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감람나무, 돌 감람나무
참 감람나무, 돌 감람나무
  • 김기대
  • 승인 2014.07.22 14:1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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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영화로 만난 사도 바울] 그을린 사랑

이스라엘이 참 감람나무이기는 한 건가?

가자 지구의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 1947년 UN의 결정에 따라 오랫 동안 그 땅을 지키며 살아오던 팔레스타인 사람 90만명은 아무런 죄없이 졸지에 난민이 되어야 했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서구인들의 죄책감이 유대인들을 조상 땅으로 돌려 보냈지만 그 과정에서 애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만 희생 되어야 했고 이는 아우슈비츠 못지 않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서구인들의 죄책감만이 유대인들 귀환 결정의 이유였을까?  죄책감은 드러난 이유일뿐  성가신 유대인들을 그냥 한데 모아 놓고 싶었던, 달리 말하면 히틀러와 비슷한 ’유대인 모아 놓기’에 다름 아니었다. 볼세비키 혁명에 성공했던 레닌에게도,  2차 대전 중에 러시아의 실권자였던  스탈린에게도 유대인들은 동토의 땅에서라도 격리시켜야 할 운명을 가진 민족이었다. 어디 ‘질나쁜 공산당’들만 이런 짓을 했는가?  1215년 4차 라테란 공의회는 ‘예수를 죽인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다른 종류의 옷을 입도록 했고, 15세기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으로 수십만명이 추방되었다.

시온장로 의정서

19세기 파리를 중심으로 돌았던 “시온 장로 의정서”는 유대인이 세계 지배를 획책한다는 내용의 위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식자층들에 폭넓게 읽혔다. 히틀러는 물론이고 자동차왕 헨리 포드도 이 가짜 책을 굳게 믿은 반유대주의자였다.  19세기 후반 합스부르크 제국이 시들어가던 시절 비엔나 시장 칼 뤼거의 반 유대주의는 제국의 위허멸망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철학과 예술을 후원했던 오스트리아가 19세기말을 끝으로 유럽의 중심국가에서 밀려난 것도 반유대주의 때문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감히 돌감람나무 주제에     

그런데 참올리브 나무 가지들 가운데서 얼마를 잘라 내시고서, 그 자리에다 돌올리브 나무인 그대를 접붙여 주셨기 때문에, 그대가 참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양분을 함께 받게 된 것이면, 그대는 본래의 가지들을 향하여 우쭐대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대가 우쭐댈지라도,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가지가 잘려 나간 것은, 그 자리에 내가 접붙임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고 그대는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믿지 않은 탓이고, 그대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로마서 11:16-19)

이스라엘을 참 감람나무에 이방인을 돌감람나무에 비유한 사도 바울의 텍스트다. 본래  접붙이기는 참감람나무 가지를 돌감람나무 가지에 붙이는 것이기에 이 비유는 도시인 바울의 착각이라는 주장에서 부터 본래 돌감람나무 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여 참 감람나무에 생기를 주는 농법도 있다는 즉 사도 바울의 비유가 틀리지 않았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두 주장에 따라 바울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생각했느냐의 차이가 나므로 물론 중요한 비유다. 바울이 이스라엘과 율법을 어떻게 보았냐에 따라 바울신학의 새관점 학파와 전통 학파의 대립이 있는 것을 보면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난 교회사 2000년 동안 돌감람나무들은 접붙이기는 커녕 그들의 뿌리조차 뽑으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 동안 누적된 유대인들의 피해 의식, 사실 동정이 충분히 갈 수 있는 대목이다.

▲ 기독교인인 나왈은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무슬림들이 무차별 학살당하는 장면을 보고 기독교와 결별한다.

몇 해전 스페인 톨레도의 한 미술관에서 스페인이 유대인을 추방할 당시 왕실회의를 그린 그림을 본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화가와 그림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들이 가진 재산 때문에 머뭇머뭇하던 왕실 귀족들을 향해 가톨릭 사제가 혼을 내는 내용이었는데, 그림을 보면서 울컥했다. 수십만이 다시 유랑을 떠나야 하는 당시 그들의 가슴에는 어떤 못이 박혔었을까?

참감람나무의 한에 맺힌 귀환

2차 대전 이후 참감람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귀환한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선언을 하던 초대 총리 벤구리온의 뒤에는 시오니즘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의 초상화가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유대인이 하나의 민족공동체이며 국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는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시오니스트 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이 회의에서 시온 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해 국제법으로 보호받는 고향을 만든다”는 결의를 했다.

