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인들의 자격을 제한한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인들의 자격을 제한한다!”
  • 강만원
  • 승인 2014.07.13 22:42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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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 강만원 ⓒ <News M>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와 그의 추종세력들이 하고있는 행동을 보노라면, 하나같이 유치하고, 사악하고, 가증스럽다는 생각에 그저 쓴웃음이 맴돈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인들의 자격을 제한한다”는 반성경적인 정관에 대해서 뜻밖에(?) 주변의 날선 비판이 일자 오정현 목사와 추종자들은“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인... ”이라는 문제 조항을 “헌금을 내지 않는 교인...”으로 슬그머니 단어를 바꾼 모양이다.

속이 너무 뻔히 들여다보이는 치졸한 꼼수다. 단어만 하나 바꿨을 뿐 결국 똑같은 의도에, 똑같은 의미가 아닌가. ‘과부의 가산을 탕진하며..,돈을 지극히 사랑하는’ 한국교회에서 십일조는 원래 헌금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던가? 물론, 교회가 구제와 선교에 앞장서며 주의 계명을 성실히 수행하려면 부득불 헌금은 교인들의 중요한 의무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오정현 목사가 한국교회의 영적 어른으로서 기독교인들의 신실한 종교 의무를 강조하기 위해 그런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글쎄, 누구보다 처세술에 능한 그가 지금처럼 미묘한 시기에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정관의 조문 형식을 따지기 전에 오정현 목사가 느닷없이 새로운 정관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교인의 자격 제한’은 오정현 목사를 반대하는 사랑의 교회 갱신위 교인들을 겨냥한 조준사격이다. 그리고, ‘교인의 자격을 제한한다’는 말은 결국 공동의회나 제직회, 또는 당회에서 ‘갱신위’ 회원들에게 발언권이나 투표권을 주지 않겠다는 명시적 선언이며, 비판적인 교인들의 의견을 원천봉쇄하겠다는 속셈이 아닌가?

사랑의 교회 갱신위 교인들로서는 당연히 치리 대상인 오정현 목사의 ‘서초센터’에 헌금하지 않고, 갱신위에서 예배를 주도하는 사랑의 교회 강남예배당에 자발적으로 헌금하기 때문에 결국 오정현 목사가 주장하는 “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인들...”의 범주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오목과 사랑의 교회의 반성경적 일탈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십일조’를 교인의 자격조건으로 제시하는 오정현 목사의 오류와 심각한 무지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언급한다.

“십일조는 성경에 엄연히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에 유대인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기독교인(그리스도인)에게도 명백한 계명이다”라는 전통적인 주장과 더불어,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시된 특정한 율법일 뿐, 구약 시대의 성전과 희생제사가 사라지고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합당한 계명이 아니다”라는 개혁적인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이른바 ‘십일조 논쟁’이 좀처럼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십일조의 신학적 부재와 실천적 존속’이라는 애매한 타협안까지 나왔지만, 내가 보기에‘십일조 논쟁’은 무의미한 말장난의 연속일 뿐이다. 서로 다른 신학적인 기준이나 종교적인 잣대를 제시하면서 십일조를 다루면 교파의 관점이나 주관적 판단에 따라서 논쟁이 그칠 수 없겠지만, 성경적인 기준에 따르면 답은 매우 간단하다.

즉, 구약의 십일조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율법이지만, 신약시대의 십일조는 구약의 허튼 확대 해석이나 적용, 그리고 신약성경의 그릇된 해석에 따른 중대한 오류이기 때문이다.

“신약시대 기독교인들에게도 십일조는 엄연한 성경적 계명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마태복음 23장 23절과 누가복음 11장 42절의 문장을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두 구절은 십일조에 관해서 서로 다른 문장이 아니라, 주께서 같은 청자에게 같은 장소에서 말씀하신,같은 내용의 다른 기록일 뿐이다). 히브리서를 비롯한 신약의 다른 책들에 언급된 내용은 구약의 인용일 뿐, 십일조를 명령하는 구절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쟁점이 되지 않는다.

