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일방적이어도 좋다
사랑은 일방적이어도 좋다
  • 주재일
  • 승인 2013.06.04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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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동대문 쪽방촌의 희망 공동체, 등대교회

▲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여 쪽방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다. 바로 옆 동문시장 상인들도 쪽방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남루한 옷차림의 걸인이 교회 문을 두드린다. 다들 귀찮은 눈빛이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죽지도 않고 또 와도 애증을 품고 받아 주었는데, 지금 교회 앞에서는 각설이의 익살과 구걸이 통하지 않는다. 교회 행정을 맡은 집사님들은 "전도사님, 돈 줘서 보내 버리라"며 손사래를 친다. 다른 분은 한술 더 떠 "줄 필요도 없다. 걔네들 상습적이다"고 성을 냈다. 순진한 젊은 전도사는 난감했고 고뇌했다.

'평소에는 정말 신앙심 깊은 분들인데…. 예수는 걸인, 양아치, 창녀와 친구이지 않았나. 예수를 좇는다는 교회는 왜 그들을 쫓아 버리기 바쁠까. 돈이 아까우면 그들의 말동무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교회가 뭐 이래.'

이 철없는 전도사는 노숙인과 쪽방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나라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걸인을 영접하지 않은 교회를 향한 불만이 정당한 것이니까. 서울 영등포에 있는 광야교회(임명희 목사)를 정기적으로 찾아서 봉사했고, 신학대학원 졸업논문도 쪽방과 노숙인 사역에 관한 연구로 작성했다.

졸업 후에는 광야교회서 3년 반 동안 부교역자로 섬겼다. 이 기간 평생 노숙인, 쪽방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할 수 있는 깜냥이 되는지, 은사와 소명을 확인하고 점검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이후에는 동대문쪽방상담소에서 사회복지사로 쪽방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는 대신 노숙인을 만나러 다니고, 쪽방의 실태를 조사하고, 상담하면서 또 3년간을 동대문을 누볐다. 그리고 김양옥 목사(등대교회)는 동대문 쪽방 근처에 교회 문을 열었다.

쪽방,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개척한 등대교회

쪽방, 그곳은 사람 살 곳이 아니다. 0.5평에서 1평 정도로 아주 작고, 창문도 없는 방. (쬐끔한 창문이라도 달리면 사글세는 확 뛴다.) 그곳에서 밥 해 먹고 옷이며 신발, 먹을거리, 부엌살림까지 보관하면서 살면 저절로 집이 아니라 우리가 된다. 스스로도, 타인들도 사람 취급을 해 주지 않는다.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비존재'들이 감금된 곳이 쪽방이다. 어떤 면에서는 감옥보다도 못한 환경이다.

▲ 등대교회는 서울 지하철 동대문역을 빠져나와 쪽방촌으로 가는 입구에 있다. 성인 오락실과 여관이 사이에 끼어 있어 신경 쓰이겠다고 했더니, 김양옥 목사는 쪽방촌과 가까워 더 없이 좋은 입지 조건이라고 대답했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쪽방촌은 전국에 11곳 정도 있다. 서울에만 다섯 군데다. 김 목사는 이곳들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다가 동대문에 자리 잡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곳들은 섬기는 교회가 있지만, 동대문에는 그들을 전도하는 교회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동대문에는 쪽방이 550개로 서울 지역 쪽방촌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다. 그렇지만 유동 인구가 20~30%에 불과해 50%에 이르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정착률이 높은 편이다. 꾸준히 만나면서 전도하고 목회하기에 유리하다는 뜻이다.

주민센터에 신고된 주거자가 330명가량이지만, 실제로는 380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김 목사는 말했다. 1평도 안 되는 방, 누우면 발과 머리가 벽에 붙을 것 같은 곳도 사글세가 10~20만 원이다. 보증금이 없다는 이유로 비싸진 것이다. 그마저도 월세를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일세로 3000~7000원을 내기도 한다.