이제 그들에게는 나라가 생겼다. 영리한 그들은 2차대전 당시 그들이 당했던 비극을 막지 못했던 서구인들의 죄책감을 적당히 이용했다. 동시에 그들은 어리석게 모여 살지 않았다. 오히려 재력을 갖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본래 살아오던 터전에서 계속 살았다. 죄책감만 이용했지 모아두려고 했던 서구인들의 의도에는 말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가자지구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유대인들을 사지로 몰아 넣었던 역사의 야만을 자책하면서 모두가 동정하는 동안 유대인들 스스로가 야만이 되어 갔다. 기독교적 가치에서 이자 놀이는 안되었기에 중세때부터 그들에게 버리듯이 맡겨 주었던 금융산업은 세계를 지배하고, 시온의정서 사건, 드레퓌스 사건에서 언론의 파워를 경험했던 그들은 언론사를 사들이고,  나치의 계몽 선전부 장관 괴벨스의 역할에  당했던 그들은 영화 산업에 진출한다.

야만성을 그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기에 모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하는 정치적 사건이지만 교회 일부에서는 유대 회복이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라도 하는 듯 착각에 빠져 이스라엘을 지지한다.

오늘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라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수 없다. 근본주의자들은 바빌론을 이라크로 보고 네오콘과 함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 했지만 오늘 성서의 바빌론을 지리상의 이라크로 해석하는 목회자나 신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간혹 있다고는 들었다). 그런데 성서의 이스라엘은 은유로도 알레고리로도 상징으로도 해석으로도 대치가 안된다. 그냥 이스라엘이고 유대인이고 율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방인이다.

여기서 바울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았냐는 신학적 논쟁은 잠시 제쳐 두고 오늘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에서 이미 기득권자가 되어버린 기독교인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을까? 졸부가 되어서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처럼 예수와 바울이 아끼고 사랑했던 낮은 자 소외된 자로서의 이미지를 가진 이방인(돌감람나무)들이 어느샌가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렵게 얻은 거드름의 위세를 잃을까 두려워 힘을 가진 보수 권력에 기생한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다 가져야 하는 참 감람나무로 착각하면서 돌감람나무 따위의 인간들에 대한 경멸에 동참하고 있다.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감독, 2010년)

나왈(루브나 아자발 분)은 세상을 떠나며 쌍둥이 아들 시몬(막심 고데트 분)과 딸 잔느(멜리사 데소르모-풀랭 분)에게  “관에 넣치 말고 세상과 등지게 시신을 엎어 놔 달라”는 유언장을 남긴다. 유언장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자신들의 생부와 형을 찾으라는 내용도 포함되었는데 딸인 잔느가 먼저 어머니의 고향으로 떠나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한다. 처음에 시큰둥하던 시몬도 결국은 나중에 합류한다.

나왈은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의 갈등이 깊은 레바논으로 추정되는 나라 출신이다. 기독교인 나왈은  무슬림 남자 친구와 사랑에 빠졌다가 남자 친구가 이교도란 이유로 동네 청년들에게 살해 당한다. 그녀 역시 ‘명예살인’을 당할 뻔 했으나 어머니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가족을 수치스럽게 했다고 해서 가족들이 죽이는 명예 살인은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과격한  종교’에 있는 의식이 아니라 그냥 야만스러운 사람들의 종교를 빙자한 의례일 뿐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나왈의 인생 유전

남자 친구와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를 강제로 빼앗긴 후 대학에 진학한 나왈은 새 삶을 시작한다. 종교의 경계를 넘어선 평화 운동가로 변신한 그녀는 여행 중 타고 가던 버스가 기독교 민병대에게 공격을 당하는 위기에 빠진다. 이슬람 지역에서 온 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던 순간, 나왈은 목에 걸린 십자가를 보여주며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밝히고 살아난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선택은 그녀에게는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남는다. 종교의 경계를 허물고 평화 운동을 하던 그녀가 기독교 민병대의 총격 앞에 자신은 기독교임을 밝히고 살아난 것은  삶을 위한 구걸이었다. 무슬림이란 이유로 버스안에서 총을 맞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한 그녀는 복수를 다짐하고 종교와 이별한다.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간 그녀는 지도자를 살해한 뒤 감옥에 갇혀 15년을 보낸다.  순박한 시골처녀에서 평화 운동가로, 평화 운동가에서 테러리스트로 그리고 감옥에 갇혀서는 힘들 때마다 다른 죄수들이 다 들을 만큼 한 맺힌 노래를 하는 노래하는 여인으로 변신한다. (독일에서는 ‘노래하는 여인’으로 상영되었다. 본래 영화 제목은 불붙기 쉬운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다). 어느 날 그녀의 노래를 제재하기 위해 감방안으로 들어온 간수는 그녀를 겁탈하고 나왈은 감옥에서 쌍둥이를 출산한다.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중동으로 날아온 시몬과 잔느가 그 쌍둥이이며 그들이 찾아야 하는 형은 남자 친구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버려진 아들이다.

