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거나 반갑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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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대
  • 승인 2014.04.01 16:2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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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신적 폭력을 향한 헌사 - 영화[노아]를 보고

 

 

 

 

 <노아>가 한국보다 늦게 지난 28일 미국에서 일제히 개봉되었다. 영화가 성서를 왜곡했다고 해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하는 비판도 적지 않았지만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에서 1위에 올랐다.

반면 한국에서는 <캡틴 아메리카>의 1/3정도 선에서 박스 오피스 2위를 기록했다.
이미 많은 평자들이 이야기했지만 소재의 한계를 느낀 할리우드가 성서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을 뿐 이 영화는 기독교 영화도 선교 영화도 아니다. 굳이 <노아>를 기독교 영화로 분류하고 싶다면 성서에서 소재를 따온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도 기독교 영화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성서의 밋밋한 이야기만으로, 다시 말해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를 적당히 각색해서 영화로 만들었다면 기독교인들은 환영했겠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은 냉소를 보냈을 것이다. 게다가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이나 러셀 크로 같은 배우가 작업에 참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노아>는 성서의 이야기가 아직도 우리에게 철학적 고민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반가운 영화다. 기독교를 다시 철학적 소재로 삼고 있는 지젝, 바디우, 아감벤, 바티모 등에 대한 영화적 화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의 폭력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발터 베냐민의 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의 개념을 소개한다. 신화적 폭력은 법에 기초한 구조적 폭력이다. 법을 만든 사람들은 구조 속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법을 제정한다. 여기 예속된 사람들은 법이 가진 폭력성을 합법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반면 신적 폭력은 구조적 폭력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구조적 폭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행하는 폭력이다. 쉽게 말해 부조리한 세상의 변혁은 세계 안에서 제정된 법과 규칙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베냐민은 구약 성서에서 이 개념을 끌어 내면서 혁명적 폭력이라고도 부른다.

기존의 질서 안에서는 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친 사회 철학자들이 유대 기독교의 메시아적 개입을 철학에 호출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는 신적 폭력에 대한 영화다. 트랜스포머를 닮은 듯도 하고, 성서에는 나오지 않아 창조과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공룡을 닮은 듯도 한 감시자들로 불리는 타락천사들은 본래 빛이었다. 그 빛은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추방시키는 창조주의 처사가 불의하다고 생각하고 추방된 이들을 돕지만 그것으로 인해 빛은 진흙과 바위로 몸이 무거운 존재가 되었다.

간혹 그들 사이에서 빛이 발현되기는 하지만 바위 틈새에 약하게 드러날 뿐이다. 빛은 이후로도 인간을 돕지만 그들의 도움을 받은 인간들은 감시자들을 비웃듯이 악한 문명을 만들어 낸다. 빛은 인간 이성을 상징한다.

계몽주의 이후 신이 사라진 시대에 이성이 그 자리를 꿰찼지만 이성도 바위처럼 단단해져 종교 못지 않은 죄를 저지른다. 이제 바위 틈새로 남아있는 희미한 이성으로는 세상이 변혁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감시자들은 노아와 함께 신적 폭력에 가담한다.

인간의 이성은 두발가인의 말처럼 우리끼리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없다고 가르치지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성적 인간의 욕망은 힘을 합쳐 세상을 종말로 몰아가고 있다. 이성은 하나님의 빛과 관계되어 있을 때만 제 가치를 갖는다고 영화는 우화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신적 폭력이 개입한다. 신은 무지막지하게 인류를 죽인다. 티끌만한 휴머니즘도 용납하지 않는다. 노아도 신의 충실한 대변자가 된다. 그는 감시자들이 최초의 인간을 추방시킨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다가 추한 모습으로 변한 것을 들어 알기에 거역하지 않는다.

노아는 괴롭지만 자기가 희생양이 되어, 또는 폭력적 제의의 제사장이 되어 이 땅이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창조주에게 돌려 주어여 한다. 그에게 남은 일은 그와 가족을 제물로 삼는 일이다. 그런데 셈에게서 아기가 태어난다. 아기를 죽여야 하지만 노아는 차마 하지 못한다.

불편한 진실

노아가 손녀를 죽이려다 머뭇거리는 장면을 종교적 광기에 사로잡혔던 노아의 회심으로 이해한다거나, 심판의 하나님이 자비도 가르쳐 주신다는 노아 아내의 말에 방점을 찍는다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을 놓친 것이다. 노아는 여기서 자신이 하나님의 세계 재편 계획에 충실한 파트너가 되는 기회를 놓쳤다.

만약 손녀를 살린 노아에게서 인간다움의 회복을 발견한다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포격을 퍼붓고 그로인해 아이들의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고 목숨까지 앗아가는 살인자들이 가정에서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아이들은 사랑할 터인데 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렇다면 노아는 의인이 아니다. 지젝의 말처럼 신적 폭력에 가담한 주체들은 모든 책임과 위험부담을 홀로 떠 안아야 하는데 노아는 이 장면에서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노아는 살아남은 자의 괴로움으로, 무시무시한 신적 폭력에 가담해 놓고서는 위험부담을 외면한 일 때문에 술에 취해 괴로워한다. 노아역을 맡은 러셀 크로 역시 어느 인터뷰에서 그 장면을 “살아남은 자의 괴로움”이라고 설명했다.

