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없는 종교인들
예수님 없는 종교인들
  • 신성남
  • 승인 2014.02.26 20:1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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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칼럼] 신성남, "자신조차 구원 못 하는 교회 "

▲ 신성남 / <어쩔까나 한국교회>저자
오래 전 직장 생활을 하던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작은 기술 회의에서 당시 필자가 근무하던 연구소의 부소장이셨던 L박사님께서 하신 이야기가 하나 있었는데 그 내용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4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열거하자면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 ‘똑똑하고 게으른 사람’, ‘미련하고 부지런한 사람’, 그리고 ‘미련하고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이 중에서 가장 문제아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참석자들에게 질문을 주셨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마지막 항목의 ‘미련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미련한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하다면 정말 어디에 쓸까 하고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부소장님은 단호히 그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미련하고 게으르면, 바로 그 게으름 때문에 적어도 큰 사고는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남에게 별 유익을 주지도 못 하지만, 그래도 크게 해는 안 끼친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미련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큰 골칫거리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좋은데, 온갖 일에 나서서 일을 망치고 조직이나 동료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를 보며 이와 유사한 상황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르게 각성하고 열심이 있는 사역자가 많으면 가장 좋겠지만, 적어도 ‘어리석고 부지런한 사역자’들이 득세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은 방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이 글에서는 바로 이런 유형의 종교적 열심에 대해 그 심각성을 간략히 논해 보고자 합니다.

종교적 열심과 제자도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을 기록한 복음서를 읽다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이 생각보다 매우 단순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 “서로 사랑하라”는 단 한 마디로 요약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반면에 지금 현대 교인들의 생활은 어떠한지요. 대부분의 신도들은 한 주일 내내 각종 예배와 모임으로 분주합니다. 아울러 여러 직분과 직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대충 정리해 보아도 장로, 권사, 집사, 교사, 반사, 구역장, 권찰, 성가대, 기관장, 부서 임원, 조장, 그리고 순장 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물론 이런 사역들이 그리 가벼울 리가 없습니다. 가정과 생업 또는 학업에 책임을 갖고 있는 신도들에게 때로는 적지 않은 짐이 됩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의 일’이라 생각하기에 기꺼이 희생하며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에서는 신앙생활에 대한 오해가 간혹 발생합니다. 즉 교회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헌금 많이 하고, 심방 잘하고, 맡은 직책이나 부서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행위 자체를 매우 훌륭한 신앙생활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성경을 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위와 같은 것들이 신앙생활의 진정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다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신앙인은 ‘바리새인’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수시로 제사를 드리고 안식일과 절기를 지켰습니다. 부활과 천사와 영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유대교의 가장 엄한 종파로서 당연히 토색과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매주 두 번씩 금식을 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신도들이 충성도가 매우 높다고 하지만, 과연 바리새인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종교적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요즘 ‘주일 성수’ 문제로 다소의 논란이 있지만, 그들의 안식일 성수에 비하자면 아예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몇해 전 뉴욕에 사는 유대교 랍비 솔롬 에머트가 도로에서 무단 횡단하다가 근처에 있던 한 경찰관의 단속에 걸렸습니다. 경찰관은 에머트에게 교통법규 위반 티켓을 발부하기 위해 신분증을 요구했고, 에머트는 얼마 떨어지지 않는 집에 가면 신분증을 갖고 나와 제시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경찰관은 그의 집에 가는 것 대신 강제로 그로 하여금 이름과 주소를 직접 쓰게 했습니다.

유대교 의례에 따라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글 쓰는 행위’를 하지 않던 에머트는 이후 경찰관의 강제적인 명령이 부당하다며 민원을 제기했고, 결국 해당 경찰관은 다른 경찰서로 전출됐다고 합니다. 이처럼 지금도 많은 유대교도들은 율법의 안식일을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 중세 수도원의 고고한 수도사들이라고 할지라도 유대교의 바리새인들보다 더 종교적이라고 감히 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삶이 종교였고, 종교가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종교적 열심에 몰두했던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하셨던가요. 잘 아시는 그대로 ‘독사의 새끼’나 ‘지옥 자식’이라고 하셨고, 또한 “화가 있으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이를 보면 바리새인들은 ‘종교 생활’에서는 대단한 열심과 능력을 보여 주었지만, 바른 ‘신앙생활’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10:2)."

즉 바리새인들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른 지식이 없는 종교적 열심은 결국 맹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진리를 종교화하는 데에는 탁월했지만, 그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는 삶에서는 큰 낭패를 보았습니다.

