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뭇한 달빛에 하얗게 피어날 샤론의 꽃
흐뭇한 달빛에 하얗게 피어날 샤론의 꽃
  • 홍성종
  • 승인 2007.02.15 0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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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1980년대 중반 총각 시절, 남도의 다도해 끝자락에 자리한 도초면 시목리에서 겨울을 보냈다. 초가집 격자문을 확- 열어젖히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백사장엔 어김없이 비단 같은 파도가 넘실거리다가 마루턱까지 몰려와 엎어지곤 했다. 가끔 순백의 물새들이 신기한 자태로 앉아있는 모습을 볼라치면, 부끄럼 투성이의 처녀와 마주 대한 것처럼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바람이 일부러 시목리 방향으로 불어오던 새벽이면, 십리길 너머인 그곳까지 수항리교회의 새벽 종소리가 들려왔다. 젊은이들이 떠나간 어촌의 교회에서 쓸쓸한 촌로들과 더불어 목회하던 윤진렬 목사님도 그때 만난 분이다.

이 양반은 깡마른 체구에 그저 예수님처럼 살았다. 본시 어촌은 자연 촌락이라 동네와 동네 사이가 한참을 떨어져 있고, 그나마 촌락의 군집도 바닷바람을 피해 산자락 어귀에 여기저기 꼬막 껍질처럼 엎드린 채 흩어져 있었다.

목사님이 다리품을 팔며 심방 다니던 모습이 안쓰러워 성도들이 때마다 “목사님, 걸어다니시면 너무 힘드니 자전거라도 타고 다니세요” 하면, “목사가 어떻게 거만하게 자전거 타고 다니며 전도하겠습니까?” 하시는 꽉 막힌 분이었다. 그리고 손때 묻은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다른 편에는 한 묶음의 전도지를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 한 번은 무당에게 따귀를 맞은 봉변을 당한 적도 있으시다는 풍문까지 전해 들었다.

시골 성도들에게 있어 목사님의 심방은 곧 암행어사 출두이다. 시금치나 고구마 농사 일로 눈코 뜰 새 없고, 미역이나 김 양식의 바다 일로 허리 한 번 펼 겨를이 없지만, 귀한 손님 모신다 해서 진수성찬을 준비하고, 닦아도 별반 윤택이 날 리 없는 툇마루를 물걸레로 수십 번 훔치게 마련이다. 이러한 성도들의 형편을 아시던 고지식한 우리의 윤 목사님은 심방 때는 아예 금식을 선포하고, 계란 하나 안 잡수던 양반이다. 주일에는 성도들이 정성스레 담아온 성미(聖米)로 밥을 짓고, 장로님 몇 분과 함께 귀한 반찬을 나눌 때에도, 입에 대기 전에 흰 쌀밥을 양껏 떠서는 주변 분들에게 “더 드시라”며 덥석 옮기시는 분이다.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고 대지가 숨을 쉬는 봄기운이 진동하던 부활절에는 그동안 장롱 깊숙이 간직해 놓았던 누렇게 변한 ‘하얀 한복’을 꺼내 입고, 저고리 고름 휘날리며 부활 성찬을 위한 음식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아지랑이를 헤치며 교회로 향해 오던 그 사뿐한 걸음걸이를 잊을 수 없다. 그리고는 풍금에 맞춰 도무지 4부 합창이 되지 않던 찬송을 고작 너덧 명의 성가대가 불렀다.

“샤론의 꽃 예수 / 나의 마음에 /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 내 생명이 참 사랑의 향기로 / 간데마다 풍겨나게 하소서 // 예수 - 샤론의 꽃 / 나의 맘에 사랑으로 피소서”

그 후,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세월은 나를 미국 땅까지 옮겨 놓았다. 그러나 그해 겨울 이후로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금식하며 심방 다니는 핏기 없는 얼굴의 목회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 뿐만 아니라, 해마다 부활절에도 눈부시도록 빛나던 '누렇게 색바랜 하얀 한복'의 수항리교회의 성도들의 모습도 어디에서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내로라 하는 정규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들, 포마드 발라 넘겨 번질번질 광채 나는 이마를 지닌 목회자는 수도 없이 만났다. 그렇지만, 이들 누구에게도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그들의 천박한 신학은 그렇다 쳐도 ‘제사장’ 운운하며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영혼들을 ‘허생원의 당나귀’ 정도로 짓밟던 목이 곧은 목회자들은 지금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두에게나 푸대접은 아니다.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성도들이 교회에 출석하면 “하나님이 만남을 축복해 주셨다”고 칭송하는 광경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학식과 재물을 겸비한 괜찮은 성도들도 허다하게 경험했다. 너무나 괜찮은 사람들로 오늘날 교회는 넘쳐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느 때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은 정작 몸 된 교회를 허울로만 남겨놓고, 교회 밖에 계실지 모른다는 뒤틀린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고상하게 신앙생활을 해온 지 오래이다. “아무 공로 없으나 일방적으로 택하시고 거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나의 첫 사랑은 영성을 추구하며 스스로 얻어낸 공으로 색깔이 바랜 지 한참이 되었다.

