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총의 기본 정신이 뭐지?
한기총의 기본 정신이 뭐지?
  • 김기대
  • 승인 2014.09.06 10:2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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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이영훈 목사 한기총 접수로 세력 다툼 본격화

지난 6월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NCCK) 회장을 지난 성공회 김근상 주교가 LA를 방문했을 때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교회협에서 만난 유명한 목사들의 인물평을 한 적이 있다. 대개는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비슷했으나 김주교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 이영훈 목사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했다. 그가 지금은 조용기 목사의 흔적을 없애는데 주력하고 있지만 교회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으니 NEWS M(당시는 미주 뉴스앤조이)도 “순복음이라고 너무 미워하지 말고 지켜봐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조용기 목사 시절 진보색채의 교회협에 기하성이 가입한 것은 의외이긴 했지만 조목사가 지난 2005년 고 강원용 목사와 사회 통합 문제를 놓고 대담에도 나서는 등 발넓은 행보를 보이던 터라 교회협 가입이 그런 행보의 일환으로 보기에 충분한 정황이었다. 그때부터 기하성은 교회협 가입교단이었는데 이번에 이영훈 목사가 마치 죽어가는 불씨를 살리듯 20대 한기총 회장에 ‘등극’함으로써 한국 교계의 파워 게임이 새로운 양상을 맞게 되었다.

이영훈 목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껏 한기총은 대내외 모든 도전과 시련에도 흔들림 없이 한국교회 보수 신앙의 보루로 복음주의 신앙 전통을 지켜 왔다. 이 같은 신앙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한 대표회장 홍재철 목사의 신앙 노선을 적극 지지하고, 한기총이 진행한 모든 것은 본인이 수용하고 계승하기로 한다."고 밝혔다. 말많던 한기총 노선과 홍재철 목사의 신앙노선을 유지하겠다는 이야기인데 화근이 된 일을 전통으로 삼겠다는 이영훈 목사의 취임 일성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교회협, 한기총, 한교연 세싸움 막올라

한기총의 기본 정신에 대한 설명은 없이 기존의 것은 틀렸다는 반대 명제로 시작한 취임의 변은 신학전통을 세운다기 보다 본격적으로 세싸움의 시대에 접어 들었다는 것의 반증에 다름아니다. 이영훈 목사가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내용에는  △ 한기총에서 이탈한 모든 교단은 조건 없이 복귀토록 최선을 다하고 △WCC의 잘못된 신학 사상을 반대하고 △교회협·정교회·가톨릭이 체결한 직제협의회를 적극 반대한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여기서 이탈한 세력은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을 말하는 듯 했다. 이목사는 통합을 위해 한영훈 대표회장을 만날 의사가 있다고 했고, 교회협에 대해서도 지난해 WCC 제10차 부산 총회에 참석해 설교한 것은 “주최 측이 최초로 오순절의 밤 행사를 기획해 초청했기 때문”이라며 교회협과 거리를 둘 것임을 명확히 했다.

그동안 교회 내부 정리에 주력하던 이영훈 목사가 정치 전면에 나선 것은 교세에 비해 자신의 입지를 넓힐 공간이 많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기하성이 비록 교회협 소속이기는 하나 신앙 노선이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교회협의 뿌리 깊은 기득권층이 이영훈 목사가 입지를 넓혀갈  수 있도록 양보할 가능성은 없다. 김근상 주교가 이영훈 목사에게 호의적이었던 것도 교회협 내 비주류 교단이라는 동병상련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기총이 이단 문제, 임원들의 구설수 등 여러 문제로 입방아에 오르자 통합측이 깃발을 들었던 한기총 탈퇴와 한교연 창립이라는 과정에서 소외된 이목사측의 섭섭함도 이번 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한교연은 당장  이영훈 목사의 신학사상과 신앙노선에 대해 예의 주시하기로 했다는 회의결과를 발표하면서 두 단체 간의 이단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될 것을 암시했다. .

