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왜 인종주의 군사국가가 되었나
이스라엘은 왜 인종주의 군사국가가 되었나
  • 이인엽
  • 승인 2014.07.1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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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일방적 이스라엘 지지가 하나님의 뜻?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으로 국제 사회의 시선이 가자 지구에 쏠려 있고,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거세어 지고 있습니다. 이글은 이인엽 박사가 지난 2013년 3월과 4월 복음과 상황에 기고한 것을 함께 엮어 필자와 복음과 상황의 허락하에 이 곳에 올립니다. - 편집자 주>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고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을 보며, 엄청난 핍박을 당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을 응원했었다. 그런데 국제정치를 공부하고 팔레스타인 현실을 보면서,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고 느꼈다. 유대인의 독립은 기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에 천 년 이상 살던 아랍인이 집과 고향을 잃었고, 가자와 서안에서는 이스라엘의 가혹한 점령 정책이 지속되고 있다. 최근 가자 사태에서 보듯, 하마스(아랍저항운동단체)의 테러로 인한 이스라엘 인명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게 많은 아랍인이 이스라엘군에 살해됐다.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 경험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 가까운 이스라엘은 21세기에 찾아보기 힘든 인종주의적 점령 국가, 군사 국가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인종주의 군사 국가가 되었을까? 이는 건국 과정에 그 실마리가 있다.

로마제국에 의해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의 역사는 고난과 핍박의 연속이었다. 반유대주의는 홀로코스트 이전에도 수 세기 동안 존재했다. 예수를 살해한 자들로 기억되고 개종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의심과 핍박을 당해 온 것이다. 십자군 전쟁 때도 학살됐고, 기독교 개종을 거부해 처형‧추방됐으며(유대인 추방령), 전염병이 돌면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거나 어린이들을 잡아다 피를 마신다는 소문도 돌았다(14세기 유럽의 흑사병 대참사 당시 그 책임을 유대인에 전가함). 중세에, 죄악시됐던 금융업에 많이 종사한 유대인들은 《베니스의 상인》에서처럼 탐욕스런 존재로 묘사됐고 유대 금융 세력이 역사의 배후에서 전쟁을 부추겨 돈을 번다는 주장도 있었다.

1차 대전과 대공황 이후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고조되었다. 1894년 프랑스에서 유대계 장교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린 ‘드레퓌스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를 취재한 유대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 국가 수립만이 해결책이라 주장, 유대 민족주의 운동인 시오니스트의 선구자가 된다. 그의 주도로 스위스 바젤에서 1897년 열린 제1차 시온주의총회에서 “조국 시온의 언덕으로 돌아가 새로운 국가를 세우자”는 선언을 채택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정점에 달한 홀로코스트에서 600만 인종 청소를 당한 유대인들은 극도의 피해의식과 트라우마가 생겼고 ‘종족 말살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안보에 대한 강한 집착’이라는 정신적 DNA가 형성됐다.

이는 현재 이스라엘의 억압적 팔레스타인 정책을 설명해 준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이 독립과 안보를 추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건국 당시 팔레스타인의 6.6퍼센트(아랍 87.5퍼센트)를 소유했던 이스라엘이 수차례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해 78퍼센트를 차지했다. 이에 더해 1967년 경계이자 남은 22퍼센트 영토인 가자와 서안까지 점령하면서 그 안에까지 불법적으로 정착촌을 만들고 있는 것은 “나의 ‘안전’이 너의 ‘기본권’보다 더 중요하다”며 안보를 위해 어떤 수단도 마다 않겠다는 태도로 보인다. 팔레스타인에서 평화활동가로 일했던 한 친구가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핍박받은 경험에 따라 아랍인들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고 말할 정도다. 나치에게서 차별과 인종 청소를 당한 유대인들이, 그들도 역시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인 시오니즘을 형성해 자기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약자인 아랍인들을 무자비하게 다루고 있다는 설명이다.

시오니즘과 이스라엘 건국과정

랄프 쇤만의 《잔인한 이스라엘》에 초기 시오니스트들의 생각이 잘 나타난다. 시오니즘의 대부로 불리는 테오도르 헤르츨은 1904년 향후 유대 국가의 모습을 ‘아시아에 대한 방어벽’ ‘야만성으로부터 문명을 지키는 전방요새’로 묘사해 인종주의를 드러냈으며 팔레스타인을 넘어 나일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의 영토(레바논과 요르단 전체, 시리아 3분의 2, 이라크 절반, 투르크 메니스탄 일부, 쿠웨이트 절반, 사우디 3분의 1, 이집트의 포트사이드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카이로를 포함한 시나이반도 등 이집트 3분의 1)를 시오니즘의 목표로 제시했다. 랍비 피쉬만도 유엔이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정할 때인 1947년 동일한 주장을 했다(97쪽). 블라디미르 야보틴스키는 1923년, 시오니즘의 교과서인 ‘강철벽(The Iron Wall)’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아랍 민족 사이에는 현재나 가까운 미래에 자발적인 화해를 위한 어떤 토론도 있을 수 없다.…우리는 팔레스타인을 아랍민족의 국가에서 유태인이 다수로서 지배하는 국가로 바꾸려고 하기 때문이다.…원주민의 동의를 얻어 한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사례를 단 하나라도 찾을 수 있는가?…식민지화는 팔레스타인 아랍 민중의 의지에 반해 진행되어 왔고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모든 식민지화 과정은, 그것이 아무리 제한된 형태라 하더라도, 원주민들의 도전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식민지화는 강철벽을 포함한 무력의 호위 속에서 진행되고 발전될 수밖에 없다. 강철벽은 원주민들이 결코 돌파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대아랍정책이다.(32쪽)”

