요구가 얼마나 일방적이고 무리하며 자기중심적인지요. 이런 경험을 반추하면서, 선교에 열중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문제점을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많은 분들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가 하는 선교가 제일 중요하다고 믿고 행동합니다.
둘째, 선교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셋째,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선교를 도울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자신의 선교를 돕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 선교를 하고 있는 한, 자신은 가장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정을 살피지 않고, 사람에게 매우 오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합니다. 선교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가장 배려가 깊고 조심성이 많고 겸손해야 마땅한데,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매우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선교가 자주 교회 분란의 원인이 됩니다. 선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선교에 열중하는 사람들의 분별없고 극단적인 행동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선교’라는 단어만 들어도 인상이 찌그러지고 소름이 돋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교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같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렇게 보인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이상하게 보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선교를 위해 산다”고 혹은 “선교를 위해 생명을 바쳤다”고 말합니다만, 실은 선교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선교와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살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선교하는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바른 선교에 대해 고민하며, 바른 선교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선교에 대해 연구하며 바른 선교 방법을 찾아 가는 것이 옳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의 선교단들을 따라 다니면서 지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와싱톤한인교회가 선교를 제대로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가 제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선교는 선택이 아니다”

선교는 옵션(option)이 아닙니다. 선교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속합니다. “선교 없는 신앙을 택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말이 의아스럽게 들리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선교’를 ‘해외에 나가서 다른 민족에게 전도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말 ‘선교’는 ‘자신의 종교를 선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영어 사전은 mission이라는 단어를 ‘A series of special Christian services for purposes of proselytizing’ (개종시킬 목적으로 행해지는 기독교 활동)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선교는 옵션이 아니다’라는 제 말에 동의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교 즉 영어로 mission이라는 말은 ‘보내다’를 뜻하는 라틴말에서 왔습니다. ‘나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나가는 것’ 혹은 ‘다른 사람에게로 가도록 보내는 것’이 선교입니다. 왜 나갑니까? 왜 보냅니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 갇혀있지 않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뻗고 다른 사람을 향해 다가가는 행동이 선교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 한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헬렌 켈러같은 사람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신체적인 장애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살더라도, 정신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려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스스로를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릴 때 받은 심리적인 상처 때문이든, 성장하는 과정에서 방치되어 그렇게 되었든, 정신적인 혹은 심리적인 문제 때문에 자신의 삶을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손을 뻗치는 것이 선교입니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자기만 아는 사람들 혹은 자기의 가족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사람들보다는 낫습니다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역시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다움’을 포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아는 것,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가족에 대해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자기 자신 안에만 혹은 자신의 가족 안에만 갇혀 버린다면, 문제가 됩니다. 성서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죄입니다. ‘이기심’은 죄 중에서도 가장 뿌리 깊은 죄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극진히 아끼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냉정하다면, 그 사람의 사랑은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가족을 잘 돌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이렇게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손을 뻗쳐 사랑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것이 모두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삶이며, 모두에게 가장 행복한 삶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랑을 잊었습니다. 인간은 참된 사랑을 모르는 상태로 타락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결과는 자기를 우상처럼 섬기거나, 아니면 자기에게 집착합니다. 자기의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알고 보면 가족에게 집착하거나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자기 집착적인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분을 통해 참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자기’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우리의 오염된 사랑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순도 100%의 사랑에 의해 정화됩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우리는 새로 지어집니다. 비로소 참된 사랑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 사랑을 받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진실하게 사랑하게 되고, 우리 가족을 진실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집착도, 아집도 아닌, 참다운 사랑으로 자신과 가족을 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우리의 눈을 이웃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참다운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킬 것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변화시킬 것이며, 우리가 가족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킬 것이며, 마침내 자신과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 이웃을 향해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야만 참된 믿음입니다. 그렇게 이웃을 향해 관심을 두고, 손을 뻗치고 발걸음을 옮겨 사랑을 행하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선교’라는 번역이 참 마음에 안 듭니다. 우리의 진정한 관심은 개종을 시키거나 우리의 종교를 선전하는 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으로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 손을 뻗쳐 도움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관심이요 목적입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선교입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선교는 옵션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수긍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비난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할 일