한국교회 연합운동 영욕의 역사   

1924년 9월 24일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 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모태인 교회협은  장로교와 감리교, YMCA등의 가입단체로 창립되었다. 1931년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후 1937년 알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1946년 조선기독교연합회로, 1948년 정부수립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1961년 지금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라는 명칭을 갖게된 교회협은 현재 10개 교단(기하성이 서대문측, 여의도측 모두 가입)과 기독교서회, CBS, YMCA 등이 가입되어 있다.

교회협 첫 번째 위기는 민주화

교회협은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정권과 불가근 불가원의 적당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1972년 유신선포이후 교회협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인 기장(기독교 장로회) 목회자들이  교회협 전면에 나섰고 많은 명망가들을 배출했다.

교회협의 첫 위기는 1987년 찾아온 대통령 직선제라는 절차적 민주주의였다. 박정희의 독재를 비판해 온 교회협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부분적인 성취를 이루고 난 뒤 새로운 의제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게다가 1980년대부터 민중해방(PD)과  민족해방(NL)이념이 학생운동을 양분하면서 교회협에 우호적이던 기독교 학생운동 세력은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명망가 일부는 정치인으로 변신후 선거에 나섰으나 좋은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위상 축소에 직면한 교회협은 반정부 운동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해 기성 보수 교회가 받아들이기 힘든 담론들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비정치적 청년 대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이른바 복음주의권도 교회 연합운동을 위협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 학생운동이나 정치 이념에 바탕해서 운동을 하던 청년들이 졸업(또는 제적)후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으로 뛰어든 반면, 비정치적 학생들은 유학 또는 취업이라는 화력한 ‘스펙’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출세한’ 이들이 복음주의 교회로 대거 이동하면서 교회 연합 운동은 선명성이라는 강박에 시달리고 결국 대중성을 잃게 된다.

이 틈을 이용해 출범한 것이 한기총이었다. 한기총에는 비정치적 젊은이들을 끄는데 성공한 고 하용조 목사  고 옥한흠 목사 등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사실 이 두 사람은 각기 속한 교단(통합과 합동)에도 미온적이었다. 심지어 하목사는 독립교단 연합회에 더 많은 애정을 기울였다. 이미 성공한 ‘개교회’ 목사가  연합 단체나 총회 안에서 후배 취급을 받으며 ‘주전자에 물 떠올 군번’역할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1989년 한기총 출범에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이 있음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신흥 복음주의 교회의 부각으로 인한 한국 대표교회로서 영락교회의 위기, 영락교회(통합)가 속한 교회협의 위상상실을 직감한 한경직은 ‘원로’들을 모아 한기총을 창립한다.  교회 연합 운동의 경험이 없던 합동측에게도 한경직은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선뜻 한기총 출범에 동의한다. 강인철 한신대 교수에 따르면 89년 1월2일 한기총 출범을 논의한 남한산성 모임에 참여한 10명 중 9명이 이북 출신이었다.  이들은 교회협이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없어서 한기총을 창립하자는데 동의했는데 통일운동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가치는 결국 반공이었다. 1988년에는 교회협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 있었고 고 문익환 목사(기장)의 방북사건이 있던 해이기도 했다. 이북 출신의 기독교 원로들이 서둘러 한기총 창립에 뜻을 모은 것은 이런 일련의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은 붕괴했다.

두 번째 위기 – 명망가들의 정계 진출

첫 직선제 정국인 노태우 정권하에 기독교인들의 자생적인 정치 참여는 실패했지만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15년 동안 새로운 피의 수혈이 필요했던 시기에 교회협 소속의 목사들이나 기독교 운동권들이 대거 정치권으로 진출했다. 안병무의 부인인 박영숙을 비롯한 이우정 한명숙 등 여성들을 포함해 김상근 권호경 등 많은 사람들이 정치권으로 진출하자 교회협은 리더십의 공백상태를 맞는다.  김대중 정부 하에서 CBS 사장을 했던 권호경은 민주화 운동 중심에 있던 경력과 달리 노조와의 갈등 전면에 섬으로써 교회협(출신)은 1960~70년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인물)으로서의 위상을 점점 잃어간다.