물론 이런 지적이 형식이나 제도를 무조건 부인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진리의 껍데기는 잘 취했지만, 그만 그 알맹이를 상실한 경우가 너무 많았다는 점을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진리의 종교화

이처럼 본질의 껍데기만 취하면 기독교 역시 그저 그렇고 그런 하나의 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세 교회는 그런 껍데기를 가지고도 무려 천 년을 버텼습니다. 종교가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단 교회가 변질하여 종교화하기 시작하면 이를 다시 되돌리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종교의 기득권에 취한 지도자들은 절대로 그 불의한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하고, 종교의 보호막에 안주하는 신도들은 웬만해선 스스로 각성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종교라는 틀 속에서 우민화한 신도들은 결국 맹신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대개는 아무 분별력이 없이 그저 지도자가 하자는 대로 순응하는 신도가 됩니다. 모이라면 모이고, 돈 내라고 하면 돈 내고, 그리고 집 짓자면 집을 짓는 맹종이 체질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습해도 마냥 할렐루야하고, 교권을 함부로 남용해도 오로지 아멘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는 거짓 선지자들과 맹신도들의 무속적인 장터로 변합니다. 성경과 십자가는 단지 장식품이 되고, 종교적 허울 속에서 세속적 명리와 기복을 서로 열심히 사고파는 것입니다. 이른바 십자가 정신을 상실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도처에 교회와 수도원과 기도원을 세우고, 매주 새벽 기도회와 철야 기도회와 각종 예배로 분주히 모여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요란한 통성 기도도 헛되이 공기만 울릴 뿐입니다. 유명 목사들이 정치권을 흔들고, 집사가 재벌이 되고, 그리고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 봤자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지도자나 신도들이 모두 한통속으로 무속적 염불에 몰두하고 있는데 무슨 신령한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거짓된 종교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기 힘든 이유는 바리새인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돌이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즐겼습니다. 사람들에게 선생이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켰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습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자신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했습니다. 위선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진리가 잘못 포장되어 외면화하고 종교화하면 이런 끔직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예수님 없는 종교인들

바리새인들은 그 대단한 종교적 열심에도 불구하고 진리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종교인이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오늘날 변질한 교회 안에도 예수를 따르지 않는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정작 삶으로는 예수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종교 생활에서 세계 그 어느 교회보다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일부 이단들을 제외한다면, 세상에서 예배와 집회가 가장 많은 열성적인 교회입니다. 또한 헌금이 가장 많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대형 교회도 가장 많습니다. 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목회자들도 너무 넘쳐서 오히려 이를 걱정해야 하는 아주 행복한 교회입니다. 비록 대다수가 허접한 엉터리 학위이기는 하지만 박사도 넘치는 교회입니다.

신도들도 헌신적이며 개인적인 기도와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제자 훈련과 영성 훈련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매일하는 새벽기도회마저 부족해서 툭하면 ‘특별새벽기도회(특새)’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흔한 부흥회도 그냥은 못 합니다. ‘특별대부흥회’라고 합니다. 더 강력하고 더욱 새로운 종교적 자극을 위해 집회나 프로그램이 갈수록 인플레이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유창한 언변과 박사 학위로 치장을 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목사가 인도하는 제자 훈련은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도를 모르는 영성 훈련도 필히 실패합니다. 오직 인간의 종교적 열정만 난무하는 다른 프로그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교회 장부 은익, 공금 유용, 헌금 강요, 교권 남용, 간통, 세습, 뇌물 수수, 교인 차별, 거짓말, 학력 위조, 설교 표절, 그리고 당회와 제직회 사병화 등을 일삼는 인사들이 제자 훈련과 영성 훈련을 주도한다면 그게 바른 훈련이 되겠습니까. 성경은 이런 위선자들을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유다서1:12)’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왜 ‘개독교’라는 악명을 듣고 있을까요. 또한 무슨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들이 계속 늘고 있을까요.

그 일차적 원인은 바로 ‘진리의 종교화’에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진리를 왜곡하여 상품화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저 주신 복음을 수십 종류의 잡다한 헌금과 십일조로 가포장해서 아주 비싸게 팔아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교인들은 등골이 휠 정도입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는 교인의 생활이 어려워 은행에서 대출한 돈마저 십일조를 내라고 합니다.

물론 신앙생활의 상당 부분이 외형적으로는 종교 생활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교회에 모이고, 헌금하고, 부서 활동에 참여하고, 그리고 봉사하는 것 자체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목적이 건강하고 중심만 바르다면 이러한 것들은 매우 소중하고 귀한 일입니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런 종교적 활동을 무조건 모두 신앙생활과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맹신에서 보듯이 모든 종교적 열심이 다 신앙적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식과 양심이 파선한 종교는 사교 집단