야보틴스키의 ‘강철’이라는 표현은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상이라는 점도 중요한데, 시오니스트 역시 인종주의자들인 남아공의 식민주의자들과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협력 사업도 진행했다(30쪽).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홀로코스트 당시 시오니스트들이 적극적 유대인 구출 노력에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시오니즘 대변자였던 랍비 스테픈 와이즈는 1943년, 팔레스타인의 식민지화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 유대인구조법안에 반대 증언을 했다.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헤임 바이즈만은 “당신은 6백만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데려갈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니라는 뜻을 밝히며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젊고 유능한 인물들을 구출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부다페스트 유대인구조위원회의 루돌프 카스트너 박사는 1944년, 나치 아돌프 아이히만과 맺은 비밀협약에서 600명의 저명한 유대인을 살리는 대신 80만 유대인 학살에는 침묵했다. 이런 점에서 시오니스트들은 동족 구출보다 시오니즘에 따른 유대 국가 건설에만 집중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테러를 적극 활용한 시오니스트

과거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나 현재 하마스를 테러단체로 비난하고 평화 협상을 거부한 시오니스트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 테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스라엘 6대 총리 메나헴 베긴은 시오니즘 테러 조직 ‘이르군’을 이끌던 중 영국 총독부가 1939년부터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제한하자, 1946년 총독부와 헌병사령부가 있던 예루살렘의 다윗왕 호텔을 폭파했다. 이 테러로 91명이 사망했다. 1940년까지 ‘이르군’에 참여한 이츠하크 샤미르는 1943년 ‘레히’라는 조직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당시 유엔의 중재자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개입하던 스웨덴 외교관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이 극우 시오니스트들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자, 그는 유엔 차량을 공격해 암살하는 등 여러 테러 사건에 관여했다. 샤미르는 후에 모사드(이스라엘 정보기관)에 들어갔다가 1983~84년과, 86~92년까지 7대 총리를 지냈다. 이렇듯 극우 시오니스트는 자신들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동족 테러와 암살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과거를 생각할 때, 이스라엘 건국 초기보다 더 극심한 점령과 식민 통치하에 있는 아랍인들의 저항 폭력을 유대인들이 단순한 테러로 비난하며 협상을 거부하는 것은 모순이다.

▲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선언 장면.(사진: 위키미디어코먼스) 현대 시오니즘의 아버지 테오도르 헤르츨 초상화 아래 서 있는 이가 벤구리온 이스라엘 초대 총리.

1947년 유엔의 분할 안이 공포되자 ‘이르군’과 ‘하가나’ 같은 시오니스트 민병대들은 아랍인과의 공존을 말하는 일부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영국의 암묵적 지지 하에 팔레스타인 아랍인 추방을 위해 조직적 테러를 시작했다. 특히 1948년 3월부터는 ‘D계획(공식 명칭 여호수아 계획)’이라는 학살과 추방 작전을 시작했는데, 그 해 4월 9일 데이르야신(디야신)에서 254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로 인해 75만 명 아랍인들은 ‘이르군’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떨며 팔레스타인을 떠나 피난민이 됐다.

그 배후에 있던 초대 총리 데이비드 벤구리온은 1936년에 쓴 편지에서 “분할된 유대 국가는 마지막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과 주변 국가에 우리가 정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1938년에는 “나는 (아랍인들의) 강제 이송을 지지한다. 그것은 전혀 부도덕하다고 보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 책임자였던 요세프 바이츠는 1940년, “우리는 두 민족이 이 나라에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 작은 나라에 아랍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아랍 주민들을 모두 이웃 국가들로 이주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마을 하나, 부족 하나도 남겨두어서는 안된다”고 했다(48쪽).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나자 시오니스트들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국가를 선포하는데, 이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는 대재앙의 날이다. 미국은 다음날 즉시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이후 팔레스타인은 10월 1일 열린 1차 팔레스타인 민족회의에서 국가를 선포했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강철벽’ 정책의 구체화

이스라엘의 대아랍 무력(武力) 정책을 담은 야보틴스키의 ‘강철벽(The Iron Wall)’ 사상은 건국 이후 구체적인 정책으로 이어진다. 국방 장관이었던 이츠하크 라빈은 1967년 전쟁 작전을 ‘철의 의지’로 명명했고, 1975~76년에는 서안에 ‘철의 손’ 정책을 추진, 30만 이상이 투옥되었고 제도화된 고문에 시달렸다. 그의 후임 라파엘 에이탄은 서안에 ‘철의 팔’ 정책을 시행하며 억압 수단에 암살을 추가했다.