사람들의 시선, 공무원의 서류에도 포착되지 않는 쪽방 사람들과 10년 동안 지냈고, 3년 넘게는 사회복지사로 뛰면서 기초 자료부터 개개인의 경제적 상황과 몸 상태, 성품까지 파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쪽방 교회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마침 김 목사의 활동을 눈여겨본 한 집사가 자신의 사무실 지하 공간을 내주었다. 2006년 3월 등대교회(김양옥 목사)는 서울 종로구 이화동의 한 빌딩 지하에서 김양옥 목사 가족과 노숙인 두 명, 쪽방 사람 한 명이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소중하고 모든 목사에게 첫 교인과의 만남이 감격스럽듯이, 김 목사에게도 첫 교인 김철동 씨는 각별하다. 정신지체장애 1급이면서, 알코올중독에 빠진 김 씨는 쪽방 사람들에게도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 인생이었다. 웬만한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말은 어눌하다. 김 씨는 '대포차' 차주였고, '바지 사장'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의 주민증과 인감을 도용한 것이다. 김 목사는 김 씨를 대신해 구청과 경찰서를 오가며 결국 사기꾼을 잡았고,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해 주었다. 그리고 예수 믿고 새 삶을 살자고 권했다.

"정말로 당신의 고통과 상처를 고치고 싶으면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님은 당신 죄와 허물을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를 믿으면 행복할 겁니다."
"정말입니까. 처음 듣는 말입니다. 지금껏 아무도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김 목사는 그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에 놀랐다. 예수 믿으라는 말은 너무 흔해 싸구려 취급받는 세상인데, 김 씨 할아버지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값비싼 소식이구나 싶었다. 김 씨만 그런 게 아니다. 쪽방 사람들 대부분이 교회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브랜드 아파트에는 오지 말라고 해도 와서 전단지 뿌리고, 이삿짐도 대신 옮겨 준다는데. 이곳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쩌다가 교회를 찾아가도 냄새난다고, 술 취했다고 눈총을 받습니다."

뺨 맞는다고 밀리면 끝

▲ 박창석 할아버지 쪽방. 김양옥 목사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할아버지와 소통하는 몇 안 되는 이웃이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등대교회 나오시라고, 우리끼리라도 행복한 신앙생활을 해 보시자는 말이 통하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김치나 쌀 나눠줄 때는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들도 예수 믿으라는 말에는 돌변해 온갖 욕을 해댔다. 쪽방 골목을 걸어다가가 이유 없이 손찌검을 당하기도 했다. 김 목사는 3년 전까지 쪽방 사람들에게 멱살을 잡혔다고 했다. 욕지거리와 놀림, 빈정거림은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속이 편하다.

"어느 날은 한 아저씨가 술에 취해서 제 뺨을 때리는 겁니다. 이후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니 나중에 더 친해지고 물으니, 편해서 그랬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누구에게 손을 대기는 고사하고 욕이라도 하면 경찰에 잡혀갈텐데 목사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거잖아요.' 그러는 겁니다. 어쩌겠습니까, 맞아야지."

'뭐 좀 준다고 가르치려 드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 인생인데, 잔소리하는 젊은 목사는 귀찮은 존재였다. 그렇지만 오늘 욕 들어도 내일 찾아가기를 반복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만 한 것도 아니고, 쪽방 사람들이 필요한 복지 서비스에만 일방적으로 제공하지도 않았다. 김 목사는 최대한 그들 삶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밀리는 것은 영적 싸움에서 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쪽방 사람들에게 일원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교인도 한 명 두 명 모여 3년 즈음에는 40명까지 늘었고, 2009년 6월에는 예배 공간을 지금 장소(종로구 창신동 464-8)로 옮겼다. 1층에는 성인 오락실이 있고, 2층에는 등대교회, 그리고 3·4층은 여관이 자리 잡고 있다. 교회 주변 환경이 그리 좋지 않은 편, 여느 교회라면 들어가지 않을 곳이다. 하지만 등대교회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쪽방과 가까운 곳에 이만한 장소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김 목사가 일하는 사무실에서는 창문 너머로 쪽방들이 훤하게 들어온다. 교회 예배 공간은 마루를 깔아 예배 외에도 다양한 모임도 가능하도록 했다. 한쪽으로는 사무실과 식당, 그리고 방 2개를 만들어 노숙인들의 공동생활 공간 '쉼터'로 쓰고 있다. 또 한쪽에는 세탁실과 샤워실도 갖추고 있다. 교인도 꾸준히 늘어 지금은 일요일 예배 때 70~80명이 출석하고 있다.

수치로만 보면, 꾸준하게 성장하는 교회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예배라고 하기에 민망할 만큼 엉망인 시절이 오래갔다. 술 취한 교인이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예배하러 나오는 게 어디야, 대단히 발전한 모습이다.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예배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리는 없었다. 매번 "설교를 그 따위로밖에 못 하냐"는 고함이 욕과 함께 날아왔다. 그러면 반대쪽에서는 "너는 뭔데 목사님에게 욕하느냐"고 맞받아치다가 결국 주먹다짐으로 번졌다. 김 목사도 어찌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던 날들이 개척한 뒤 3~4년 동안 지속되었다.

