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서신 예수님과 나서는 교회
물러서신 예수님과 나서는 교회
  • 정병선
  • 승인 2007.09.21 12: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교회의 행적…막 7장 24~25, 36절

▲ 나는 예수님이 말씀 한 마디로 출렁이던 바다를 잔잔케 한 것이나,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자를 고친 것에서보다 표적 행하기를 거절하고 자기를 숨기시는 모습 속에서 그분의 진정한 위대함을 본다. (사진 제공 코넷)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두 가지 매우 인상적인 장면, 그러나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반복되어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군중을 피한 예수님

첫째로 예수님은 군중들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고 이적과 권능을 행하다가도 종종 군중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몸을 피하셨다는 점이다.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은 내내 그렇게 행동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적과 권능의 소식을 듣고 예수께로 몰려들었다. 갈릴리는 말할 것도 없고,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리가 자기에게 밀려드는 혼잡을 피하시려고 제자들에게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했다(막3:7~9). 온갖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한 가닥 희망을 찾아 달려왔는데 예수님은 슬그머니 발을 뺀 것이다.

제자들이 처음으로 복음전파의 책임을 맡고 둘씩 짝을 지어 전도 여행하다가 돌아와 보고할 때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쉼이 필요하다며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게 했다(막6:30-31). 이방 지역인 두로에서도 예수님은 아무도 모르기를 바라며 어느 집에 들어간 적이 있다. 결국 소문을 막아내지 못했지만 홀로 조용히 머물고 싶어 하셨던 것은 분명하다(막7:24).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예수님

둘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말라고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이나 병 고침을 받은 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귀신에게도 예수님을 들어내지 말라고 금하셨다(막3:12).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신 다음에도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금하셨고(막7:36), 뱃세다의 눈먼 사람을 고친 다음에도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말씀했다.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그런데 고대 사본들 중에는 ‘마을 안에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말아라’가 첨가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 그 말이 그 말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 때도 엄중히 경고하지 않았던가.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막8:30).
 
나는 이런 장면을 대할 때마다 세상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이 왜 이렇게 행동하시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고 구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지 어떻게 사람을 피해 물러날 수가 있으며, 자기가 누구인지를 숨기라고 할 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예수님은 사람을 찾아 회당에도 가시고, 호숫가도 걸으시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기도 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사역에만 몰두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사역 틈틈이 절대 고독의 시간을 가졌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혼자만의 절대 고독의 시간을 가졌다.

왜일까? 왜 예수님은 3년도 채 안 되는 그 짧은 사역의 시간을 온전히 사역에만 쏟아 붓지 않았을까? 병마에 고통당하는 자들과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짊어진 채 신음하는 자들이 줄서 있는데, 저들이 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들어야 할 터인데 도대체 저들을 어찌하려고 혼자만의 절대 고독을 찾아 피한단 말인가? 자기의 메시아 되심을 알려야 사람들이 자기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을 터인데 어쩌자고 자기를 알리지 말라고 금하신단 말인가?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복음서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이 그렇게 행동하신 배경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이 없다. 단지 성경 전체의 맥락에 비추어 유추해볼 따름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행동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만한 이유가 뭘까? 한 번 생각의 나래를 펴고 그만한 이유를 추적해보자.

▲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사진 제공 뒤레판화집)
사역이 아닌 죽음의 길

첫째, 예수님이 그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방식이 사역의 방식이 아닌 죽음의 방식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이 일일이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좆아내고, 필요한 이적을 베푸는 것으로 구원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수님은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된다. 영원히 슈퍼맨이 되어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원해내야 한다. 이 길은 적어도 예수님이 가야 할 길은 아니다. 그건 효과적이지도 않거니와 가능하지도 않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 세상을 구원하는 길은 사역의 길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죽는 길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예수님도 죽음을 통해서만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진실을. 그러니 구원의 참 진실을 아는 자로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사역에 온 정신을 쏟는 것보다는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사역을 활발하게 하는 것이 예수의 영역을 넓히는 데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역을 활발하게 하면 할수록 예수의 영향력과 힘의 영역은 그만큼 확장될 것이 분명하다. 이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상식이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그걸 모를 리 없다.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예수님이 자기 영역을 넓히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분명히 사역에 올인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과 권능을 맘껏 과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다. 능력과 권능의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 예수님은 오직 세상을 구원하는 참 길을 가기 원했지 그걸 빌미삼아 자기 영역을 넓힐 생각은 없었다. 예수님은 사역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보지 않았다. 죽음을 준비하는 고독 속에서 구원의 길을 보았다.