이후 나왈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 정착한다. 이후 역시 이름을 바꿔 캐나다로 이주한 감옥에서 강간을 했던 니하드와 우연히 마주친다. 그녀는 강간범을 알아 봤지만 니하드는 그녀를 못 알아본다.

1+1 =1 이라는 비극

잔느와 시몬이 추적하던 아버지와 형은 동일인이었다. 입에 담기 조차 불쾌한 근친 상간, 제 어미를 강간했던 버려진 아들은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프스를 떠올린다. 영화는 섣불리 화해를 권하지 않는다. 마치 수학 문제나 퍼즐을 풀 듯 객지에서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해 가던 쌍둥이 남매는 마지막 수학 문제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냥 진실을 묻어 버리고 갈 수도 있던 그들의 어머니가 수치스러움을 감수하고라도 고백한 진실은 무엇인가?

나왈은 자신이 타고 가던 버스가 기독교 민병대에 공격당하던 때 무슬림 여인의 품에 있던 여자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그 품에서 데려 온다. 곧 죽게 될 무슬림 여인은 아이라도 살리려는 나왈의 의도를 알고는 아이를 넘겨 준다. 그러나 아이는 나왈의 품에서 빠져 나와 죽은 엄마에게 달려가다다 총에 맞아 죽는다. 나왈에게 있어서 인생의 두번째 전환점이었던 이 순간 나왈은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첫 아이를 생각했을 것이다. 무슬림의 살인 병기가 되어 제 어미를 강간한 자가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훗날 멀리 떨어진 캐나다에서 였다.

인생은 수학공식 처럼 정확하게 선과 악을 나눌 수 없고, 적과 나를 나눌 수 없다. 나왈이 잔느와 시몬에게 같은 캐나다에 있는 니하드를 멀리 중동에서부터 캐나다까지 돌아 돌아 찾게 만든 이유는  삶의 설명할 수 없는 고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였다.

사람들의 관계로만 보면 막장 드라마와 같은 불편한 영화다. 나왈은 원치 않았지만 아들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잔느와 시몬에게 있어서 니하드는 오빠며 형이며 아버지다. 마치 두 감람나무가 접붙듯이 모든 것이 섞여 버렸다. 이 불편한 관계에서 우리는 싸움이 얼마나 덧없는 것임을, 아버지인지 형인지 설명이 안되는 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잡아 낼 수 있다.  누가 참이고 돌인지 구분도 의미 없어진다.

▲ 잔느는 마치 수학 문제를 풀듯이 차근 차근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한다.

하나님의 택한 선민이라는 시온주의자들은 폭력과 자본력으로 세상을 주무르려 한다. 돌 감람나무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들처럼 권력과 돈을 가지는 것이 참의 속성인 줄 알고 세상의 참이 되기 위해 죄인이자 돌이었던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다.

가장 기본적인 도덕조차 무시한 관계에서도 용서와 진실이 드러나는데 그깟 이념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제 동족과의 갈등을 증폭시켜 권력을 유지하려 하고, 교리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서로 삿대질을 해 댄다. 민족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미사일을 쏘아대며 어린 목숨들까지 빼앗아 간다. 일단 두 감람나무의 접붙임처럼 차이를 인정하되 서로 나누고 교류하고, 섞여 보자. 누가 참인지는 밀과 가라지를 나눌 때처럼 하나님께서 먼 훗날 알아서 나눠주시지 않겠는가!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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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2014-07-26 06:55:53
참감람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으면 참감람나무, 돌감람나무 가지의 차이나 구분이 무의미합니다. 모두가 한 형제 자매요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지금은 그 차이를 인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확인하고 섞여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지 못했다면 그 차이를 알고 멀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선교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한국에서 2014-07-22 16:11:00
오랜만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