며칠 전,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차성민이라는 분이 인질로 잡혀있는 누나에 대해 쓴 편지를 읽고 마음이 아렸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나는 스무 살 때부터 10여 년간 국내외에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정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세계 곳곳의 오지만을 찾아다녔습니다. 누나를 아프간으로 이끈 것은 힘든 상황에서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지금도 누군가가 자신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는 한결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아프간으로 떠나기 전 누나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픈 아이들에게 파스 하나, 먹을 음식 하나라도 더 건넬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즐거워요’라고요. 저는 잘 다녀오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보자면, 현재 32세인 차혜진 씨는 선교지상주의적인 열심으로 이슬람들을 개종시키러 간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이웃을 돕기 위해 갔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 ‘왜 오지만을 찾아 다녔느냐?’고 힐책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답답함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비난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들의 헌신적인 행동 앞에서 자신의 이기심이 고발당하는 것을 피할 양으로 핏대를 올려 비난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모두 다 ‘내 앞 가름이나 잘 하자’고 생각하고 자기 일에만 몰두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만일 다른 나라에 가서 봉사하려는 사람들이 안전한 곳만 찾아간다면, 위험한 곳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미신과 잘못된 신앙으로 인해 신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들의 종교가 그들을 구원할 거야’라고 말하면서 외면하고 있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모두가 자신의 안전만을 꾀하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본다면, 과연 잘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국에 최초로 복음을 전했던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님과 언더우드 목사님을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분들의 희생과 봉사에 큰 덕을 입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한국의 개화와 개명이 그분들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운동에 큰 덕을 입었습니다. 아무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두 분의 선교사께서 1885년 4월 5일 한국에 왔을 때, 상황이 어땠습니까? 지금의 아프가니스탄보다 덜 위험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 사건을 두고, “그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청하지 않는데 왜 굳이 찾아가 돕겠다고 했느냐”고 책망하시는 분들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목사님에게도 그렇게 묻고 따지시겠습니까. 이번 사건을 두고, “자신들의 종교를 믿고 살아가도록 그냥 두지, 왜 굳이 기독교 복음을 전해야 했느냐”고 책망하시려는 분들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서구 기독교회가 120년 전에 우리나라를 외면했더라면,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이번 사건을 두고, “왜 굳이 그렇게 위험한 곳을 찾아 갔느냐”고 책망하시는 분들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감수했던 위험은 쓸 데 없는 일이었습니까? 1893년, 당시 에모리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던 윤치호 선생은 어려운 중에서도 장학금과 강연료를 모아 200달러를 만들어 미국 감리교회 본부에 전하면서 한국에 선교해 달라고 청했는데, 과연 윤치호 선생은 분별없는 선교지상주의자입니까, 선각자였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앞길을 찾아 취업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런 가상한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저는 10년 동안 대학에서 가르쳐 보아 잘 알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얼마나 급속하게 개인주의·이기주의·현세주의·실용주의·쾌락주의에 빠져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는 자유·정의·희생 같은 것들이 전혀 관심사가 아닙니다. 적어도 저희 세대는 개인적인 관심사에 몰두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습니다. ‘자유’나 ‘정의’ 같은 말을 들으면 가슴이 달아올랐습니다. 때가 되면 내 인생을 큰 가치를 위해 던지겠다는 결의를 품고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과거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큰 가치를 위해 분투하는 젊은이들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러기에, 저는 아직도 이런 귀한 청년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입니다.

선교, 가장 귀한 선물인 예수 나누는 것

어떤 사람은 그렇게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도움을 주러 갔으면 그냥 도움만 주고 오지, 왜 기회만 되면 전도하려고 합니까? 도움을 주는 동기가 불순하지 않습니까?”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기독교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목적으로 전도하려 한다면, 그 전도는 분명히 오염되었고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도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도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도움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사람에게 약을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사람의 머리를 깎아 주는 것은 분명히 좋은 도움입니다. 하지만 선교단이 떠나고 나면 그들은 다시 배고파질 것이고, 또 다른 병으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며, 머리카락은 다시 자랄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주는 도움은 단 며칠 혹은 몇 주일, 길어야 몇 달 동안 효과가 있을 뿐입니다.