하여, 그분은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준비해야 했다. 때로는 사역마저 뒤로 한 채 죽음을 준비해야 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에게 충실한 길임을 알았기에 예수님은 사역으로 당신의 능력을 입증해보이라는 사단의 유혹을 물리쳐야 했고, 사람들의 필요까지도 뿌리쳐야 했던 것이리라. 

하나님을 신뢰한 예수님

둘째,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경거망동하지 않으신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의 그리스어 형태인데, 예수님은 그 이름을 통해서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이름이 우리나라의 ‘철수’처럼 흔한 이름이었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의 자기 인식이 특별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에 달려 있는 문제임을 인정하고 맡길 줄 아는 신뢰가 있었다. 세상의 구원이 자기의 순종 여부에 달려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다. 바로 이런 신뢰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온 세상을 책임지겠다며 설레지 않을 수 있게 한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이 초조해하고 급히 서두르는 것은 뭔가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내일이 불안하기 때문에 더 바삐 움직이는 것이고 뭔가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다. 만일 내일을 신뢰한다면 오늘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쫒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아도 그렇다. 예수님의 행적 어디를 보아도 초조해하거나 서두르는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돌보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발걸음을 재촉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쫒기는 기색을 하거나 급하게 서두른 흔적은 없다.

언제나 넉넉한 편안함이 있었고, 죄인들과 함께 먹기를 탐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헤롯의 정치권력과 산헤드린의회의 종교권력이 자기를 향해 옥죄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전혀 두려워하거나 보호막을 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었으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결국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강한 신뢰, 넉넉히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면서도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덤비지 않을 수 있었고, 정치와 종교권력 앞에 무릎 꿇거나 타협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평강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갈 수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사역에 대해 적극적이면서도 동시에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었다.

▲ 군중들에게 설교하시는 예수님. (사진 제공 뒤레판화집)
존재의 풍성함을 지킨 예수님

셋째, 예수님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신 것은, 사역의 중요성 못지않게 존재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온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로 이 세상에 왔다지만 사역으로만 점철된 삶은 결코 온전한 삶일 수 없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밥을 먹어야 하듯 삶의 보편적인 법칙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도 존재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관계 만으로나 고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 존재가 회복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관계적 삶을 사는 것과 함께 관계로부터 단절하는 고독의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는 일반적인 삶의 법칙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하여, 예수님은 기꺼이 일반적인 삶의 법칙에 순응하셨다. 자기 존재에 충실하기 위해 관계를 단절하는 힘겨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아는 대로 절대 고독의 시간은 정직하게 자신을 대면하는 시간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는 시간이다. 존재의 시간이요, 삶의 원초적 진실을 캐묻는 시간이다. 영혼의 때를 씻는 시간이다. 삶 속에서 생긴 생채기를 치료하고 묻은 때를 빨래하여 햇볕에 말리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 적극적으로 그런 시간을 찾아 나섰다.

이걸 보면 그분이 삶과 존재에 대해 얼마나 정직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또 사역만이 삶은 아니며 만남만이 만남은 아니라는 것, 쉼도 역시 삶이요 홀로 있음도 또 다른 만남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은 진실로 충성과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사역으로만 내몰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이라며 사역에만 집중하는 것을 정당화하지도 않았다.