이 순간에도 이 나라 곳곳에는 월 사례비가 백만 원도 안 되는 적은 연봉으로 자녀들의 생계마저 위협을 받으며 사역에 임하고 있는 신실한 목사님들이 아주 많습니다. 전체 목회자의 과반수 이상이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빈민촌 선교 정신으로 세워진 D교회의 담임목사는 억대 이상의 연봉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부대비나 다른 지원비 등을 포함하면 실제 연봉은 그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더구나 새 담임목사 취임 이 후 3년 동안 무려 48명의 부목사와 전도사들이 사임 또는 교체되어 교권 장악을 위한 물갈이 의혹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당회나 제직회 또한 매우 파행적으로 운영되어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초대형 교회 건축으로 인해 천문학적 은행 빚을 지고 있는 S교회 담임목사의 수령액 또한 2억 원이 넘는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돕니다. 교인들의 피땀 어린 헌금을 거룩하신 목사님들께서 아주 은혜롭게 퍼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의 두 교회 모두 별 시답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재정 장부를 공개하지 않아서 교인들은 그 자세한 내막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결백하고 교회 돈을 도적질한 적이 없다면 장부를 즉시 공개해야 정상이 아닐까요. 그래서 매주일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자면 은혜는커녕 오히려 울화가 치민다는 성도들이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마다 손에 검은 잉크를 묻여가며 등사기로 밀어서 주보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름종이에 철필로 쓰다 보니 어느 교회에서는 그만 설교자 직함이 ‘아무개 목사’가 아닌 ‘아무개 독사’로 잘못 프린트되어 매우 민망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고의가 아닌 기술적 사고였겠지만, 요즘 사실 어떤 교회들을 보면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신랄한 책망처럼 도리어 그게 제대로 된 직함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마저 듭니다. 사회 여론과 상식마저 대적하며 철모르는 새파란 애송이에게 공교회를 통채로 세습하거나 매년 수억 원의 교회 돈을 퍼가면서 아주 태연한 일부 귀족 목회자들의 멀쑥한 얼굴을 보면, 이게 과연 ‘담임목사’인지 ‘담임독사’인지 헷갈리게 하는 자조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어떤 경우이든 상식을 벗어난 종교는 이미 사교 집단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은총의 영역인 상식 속에 피는 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정치보다 더 간교하고 도적보다 더 무서운 것이 종교입니다. 온 세상을 한번 둘러 보십시요. 도대체 종교라는 좌판을 깔고 신도들의 단물을 빨지 않는 곳이 몇 군데나 있는지요.

많은 종교들이 신도들의 기복 심리를 이용하여 거짓된 복과 평안을 약속하고 그들의 돈을 갈취하고 있습니다. 우민화한 신도들 또한 상당수가 자기 종교의 정체성과 핵심적 가르침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미신과 무속에 빠져 엉뚱한 인간들에게 돈을 바치고 허탄한 욕심에 손을 비비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파는 자와 예수님을 따르는 자

교회가 바른 신학을 정립하고 그 깊이를 추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변질된 교회에서 이미 직분자들의 신앙 양심은 썩어 파선하였는데 거기에다 만날 신령한 은사와 심오한 신학을 논해 봐야 무슨 효과가 있을까요. 개 귀에 도덕경을 읽는 격입니다.

지금 교회 돈을 마구 퍼가거나 거짓말과 세습과 성추행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일부 유명 목회자들 면면을 한번 보십시요. 모두 겉모습은 번지르르하고 설교도 신구약을 오르내리며 청산유수로 잘합니다. 다만 그들의 말과 삶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말은 성자 수준인데, 실제 삶은 거의 밤손님 수준이지요.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도적질하여 아주 호사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소위 지도자라는 인사들마저 이 모양일진대 그들을 추종하는 맹신도들은 또 오죽할까요. 이렇게 한국교회는 아직 모도 제대로 못 심었는데, 그동안 막걸리 담가 먹을 궁리만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성도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한 자들은 이방 로마인들이 아니라, 소위 하나님을 섬긴다는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은 몇 조각에 팔아먹은 자는 주님의 수많은 이적들을 직접 보고 체험한 가롯 유다입니다.

심지어 귀신과 사단도 예수님은 압니다. 따라서 단지 예수님을 눈과 머리로 아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진리 안의 참된 지식은 단순히 아는 정도가 아니라, 바르게 알고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자주 말하고,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설교한다고 하여도 실제 삶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단지 또 하나의 가련한 종교인일 뿐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는 삶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비로소 진정한 제자입니다. 제자도란 진리를 향한 바른 지식과 순결한 삶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좁은 길입니다. 사도행전의 착한 제자들은 목숨까지 바쳐가며 그 길을 겸허히 걸었습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마다 강단에서는 은혜롭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노래하고, 내려와서는 이 핑계 저 핑계 둘러대며 수시로 교회 돈을 삼키는 간 큰 종교인들을 과연 그 어떤 고상한 신학으로 교정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교회는 지금 상식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중세 교회처럼 세상을 향해 "우리에게 구원이 있다”는 오만한 주장을 펼치기 전에, 먼저 자신부터 참회하고 스스로 구원의 자리로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교회처럼 자기 자신조차 구원 못 하는 그런 거짓된 교회는 결코 성경이 명하신 바른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1:19)."

신성남 / <어쩔까나 한국교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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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2014-03-12 07:33:10
교회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제목을 보니 마치 교회가 스스로를 구원하기 애쓰려는 사람들의 모임인것으로 여겨지는데, 뭔가.앞 뒤가 맞지 않는 사고인 것 같습니다.

핵심이 없다 2014-03-05 07:53:25
대안없이 문제점만 나열해 놓은 글이네요! 누구나 아는 교계의 현실이고 문제점이죠. So What~?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였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성도 2014-02-28 06:33:43
이시대에 꼭필요한 메세지입니다
종교지도자들 보다 제자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