“화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11:42)

본문이 과연 ‘기독교인들의 십일조’를 지지하는 성경적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한 결정적인 단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는 구절의 정확한 해석에 달려있다. 만약에 주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율법 시대의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십일조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면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는 준엄한 종교적 의무일 수 밖에 없다.

‘말씀’이 엄연히 살아있다면, 시대가 바뀌었다고 의미 자체를 함부러 삭제하거나 변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을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하는 전통적인 주장들은 화자이신 예수와 청자인 무리의 담론(dialogue)구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무지이며, 명명백백한 ‘해석의 오류’일 뿐이다!

본문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시한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는 주의 말씀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계명이 되기 위해서는 이 문장은 반드시 두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우선, 주의 말씀을 듣는 당시의 청자가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기본적인 전제가 필요하다. (물론,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이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청자는 ‘미래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이나 예수를 따르던 무리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동시에, 신약 시대의 십일조가 있다면 그것은 초대 교회와 더불어 ‘앞으로’ 등장할 그리스도인들을 상정하기 때문에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는 담론의 시제(time)는 반드시 현재명령형이나 미래명령형이 돼야 한다.

그러나 본문은 예수의 제자들, 또는 ‘미래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에게 전하는 ‘명령문’이 아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조롱하고 박해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화있을진저!’라며 준엄하게 질책하신 문장들 가운데 포함된 구절이다.

다시말해, 본문의 청자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고 주께서 명령하신 십일조는 당연히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계명이 될 수 없다.

본문을 분석하면서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문법적인 지표가 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에서 원문의 동사시제가 한글 성경처럼 실제로 ‘미래 명령형’이었다면 본문은 유대인들을 질책하신 말씀일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무리 가운데 포함된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하는 문장일 수 있다. 그러나 원문의 동사시제는 한글성경에서 보는 것처럼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미래형’이 아니라, 율법주의 유대인들에게 해당하는 ‘과거완료 명령형’이다.

헬라어 원문의 시제에 대해서는 법(mode)과 시제(time)에 대해서 논란이 없지 않지만, 전후 문맥을 살펴보고 담론구조를 따져보면 원문의 시제는 분명히 ‘과거형’일 수 밖에 없다. 다시말해, 율법의 조문으로서 십일조는 애써 지키면서 정작 야훼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저버리는 자들, 곧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날선 비판이 텍스트에 담긴 화자의 정확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화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로 계속 이어지는 전후 문맥에서 보듯이, 담론(dialogue)의 청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유대 바리새인으로 한정되었다. 한역본 성경을 제외하고, 영역본과 불역본을 비롯한 성경의 중요한 역본에서 예외없이 본문의 시제를 ‘과거 완료 명령형’(... should have practiced...)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You should have practiced the latter without the former undone.” (NIV, Luke11:42)

원문의 정확한 동사시제에 따라서, 그리고 담론의 소통구조에 준해서 화자와 청자의 존재를 명시하면서 텍스트를 의미론적으로 다시 번역하면, 한글 성경처럼 주어가 생략되고 시제가 뒤틀린 문장으로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가 아니라, “화있을진저, 너희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여! 너희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바르게 지켰다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했었다!”가 돼야 한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는 불완전한 문장에서 벗어나서 완전한 형식에서 다시 문장을 살펴볼 때 의미가 전혀 다르지 않는가? 이처럼,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불완전하고 왜곡된 문장에 머물지 말고, 담론 구조에 준해서 말씀을 듣는 청자의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면서 다음과 같이 문장의 의미를 재구성해야 한다.

“화있을진저, 너희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면 너희 바리새인들은 물질로 바치는 십일조의 율법을 지키는 동시에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도 결코 저버리지 말아야 했었다!”