교회의 과도한 선교 열정과 예수님의 선교

우리의 형편은 어떤가? 존재의 시간이란 현대인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이다. 우리는 성공과 돈을 위해 존재의 시간을 잊은 지 오래다. 대다수 그리스도인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기도 시간조차도 존재의 시간이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 기도조차 뭔가를 얻어내겠다는, 내 꿈을 성취해보겠다는 강한 성취의 몸부림인 경우가 많으니까.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고독의 시간조차도 기도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않으면 왠지 불편해한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그 잣대를 들이밀지 않을 지라도 다른 사역자들에게는 사역에의 절대 헌신과 절대 충성을 요구하고 있다. 쉼이 빼놓을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는데 인색하다. 존재는 무시하고 지나치게 사역과 성취에만 치우쳐 있다. 한국 사회가 지나친 일중독 사회요 지나치게 성공을 추구하는 사회여서 정작 존재와 삶에 충실하기가 힘든 것처럼 한국 교회 역시 지나친 사역중독에 신음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해외 선교도 지나치게 개교회의 업적 중심에 매달리다 보니 하나님의 의지보다 앞서가는 형국이며, 한국교회가 전 세계의 영혼을 책임지기라고 해야 할 것처럼 강하게 밀어붙이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예수님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을 깊이 살피고 음미해야 한다. 특별히 세계 구원을 위해 급히 칼을 빼들지 않았던 예수님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교회 역사를 일별해 보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교회의 의지가 앞서갈 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가를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의지보다 교회의 의지가 앞서갈 때 거의 언제나 선교의 이름으로 상대방의 문화를 짓밟는 일이 있었다. 하나님과 정의의 이름으로 지배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추악함이 있었다. 가장 무자비하고 잔인한 전쟁은 거의 언제나 종교 전쟁이었다는 것도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요즘 기독교근본주의가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부시를 비롯한 미국의 기독교근본주의자들 때문에 미국의 패권이 지나치게 폭력성을 띠고 있으며, 그 반대편에는 회교근본주의자들이 테러를 자행하며 미국의 패권에 항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근본주의와 회교근본주의가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옳다. 파괴적 근본주의는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다.

그런데 신앙적 순수함과 열심이 폭력적인 근본주의로 치닫기란 매우 쉽다. 사울을 보라. 그는 자기가 믿는 하나님과 율법에 대해 매우 충성스러웠던 사람이다. 누구보다 순수하게 말씀을 순종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예수를 믿는 동족들에게 어떻게 했는가?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죽음을 보고 마땅히 여겼으며(행8:1), 교회를 없애려고 집집마다 수색하여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감옥에 넘겼다(행8:3). 이처럼 순순한 신앙이 파괴적인 폭력성으로 바뀌는 것은 순간이다. 이 둘의 차이는 어쩌면 백짓장 한 장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바로 이 대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 신앙적 열심과 신앙적 도발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열심과 바리새인의 열심, 예수님의 충성과 바리새인의 충성을 비교해보라. 예수님의 열심은 아버지를 신뢰하는데서 나오는 열심이라서 여유를 잃지 않았던 반면, 바리새인의 열심은 백성들을 율법의 오랏줄로 꽁꽁 묶는 열심이었다. 예수님의 충성은 존재와 사역의 균형을 잃지 않는 충성이었던 반면, 바리새인의 충성은 존재의 풍성함과 진정성을 파괴하는 충성이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겉모습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본질은 전혀 달랐다. 무엇이든 그렇다.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내용도 같은 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충정이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것만도, 다 좋은 것만도 아니다. 때로는 그 열정과 충정이 세상을 해치는 폭력이 되기도 하고, 삶을 파괴하는 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역사가 그걸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역사의 증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도 사울처럼 될 수 있으며, 바리새인과 같은 수렁에 빠질 수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역사의 증언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그래서 자칫 신앙적 열정이 공격적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를 앞지르지 않도록,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의 열심을 앞지르지 않도록 깊이 살펴야 한다. 그리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몸에 익혀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을 쉽게 악으로 규정하는 자세를 버리고 차이를 존중하는 겸손을 배워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아니겠는가.

예수의 진면목

나는 예수님이 말씀 한 마디로 출렁이던 바다를 잔잔케 한 것이나,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자를 고친 것에서보다 표적 행하기를 거절하고 자기를 숨기시는 모습 속에서 그분의 진정한 위대함을 본다. 온 세상을 구원하겠다며 날뛰는 예수님이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에 의해서만 사역할 뿐 그 이상으로 날뛰지 않은 예수님에게서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는 진정성을 발견한다.

힘으로 원수를 짓밟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에게 짓밟혀 무력하게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진한 감동을 느끼고, 그 위대함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을 피해 고독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시는 모습, 자신을 들어내지 못하게 사람들의 입을 막으시는 그 모습 속에서 예수의 진면목을 발견한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예수상도 능력의 예수가 아니라 무기력한 예수, 세계의 영혼을 짊어진 예수가 아니라 세계의 영혼을 품은 예수, 그러면서도 자기 존재에 충실한 예수가 아닐까. 

정병선 목사 / <어느 목회자의 고백>·<신앙의 마스터클래스> 저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