1987-88년 팔레스타인 민중봉기 당시 다시 국방장관이 된 라빈은 ‘철의 주먹’ 정책으로 철저한 억압과 집단적 처벌 정책을 추진한다. 1982년 레바논 침공에서 난민촌을 쓸어버리는 작전은 ‘철의 뇌’로 명명된다(쇤만, 《잔인한 이스라엘》, 36쪽). 1954-55년에는 이스라엘 2대 총리를, 1948-56년에는 유대인정치국 책임자와 외무장관을 지낸 모세 샤레트는 일기에서, 이스라엘의 군사적 도발을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세계 구석구석으로 분산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아랍 세계를 분할하고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분쇄하며 이스라엘의 지역적 패권아래 괴뢰 정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밝혔다(쇤만, 48쪽).

1984년 이스라엘 노동당은 일간지에 네 가지 ‘아니오’에 초점을 맞춘 광고를 실었다. 그 내용은 이와 같다.

1. 팔레스타인 국가는 인정할 수 없다.

2.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는 어떤 협상도 없다.

3. 1967년 국경으로 돌아갈 수 없다.

4. 어떤 정착지도 포기할 수 없다.

노동당 출신인 헤임 헤르조그 대통령은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신성한 영토였던 이 땅을 결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1985년 밝혔다(쇤만, 180쪽).

배제와 차별이 구조화된 사회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박노자 교수는 '유대인, 유대인을 말살하다'라는 글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학살과 추방을 시행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 사회 내부에서도 ‘단일성’의 신화를 바탕으로 억압, 배제, 차별의 구조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독일에 주로 거주했던 아슈케나지 유대인들, 특히 유대인 진보 세력은 독일어를 골간으로 하는 ‘이디시어’를 썼는데, 그 안에 진보적 국제주의와 반전(反戰)의 전통이 살아있었다. 그런데, 권력을 잡은 시오니스트들은 유대교의 사어(死語)인 히브리어를 인위적으로 현대화 해 ‘민족 언어’로 정한 후, 이디시어를 철저히 금지했다. 또 한편, 중상층을 이룬 아슈케나지들과 달리 하층민이 된 동방유대인 ‘세파르디’는 시오니즘에 무관심했으며, 아랍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한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철저한 억압과 차별을 당했다. 심지어 일부 세파르디에게서 아기들을 빼앗아 유럽 출신의 시오니스트에게 입양시키는 ‘2세 동화 작전’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박노자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건국한 극우 시오니스트들은 결국, 유럽 아슈케나지들의 진보적이고 국제주의적이며 반전(反戰)적 전통과, 이슬람권 출신 세파르디의 아랍인들과의 평화 공존의 기억을 부정·말살했다. 동시에 인위적 히브리어와 단일 민족 사상을 주입하고 3년간의 군복무를 거쳐 이스라엘 2세들을 창조해냈다.

이러한 역사는, 이스라엘의 극단적인 팔레스타인 정책이 어떻게 국내에서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군사 문화와 안보 위협 강조는 내부 비판을 잠재웠으며, 테러와 군사 작전이 늘 수행되는 상황은 우파 강경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반대를 어렵게 하는 것이다. 75% 이상 유대인, 20%가 아랍인, 그 외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에 공식적 인종차별은 없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차별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 국가기금이 관리하는 이스라엘 토지의 93%에서 거주와 임대, 농사를 허가 받기 위해서는 어머니 쪽이 최소 3대 이상 유대 혈통임을 증명해야 한다(쇤만, 70쪽). 사막을 개간해 옥토로 만들었다는 키부츠는 대부분 팔레스타인 점령지에 건설되었으나 비유대인은 구성원이 될 수 없었다.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 정착을 위해, 수백 년간 농사를 지어 온 아랍 농민들은 삶의 터전에서 ‘퇴거’당한 것이다.

근본주의 유대교의 영향

이스라엘의 강경 정책 뒤에는 근본주의 유대교와 그 랍비들이 있다. 레바논 전쟁이 발발한 1982년 9월 16일, 레바논의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에서 사흘만에 팔레스타인 난민 3천여 명이 학살당했다. 절반이 부녀자와 어린이였다. 이를 두고 일부 랍비가 “전 세계에서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진정한 정화”라는 취지의 설교를 했다는 충격적인 자료도 있다. 2008년 가자지구 공격 당시 한 이스라엘 장교는 랍비들이 “이 성스러운 땅의 정복을 방해하는 비유대교도들을 몰아내자”고 가르쳤음을 폭로했다.