나중에 ‘성경해석의 오류 100선’(가제)에서 한 장(chapter)을 할당해서 십일조의 의미와 정신, 합리적인 계승에 이르기까지 보다 자세히, 그리고 분명히 밝힐 생각이기 때문에 우선은 간단하게 결론을 맺는다.

신약시대에 ‘십일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핵심적인 율법으로 존재했던 십일조는 더 이상 유대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제사장뿐만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가난한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기 위한 종교 제도로서 분명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시대가 바뀌었다고 무턱대고 폐지를 주장할 수는 없다.

‘욕조의 더러운 물을 버린다고 서두르다가 자칫 욕조에 있는 아기까지 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처럼’ 새로운 시대에 맞춰서 내용과 형식을 정비하되, 무엇보다 십일조 정신을 바르게 계승해서 본래의 소중한 가치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십일조에 관한 성경의 본뜻도 모른 채 목사와 추종자들의 어설픈 독단에 따라서 십일조를 느닷없이 교인의 자격조건으로 제시하는 사랑의 교회와, 오늘날 한국의 이른바 ‘대형교회’라는 타락한 종교집단에서 십일조의 구제 정신이 과연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가... ?

십일조의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송두리째 잃은 채 담목의 주머니와 교회의 곳간을 채우고, 하나님의 성전이라며 화려한 건물에 매달리고, 전도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온갖 이벤트에 돈을 퍼붓기 위해서 교인들에게 쥐어 짜듯이 십일조를 강요하는 짓은 분명한 영적 죄악이다.

심지어 “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인의 자격을 제한한다”는 서슬퍼런 위협은 반성경적인 일탈이며, 교회의 곳간과 목사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 십일조를 거두는 행위는 주께서 분노의 채찍을 들었던 ‘성전의 장사치’와 전혀 다를 바 없다. 

“돈을 사랑하여 과부의 가산을 탕진하는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한 치의 차이조차 느낄 수 없는 오늘날 한국교회 종교권력자들의 거짓과 교만은 요컨대,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고 가난한 자를 위해서 가난한 자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신앙에 맞서는 철저한 배역이다.

강만원 /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자. 작가.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의 저자이며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 단순한 열정,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신이 된 예수, 루나의 예언, 자연법의 신학적 의미, 예수의 역사와 신성 외 다수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아르케 처치'에서 성경강의 및 번역, 출판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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냠냠이 2015-04-11 03:34:33
되게.이상한 사람 많네요. 십일조는 역사적으로 성경적으로 신약시대의 제도가 아님을 이미 전세계가 증거하고 있는데 한국만 아니지요.

당신들이 얼마나 마음이 외식하고 화인 맞은 사람인지나 아십니까

정말 대단하네요. 어떻게 당신들 같은 위선자들이 이렇게 많다니...

성경은 자기의 양심이 깨끗함의 정도에 따라 달라보입니다.
당신들에게는 돈을 내는 종교적 의무가 퍽이나 중요하겠죠.

의와 인과 신은 내다 버린채 말입니다.

피조물 2014-07-18 04:02:22
이 글은 십일조 자체의 신학적 의미보다는 십일조를 빌미로 교인들의 정당한 권리를 제한하려는 오정현의 사악한 의도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글입니다. 댓글다신 몇 분은 현재 오정현이가 하는 짓이 옳다고 보시는 건가요?

청년 2014-07-18 01:56:58
강만원님.
그냥 십일조 하지 마세요.
안하셔도 됩니다. 자기 생각이 말씀인양 글을 써대시면 안되요.
그냥 하지마세요.
아 예수님은 믿으시죠....

바른 말 2014-07-16 07:42:22
저는 십일조를 당연시하는, 앞으로도 여전히 드릴 목사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서 왜 삽일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는가? ... 에 대해서 조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jimmy 2014-07-15 21:16:01
뉴조에는 강만원 밖에 없나?
아니면 뉴조의 생각이 이런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