셀 그룹이나 목장 리더를 거치며 앞다투어 좋은 음식으로 경쟁하듯 대접하고, 사랑을 베풀면 염치를 알아 되돌아오던 사람만을 골라 섬기며, 끼리끼리의 분파주의에 빠져 희락하였다. 그로 인해, 상처 난 영혼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이혼자, 혼혈자녀, 불임여성, 우울증을 앓는 성도, 소수민족, 어쩌다 혼기를 놓친 노총각 노처녀들까지 모두들 교회를 찾아와 깊은 상처만 안고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였다. 예수님 주변을 잠자리처럼 맴돌던 죄인 된 세리와 창녀, 고아와 과부, 갇힌 자, 눈먼 자, 앉은뱅이는 더는 찾아보기 어렵고 멀쩡한 사람만이 차고 넘치는 ‘저희만의 천국’이 되었으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전도, 선교와 제자 양육도 허울만 남거나 오염된 지 오래이다. 수백만 불을 들여 예배당을 사들이면서 제법 고상한 책략으로 몇 퍼센트의 선교비는 유지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며 결국 성도들의 부담을 늘리고, 목회자의 휴대전화 비용은 걱정하면서도 고아를 위한 몇 백 불의 구제금은 뒷전이다. 관료주의에 빠진 교회 행정은 모든 것이 사전적으로 선하고 효율성의 추구를 위한 어떤 문제제기도 하나님을 향한 불평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오늘날, 하나님의 영광된 교회에는 시대에 뒤진 편협한 사상과 흑백의 논리만이 판을 치고 있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으로 측량할 수 없는 참으로 오묘한 하나님의 은혜는 율법과 정죄로 탈바꿈하였다. 우리네 인생을 인격적으로 만나고자 원하시는 하나님은 이방신 수준으로 격하된 채 굿판을 벌여 부를 때만 왕림하셔야 한다. 한마디로 교회의 형국은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장터'만도 못하다.

나는 이 시대의 수항리교회를 다시 찾아나서는 심정으로 <미주뉴스앤조이>라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 버스를 얻어 타고 차창 너머로 가장 작은 영혼을 들여다보고 인생의 의미를 ‘해석(解釋)’하였으면 한다. 스치는 풍광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인생을 들여다보는 한 폭의 ‘회화(繪畵)’이었으면 싶다. 단순한 논리적 사변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체취(體臭)’를 캐내었으면 한다. 때로는 많은 말보다 침묵과 성찰로 전할 수 있는 내면의 ‘사유(思惟)’가 담겼으면 한다.

부디,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이 시대의 깨어 있는 신앙 양심들이 <미주뉴스앤조이>에 함께 승차하여 만석을 이루어 어느 순간 나 자신은 밀려나길 원한다. 시작점은 초라할 것이다. 더러는 구절양장의 고갯길을 오르며, 요동치는 버스에서 내려 밀고 끌고를 반복할 것이다. 그러다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인 장관을 맞이하듯 샤론의 꽃대를 헤치며 몽매에도 사무치던 우리 주님을 뵈었으면 싶다. 손에 한웅큼 <미주뉴스앤조이> 꽃송이를 흔들며….

* 홍성종 / 현재 플로리다 주정부에서 이코노미스트(Economist)로 5년째 근무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1990-1997)으로 일하면서, 자유 시장 경제와 정부 규제 완화 정책(Deregulation Policy)에 대해 연구했다. 플로리다 주립대(Florida State Univ.)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탈라하시 한인침례교회 안수집사. 주요 관심 취재 분야로는 ∆건강한 교회를 위한 목회자와 성도들의 견해를 묻는 인식 조사 ∆교회 내 성장 지향과 물질 지상주의의 그늘에 가려 갈등하는 영혼들 ∆율법과 분파, 영지주의에 오염된 교회 ∆전도∙선교 사역 및 제자 양육의 실상과 허상 ∆미국 내 기독교 세력의 정치경제학, 그리고 ∆인간 내면의 자유를 위한 내적 치유 등이다. 아내 장금복 집사와 슬하에 찬, 예람, 예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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