많은 돈을 쓰면서 봉사활동을 나가는 이유는 그렇게 잠시 후면 잊힐 도움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물질적인 도움을 매개로 하여 한 영혼과 한 영혼이 만나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갑니다. 눈빛과 눈빛의 만남을 통해,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진실한 관심을 받고, 그것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간직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갑니다. 그 작은 도움을 매개로 하여 마음과 마음, 정신과 정신, 영혼과 영혼이 마주치는 사건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살아가면서 텅 비어버린 한 어린아이의 동공에 생명을 넣어줄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만남을 통해 그들이 참된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가 얼마나 커지느냐가 관심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가지느냐가 관심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와의 만남을 통해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느냐에 우리의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빛을 가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고 있는데, 그것이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돕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본문에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죄수가 되어 재판을 받으면서도,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행 26:29)라고 증언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오늘날까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 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일이라고 믿습니다. 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이 저에게는 가장 큰 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행복을 누리고 있다면, 그 모든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온 것입니다. 제가 지금 충분히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부족한 부분은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더라면, 저의 생애는 심하게 오도되었을 것이고, 허망하게 허비되었을 것이며, 악하게 오용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저만의 주관적인 믿음입니까? “당신에게 그렇게 믿어지면, 당신 혼자만 그렇게 믿으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주관적인 믿음일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저는 성경 안에서, 그리고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리고 지금 이곳에 앉아계신 많은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저의 이 고백이 결코 저 혼자만의 주관적인 고백이 아님을 확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접하고 그분과 사귀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고백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저는 역사적인 증거를 들어 사실로 확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고백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도, 설득할 수도, 협박할 수도, 돈을 주고 매수할 수도 없는 것임을 압니다. 과거에 기독교는 그런 잘못을 범해 왔습니다. 칼과 총으로 협박하여 믿게 하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돈으로 매수하여 믿게 하려고 했던 적도 있습니다. 논리적인 대결을 통해 설득해 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 교회가 그런 잘못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선교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만을 강화시켰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인질을 붙잡고 있는 탈레반보다 인질로 붙잡힌 봉사단원들이 더 비난을 받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 교회의 무분별한 선교 활동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 조건 없이 그분들과 함께 지내면서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섬기는 것밖에 없음을 진작에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기를 기도하고 기대했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려는 선교는 이런 것입니다. 왜 선교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셔서 이웃을 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웃을 향해 나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귀한 선물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 손을 뻗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고귀한 희생, 평화와 화해의 씨앗 되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 고백이 진실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생애 동안 가장 잘 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일이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도운 분들을 가장 큰 은인으로 여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과 사귀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진정한 삶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분 안에서 참된 사랑을 알아,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며, 가족을 사랑하고, 나아가 이웃에게 그 사랑을 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의 믿음이 이웃을 향해 손을 뻗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나에게 가장 복된 선물을 이웃에게 소개할 수 있는 데까지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강요하지도 않고, 협박하지도 않고, 매수하려고 하지도 않고, 설복시키려 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히 그분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단지 힘닿는 데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행하는 모든 선교 활동이 그렇게 진실하고 겸손한 사랑의 실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직까지 억류된 모든 자매형제들의 무사한 귀환을 기도합니다. 당사자들의 가족들과 분당 샘물 교회 그리고 박은조 목사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일을 위해 수고하는 정부의 모든 관계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악한 선택을 모의한 탈레반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당한 희생이 고귀한 희생이 되어 평화와 화해의 씨앗으로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비극은 우리 사람들이 빚어내지만, 역사의 주관자는 여전히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비극을 바꾸어 주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 이 글은 7월 29일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설교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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