 

 

 

홍수는 다시 시작되었다

가나안의 조상이 된 함은 가족 곁을 떠난다. 그는 방주에 숨어든 두발가인으로부터 살인을 배웠고, 노아의 냉정함으로부터는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의 필요성을 배우게 된다. 만약 그가 방랑길에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인간적’으로만 풀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그는 또 파국을 보게 될 것이다.

바벨탑 사건은 함과 같은 생각이 만들어 낸 다른 재앙이다. 무지개는 떴지만 악은 지상에서 소멸되지 않았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모두 추한 생얼굴을 보여준 시대는 세계를 견인해나갈 사상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

베냐민이 신적 폭력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던 때에 칼 슈미트는 정치신학을 통해 주권을 이야기했다.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자를 말한다. 기존의 세계가 전혀 예상치 못한 긴급사태에 직면했을 때, 법 바깥으로부터 신속한 결정을 해야 한다. 여기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구체적인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주권자라고 말할 수 있다.

슈미트는 이런 주권자의 결정은 하나님의 기적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노아>는 주권자의 결정과 그 결정에 고민하는 노아의 고민을 담은 영화다 지젝을 비롯한 좌파 사상가들이 베냐민, 슈미트에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혁명의 시도가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디, 지젝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방법이 대의제 말고는 다 막힌 상황을 폭력으로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유대 기독교 전통의 신적 폭력이라는 메시아적 개입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미 자본주의의 횡포로 대홍수의 기미는 보인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신적 폭력을 왜곡한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안타깝게도 노아는 실패했다.

그의 변신은 하나님의 자비를 설명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예수에게 와서 하나님은 자신을 죽음이라는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이 신적 폭력이며 그것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더 이상 심판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폭력의 희생물이 됨으로써 세상에 자비를 더한다. 그것이 진짜 자비고 사랑이다. 노아는 실패했고 예수는 성공했다. 그리고 요즘 르네상스를 맞은 바울은 이를 정치철학(신학)화 했다.

노아가 살아남은 이유

노아는 정의가 무엇인지 끝까지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심판적 정의는 무서웠고, 자비적 정의는 자신의 가족이 살아남을 명분만 주었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비록 실패했지만 증인이 되어야 한다. 주권적 정의가 계몽주의 이후 자리잡은 합리성이라는 말로 훼손되어서는 안되고, 자비가 개인에 대한 용서나 구원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진리를 증언할 증인 말이다. 가족에게도 무서운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라 선택된 줄 알았어요.” 라고 말한다.

이 때 노아는 “그분이 나를 선택한 것은 내가 그 일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물에 의한 대홍수 보다 욕망의 의한 대홍수가 파멸을 재촉하는 시대에 하나님은 좋은 사람을 찾고 계신 것이 아니라 책임질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노아>는 영화 내내 보여주고 있다.

<노아>가 영화로서는 재미 있었냐고? 너무 뚜렷한 주제의식을 담느라고 배우들의 연기가 역할극(의인극)을 하는 것처럼 어색하다. 자연스럽게 주제가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했지? 그럼 다음으로 넘어간다” 라며 관객을 가르치는 것 같아 지루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김기대 목사 / LA 평화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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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2014-04-09 04:05:49
다음은 어떤 분의 영화 비평의 한 대목입니다.

[무신론자인 영화 “노아”의 감독 Darren Aronofsky 는 이 영화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영화는 이제까지 세상에서 만들어진 영화 중 가장 비 성경적인 영화이다.” 또한,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밝힌 이 영화의 제작자는 “성경의 인물인 “노아”의 이야기를 성령의 감동으로 쓴 성경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세속적인 이야기로 만든 것이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고 신문들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영화가 개봉되기도 한참 전부터 열화 같은 부정적인 비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은 영화를 보러 오십시오…. 이 영화는 지구에 대한 사람의 책임, 사람과 동물과의 관계, 영적인 것에 대한 의미, 이 세상 안에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 등 모든 환상적인 주제들을 얘기하고 싶다면 이 영화를 봐야 합니다.”라며 이어서 “예술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기가 막히게 좋을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무신론자들에게 가장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 영화의 제작진들은 이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단순히 성경의 사건과 인물을 빌려 만든 넌픽션 영화일 뿐이지만 그 내면에 숨어있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인본주의적이고, 동물을 애호하는 진화론자들의 주장들을 대변하는 영화이다.]

예원준 2014-04-05 08:26:09
비판의 핵심은 하나님자리에 뱀을 올려 놓고 있는것,,뱀껍질을 축복의 도구로 삼고있는 불손한 의도이다..

친구 2014-04-04 00:19:48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그러나, 쉽게 동의할 수는 없군요. "물에 의한 대홍수 보다 욕망에 의한 대홍수가 파멸을 재촉하는 시대에 하나님은 좋은 사람을 찾고 계신 것이 아니라 책임질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노아>는 영화 내내 보여주고 있다." 글쎄요!?

굳이 영화 <노아>(2014)로부터 어떤 진지한 의미를 억지로 끄집어내자면, 이 영화는 아직도 'anti-nomian vs. neo-nomian'의 혼돈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김기대 목사님 역시 영화 <노아>로부터 "좋은(선한) 사람" 대 "책임질 사람"이라는 대립적 구도를 발견하셨듯이 말입니다.

물론, 영화 <노아>는 매우 "지루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한 영화라는 점엔 동의합니다. 영화관에서 보기엔 돈이 너무 아까울 뿐입니다. 그냥 DVD로 렌트를 하거나 Netflix 따위에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저렴하게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