"예배라고 할 수 없었죠. 처음엔 기가 막혔습니다. 칼을 들고 교회를 쳐들어온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술에 취해 자기 분을 못 참고 그런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경찰을 부르거나 공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았습니다. 참고 기다리면 나중에는 자신이 잘못한 걸 알고 미안해합니다. 저를 때렸던 사람은 지금 저희 교인입니다. 요즘에는 예배 시간에 소리 지르면 왕따 당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도, 줄어든 것도 아니다. 가지가 많지도 않은데 바람은 잘 날이 없다. 교인뿐 아니라 쪽방 사람들도 문제가 생기면 김 목사를 먼저 찾는다. 그래서 김 목사는 늘 바쁘다.

쪽방 돕는 목사, 속아 주는 인생

▲ 모처럼 집에서 쉬고 있는 박민규(가명) 아저씨네 쪽방을 김양옥 목사가 방문했다. 박 씨는 폐지를 팔아 시골 부모님에게 용돈을 보내는 쪽방에서는 알아주는 성실한 사람이다. 김 목사는 박 씨에게 방 처소를 하자고 제안했다. 등대교회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쪽방 청소와 이불 빨래 봉사를 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노숙인이나 쪽방에 갓 들어온 사람을 처음 만나면, 먼저 병원부터 찾는다. 어디가 아픈 곳은 없는지부터 따져봐야 어떻게 도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행려 변동이 있는 동대문 인근의 동부시립병원이나 국립의료원, 서울의료원 등은 김 목사가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다. 평소에도 쪽방 사람들은 아프면 김 목사의 도움을 받아 입원하고 퇴원한다. 또 기독 의료인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방문해 쪽방 사람들을 검진한다.

"치료를 받는 중에는 알아서 교회 나가겠다고 합니다. 없는 사람이 아프면 더 서러운 법인데 간호해 줄 사람 하나 없는 자신을 돌보는 등대교회가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하지만 퇴원하면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오히려 병원비를 내지 않고 도망가 버리는 일이 많아 소개를 해 준 김 목사가 난감한 경우가 많다. 특히 비용이 많이 드는 치과 치료를 받고서 100만 원이 넘는 할부금 중 한두 달 치만 내다가 사라져 버리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활동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치료를 도운 병원에 미안하다고 김 목사는 말했다. 김 목사는 "나도 저 상황이면 배신할 수 있다. 신의를 저버릴 수 있을 같다"고 했다. 그렇기에 다시 아픈 이들을 데리고 병원 문을 두드린다. "염치와 체면을 따지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가야지 어떻게 합니까."(웃음)

병원 다음으로는 구청이나 주민센터를 찾아가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는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확인한다. 또 생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하는 일도 김 목사가 돕는 중요한 일 중 하나. 쪽방에는 가족의 신원을 알게 되어도 가족들이 만나기를 원치 않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창석 할아버지(79·가명)도 두 아들이 있지만 30년 가까이 찾아오지 않는다. 주민센터를 통해 연락처를 건넸지만, 아들 쪽에서 거절해 만날 수 없었다. (가족이라도 한쪽이 만남과 연락처 교환을 거부하면, 주민센터는 알려 주지 않는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주변 사람과 소통이 쉽지 않은 할아버지 대신 김 목사가 처리하는 일들이 많다. 아들이 되어 주는 셈이다.

일자리를 알아보고 쪽방 사람들에게 주선하는 일도 김 목사에게는 중요한 활동이다. 좁은 쪽방에서 하루 종일 지내다 보면 사회에서 더 멀어지는데,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오히려 고맙다. 그래서 이곳저곳 수소문해 연결해 준다. 그렇지만 3개월을 넘기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역시 일자리를 소개한 처지라 김 목사는 늘 곤란해진다.