<LA타임즈>에 따르면 가자 전투에 참전한 한 이스라엘 군인은 “훈련소에서 만난 랍비가 ‘이번 싸움은 빛의 자식들과 어둠의 자식들 간의 대결이요, 특정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주민 전체와 맞서는 전쟁’이라고 설교했다”고 전했다. 결국 팔레스타인측 사망자 1381명 중에 민간인이 900여 명(어린이 400여 명)에 달했던 무차별 공격의 배후에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악마화한 근본주의 랍비들의 설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이스라엘 군인들이 팔레스타인 임산부 그림과 함께 “총 한 방에 두 명 사살”이라는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주문한 것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이에 사회학자 오르나 사손 레비 교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사람’이 아니라서 어떤 짓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랍비 이스라엘 로센은 “팔레스타인인은 남자, 여자, 아이를 불문하고 모두 죽여야 한다. 그들의 가축도 예외가 돼선 안된다”고 극단적인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이러한 유대교 근본주의는 팔레스타인과 평화 공존을 옹호하는 개인이나 단체, 타 종교인을 겨냥한 ‘백색테러’와도 연결된다. 2008년 이스라엘 경찰이 평화운동단체 ‘피스나우(Peace Now)’ 회원들을 살해하는 이에게 100만 세켈(한화 3억 4천만 원)을 주겠다는 포스터를 발견한 것이다. 같은 날 그곳에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과 평화 공존을 촉구해 온 제브 스턴헬 히브리대 교수가 테러범들이 투척한 사제 파이프 폭탄에 부상당했다.

근본주의신학의 오류와 위험성

이스라엘의 건국과 팔레스타인 정책을 주도해 온 우파 시오니스트 생각이 유대교나 구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세속 국가에서 온전히 구현될 수 없듯, 유대교나 구약의 가르침이 현재의 세속 국가 이스라엘로 구현되었다는 주장에도 심각한 오류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국가주의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성경 정신의 왜곡을 낳는다. 언약과 율법의 정의에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을, 유대인들만 편애하고 이방인을 마음대로 짓밟는 신으로 왜곡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비인간적 억압적 정책을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디아스포라를 하나님 뜻으로 여기면서 메시아가 오기 전에 인위적으로 국가를 세우거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옳지 않다고 보는 유대교인 그룹이 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 땅을 돌려주고 점령 정책을 중지하자고 주장함으로써 이스라엘 정부의 핍박을 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헤게모니를 잡은 국가주의적 시오니즘을 유대교나 유대인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기 힘든 것이다. 결국, 시오니즘은 유대교의 한 국가주의적 해석에 불과하며, 시오니즘에 기초해, 유대인들이 세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이자 예언의 성취로 보고, 기독교인은 무조건 이스라엘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입장에도 신학적·정치적 오류가 있는 것이다.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가장 큰 갈등이 일어나는 곳을 이슬람과 그 인접 문명으로 보고 국제분쟁 원인을 간접적으로 이슬람에 돌린 반면, 타리크 알리라는 작가는 ≪근본주의의 충돌≫에서 현재 갈등을 ‘근본주의 간의 충돌’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 근본주의 세력이 있으며, 이들은 겉으로는 갈등하지만 서로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선악 갈등으로 보고 자신을 선, 타자를 악으로 놓는 점, 경전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며 타종교에 관용이 없는 점, 타자의 정복과 박멸을 위한 투쟁을 주장하며 정교 분리를 반대하고 정치에 대한 종교의 지배를 주장하는 점 등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파 시오니즘과 유대교 근본주의는 팔레스타인 강경정책을 낳았고, 앞으로도 평화협상을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평화 협상을 바라지 않는 이스라엘 강경파와, 아랍 강경파가 이익을 같이 한다는 의구심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의 악순환을 지양하고 생명과 평화와 화해를 모색해야 할 기독인의 상당수가, 기독교 근본주의의 입장에서 유대교 근본주의에 기반한 인종주의적 팔레스타인 정책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평화 협상보다는 강경 탄압 정책을 추진하게 만들어, 갈등과 테러를 영속화한다. 이는 장기적으로 이스라엘 안보에 도움이 안 될 뿐더러 중동의 지역 갈등을 확대재생산할 수 있다. 신학적 정치적 관점의 오류가, 기독인들을 어떻게 예수님의 평화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자리에 서게 만드는지 보여 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이인엽, 정치학 박사 / 뉴스 M

미국 조지아 주의  University of Georgia에서 ‘미국의 대북 외교 정책’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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