"만날 속는 거죠. 비법이 있겠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서, 수급자들은 겨우 40만 원 조금 넘는 돈을 받아서, 술 먹고 도박하느라 날리는 걸 보면 답답하고 화도 나지요. 그래서 또 그러지 말라고 또 잔소리하게 됩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살도록 붙들어 매고 있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의 영적 싸움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분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한 발만 삐끗해도 쪽방 사람들처럼 살 수 있다고 늘 생각합니다."
▲ 지금은 평안하게(?) 예배를 드리지만,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예배 시간에 싸우고 고성이 오가는 일이 흔했다. (사진제공 등대교회)
쪽방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때도 김 목사의 신세를 진다. 좁은 골방에서 차가운 주검으로 변한 이들을 떠나보내는 일을 김 목사가 맡아 온 것이다. 서류상 가족과 친지들에게 우선 연락이 가지만 나서는 이는 드물다. 그러면 가족들을 겨우 설득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거쳐 등대교회가 200만 원 가량 하는 장례비의 절반 정도를 내면서 화장 절차를 밟았다. 그래서 요즘 김 목사는 쪽방 사람들에게 미리 유언장을 써 놓으라고 권한다. 시신에 관한 것은 김 목사에게 위탁한다는 내용도 곁들여서.

세탁과 샤워, 식사까지…언제든 환영

등대교회 교인들이 아니어도 쪽방 사람들, 노숙인은 수시로 드나든다. 우선은 하루 세끼를 모두 무료 급식을 하기 때문이다. 10~20명 정도가 밥상에 둘러앉는다. 수요일 저녁에는 50명 가까이 모이고, 주말에도 함께 식사하는 이들로 교회가 가득 찬다. 식단의 대부분은 사모가 차린다. 주말에 일주일 분량의 밑반찬을 만들어 놓으면, 쉼터 식구들이 돌아가며 밥과 국을 끓인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수요일과 주말에는 사모도 밥상 차리는 일에 동참한다.

밥만 먹고 가는 건 아니다. 세탁실에서 빨래도 하고, 샤워장도 이용한다. 쪽방 사람은 물론 누구든지 목욕과 빨래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9만 원 정도 나오던 수도 요금이 지금은 30만 원을 넘는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목욕탕과 샤워장 한쪽에는 헌옷을 깨끗하게 빨아 놓았다. 필요하면 가져가서 입으라는 것이다. 등대교회는 쌀과 김치 등 밑반찬, 라면, 부탄가스 등을 쪽방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교회에도 기본적인 생필품은 비치해 놓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은 문화 교실을 열어 함께 영화나 콘서트를 보고, 시 낭송 대회도 연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웃음 치료, 내적 치유 세미나도 꾸준히 개최했다. 김 목사는 "문화 활동은 쪽방 사람들과 노숙인들이 멍하게 있지 않도록 돕는 활동이다"고 했다. 무기력하게 하루하루 보내지 않도록 자꾸 귀찮게도 하고, 몸을 움직이게 하고, 속마음을 털어놓게 하고, 감정 표현을 하게 하는 것이다.
▲ 등대교회가 마련한 공동 식사.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80여 명이 모여 함께 식사한다. 자원봉사자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이소영 사모가 맡는다. (사진제공 등대교회)
세상으로 가는 징검다리, 노숙인 쉼터

쪽방에도 들어갈 형편이 안 되는 노숙인들을 위해서 등대교회는 쉼터를 마련했다. 등대교회가 지금 건물로 이전하면서 한쪽에 작은 방 2개를 만들었다. 현재는 10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쉼터에서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6개월 정도까지 함께 지내면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한다.

쉼터 생활에는 간단한 규칙만 있다. 술을 먹거나 타인을 폭행하면 퇴소 조치한다는 것. 그리고 야근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낮에는 일하러 갔다가 늦어도 9시까지는 귀가해야 한다. 다 같이 모여 9시 뉴스를 시청하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하루 일과를 나눈다. 김 목사와 전도사가 돌아가면서 함께 생활하지만, 나눔은 예배나 기도회 형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김 목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소소한 일상과 마음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치유가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쉼터라는 징검다리를 거쳐 사회에 잘 정착한 이들이 많다. 생활한 노숙인 가운데는 LH공사의 지원을 받아 정착한 사람이 열다섯 명이다. 노숙인 가운데서 CEO까지 나왔다. 이러한 '성공 사례'들이 나오면서 다른 노숙인, 쪽방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쉼터에는 쪽방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는다. 쉼터는 자기 돈이 전혀 들어가지 않기에 쪽방 사람들은 들어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를 적응해 가는 길에서 후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자꾸 공짜, 무료에 익숙해지면 사회로는 나가기 더욱 어려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공간이 모자라 쉼터에 남성만 생활한다. 하지만 여성 노숙인, 가족 노숙인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와 도움을 구한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등대교회가 책임질 수 없는 형편이라, 쪽방을 얻어 임시로 거처하도록 하거나 다른 단체나 기관을 연결해 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래서 등대교회는 조금 더 교회 공간을 넓혀 가려는 꿈을 꾸고 있다. 교회가 자리 잡은 2층 위쪽에 있는 여관을 빌릴 수만 있다면, 여성 생활 공동체도 함께 꾸려가 보고 싶다고 김 목사는 꿈을 말했다.

쌓이는 자기 의, 기도로 풀 수밖에

▲ 쪽방 골목길을 오가며 만나는 사람들. 김 목사는 그들에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언덕, 더 행복한 삶을 찾아 가도록 빛을 비춰 주는 등대이고 싶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쪽방 사람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 같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람이지만, 김 목사 내외도 그동안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다. 노숙인들과 함께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소명으로 알고, 미리 공부도 하고 훈련과 검증 과정도 거쳤지만 크고 작은 시련의 산들을 넘어야 했다.

그렇지만 딱 3년 만에 몸도 마음도 고갈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사랑을 베풀고 마음을 주면 오는 정이 있어야 하는데, 일방적이기만 하니 사람을 만나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도움을 받을 때 좋아하다가도 조금만 수틀리면 육두문자를 쏟아 내는 모습도 반복해서 보니 나중에는 진저리가 났다고 했다. 급기야는 수도 없이 속고 배신을 당하면서 그들은 이기적이고 감사할 줄도 모른다고 분노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비슷한 기간 이소영 사모도 우울증에 시달렸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이 봉사와 헌신을 반복하면서 마음에도 탈이 났던 것이다. 김 목사는 자신이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과 멀어져 가는 자신을 보고 사역을 잠시 멈추고 기도원에 들어가 침묵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노숙인을 섬긴다면서 내 의에 빠져 있는 내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노숙인 사역을 내 자랑으로 내세우며 치적으로 쌓아 가는 교만을 회개했습니다. 복음도 모르고 복음의 능력도 신뢰하지 않는 종을 용서해 달라고,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안 되겠으니 제발 도와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곡기를 끊고 회개 기도하면서 저는 성령 체험을 했습니다."

김 목사는 그 사건이 터닝 포인트였다고 했다. 물론 뜨거운 마음으로 산에서 내려오더라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배후에서 그들을 지배하는 영적 실체와 싸우면서, 이러한 구조를 만들어 낸 세상을 향해 분노하거나 노숙인들을 미워하게 되는 우를 반복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돕는 손길 덕에 더 겸손하게

교만해지지 않는 길은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해지는 것과 더불어, 홀로 일을 다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여럿이 협력하는 것, 그리고 쪽방 사람들 곁을 늘 지키는 것이라고 김 목사는 말했다. 등대교회가 벌이는 일들에는 만만치 않은 재정이 들어간다. 쪽방과 노숙인들로 구성된 교인들이 이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헌금으로는 유지 비용의 30%수준 밖에 해결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후원 교회와 노회, 이름을 밝히지 않는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채워졌다. 다만 후원금 가운데 십일조는 받지 않는다. 김 목사는 "십일조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에 내는 것이 맞다. 그것은 우리 몫이 아니다"고 했다.

잡동사니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쪽방을 청소하고 묵은 빨랫감을 세탁하는 일에 세 교회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방문해 거들고 있다. 이들은 노숙인들의 목욕까지 돕는다. 매주 한 번씩 나눠 주는 반찬은 교회 세 곳의 후원으로 가능하다. 새문안교회와 동성교회는 주요 절기 때 예배 시간에 특송한다. 한 달에 한 번은 남서울평촌교회 의료봉사팀이 찾아와 쪽방 사람들의 건강을 체크한다. 본죽 이사장과 직원도 회사에서 마련한 음식을 들고 달마다 쪽방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고 식사한다.

그래도 여전히 일손은 부족하다. 쪽방 하나에 서너 명 많게는 예닐곱 명은 붙어야 제대로 청소할 수 있다. 수요일과 토요일 식사하는 인원이 많을 때는 밥상 차리는 일을 돕는 봉사자가 지금보다 더 필요하다. 노숙인과 쪽방 사람들의 교회 공동체이지만, 이웃 교회 교인들과 함께 예배하며 교제할 수 있는 자리가 더 없이 소중하다. 함께 예배하는 것만으로도 큰 봉사가 되고 힘이 된다고 김 목사는 말했다.
▲ 김양옥 목사는 젊은 시절 꿈꾼 노숙인 사역을 하고 있는 '꿈을 이룬 행복한 목사'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주재일 기자 / 한국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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