세 번째 위기 – 기장 감리교의 착각,  통합의 ‘갑’질

교회협의 주류 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예장 통합, 기장,  감리교는 교회협 이외에도 여러 교회 연합 기독교 단체장을 안배해왔다.  1980년대 까지 교세가 적은 기장이나 감리교는 기독교 기관에 많은 목사들을 파송하는데, 기장은 시민 운동 분야에 감리교는 종교간의 대화 같은 분야에서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했다. 그것이 민주정부 수립이후 정치권에 사람을 보내는 모판 역할을 했다. 반면 교세가 이들보다 큰 통합은 기독교 기관 보다 목회를 선호하는 교단 분위기 탓에 기관목회 안배에 제 몫을 챙기지 않았다. 실제로 전문성을 가진 인물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초부터 통합측 장로교 신학대학원의 졸업생이 급증했다. 문제는 인원급증이 질적 저하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학생 운동권 출신을 비롯한 다양한 고급인력들이 장신대 신대원으로 몰려들었다는 점이다. 통합도 비로소 연합 기관에 내어 놓을만한 실력을 갖춘 잉여인력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세 주류 교단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감리교와 기장은 통합의 지형변화를 모른채 특정 분야의 전문가인양 행세했고, 통합은 막강한 자금력과 자격을 갖춘 잉여 인력을 바탕삼아 ‘갑’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교회협이 응집력을 잃어가자 기장이나 감리교는 책임을 통합에 돌렸지만 철밥통처럼 기관목회 자리를 내어 놓지 않던 앞의 두 교단도 교회 연합 운동 위상 약화의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한기총이 이단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자 2012년 통합이 기치를 들고 한기총을 떠나 한국교회연합을 만든다. 김삼환(명성교회)이 그 중심에 있는데 김삼환의 독특한 위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삼환은 연배로는 옥한흠 하용조와 비슷하지만 그들만큼 자기만의 목회 세계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새벽기도는 양적으로는 시선을 끌었으나 옥목사의 제자훈련과 같은 브랜드 가치는 지니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통합내에서도 장신대 출신이 아니었기에 주류가 아니었다. 천재적인 감각을 가진 김삼환은 자신의 출신지인 경상북도 안동이 그를 주류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한경직 이후 퇴조하기 시작한 통합내 평안도세는 교단의 주류를 영남세력에게 내 주었다. 현재 통합의 영남세는 지나치게 비대해져 그 안에서 안동파와 경주파로 나뉠 정도다. 한기총 8대 회장을 지낸 고 김기수 목사(안동교회)는 안동파의 수장으로 김삼환의 멘토이기도 했다. 김삼환은 안동파에서 착실히 자기의 위상을 높여갔다. 이것은 하용조나 옥한흠이 교단의 서열문화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것과 대비된다. 명성교회의 교세를 내세우지 않고 서열문화에 충실하며 때를 기다리던 김삼환이 교회 정치에 감각을 발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삼환은 교회협이 왼쪽으로 한기총이 오른쪽으로 치우치고 각자 위상도 약화되자 한교연 창립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이영훈 체제는 성공할 수 없다

이영훈 목사는 한기총의 창립정신을 존중해 나가겠다고 했지만 ‘반공’과 ‘원로들의 위기감’외에 창립정신이라고 할만한 것은 본래 없었다.  다락방 류광수와 평강제일교회 박윤식에 대한 이단 해제도 세불리기에 다름 아니었다. 한교연이 한기총과 이단문제로 갈등한 것 같지만 한기총이 지나치게 우경화하면서 사회의 눈총을 받자 새로운 연합운동의 필요성에 따라 창립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용기와 친한 한교연 ‘주류’들은 이영훈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 대형교회가 떠난 빈자리가 아쉬웠던 한기총의 잔존파들이 이영훈 회장 카드를 만들었다. 결국은 세싸움인 것이다.

현재 세 단체의 홈페이지를 보면 세 단체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교회협은 세월호 특별법 서명운동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으며, 한교연은 지도부가 광화문의 유가족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으며 한기총은 난데없이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제정하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앞서 말한 김근상 주교는 이영훈 목사가 곧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주는 좋은 목사가 될 것이라고 피력했지만 그 소망은 물건너갈 공산이 크다. 세불리기와 이념 논쟁의 장에 들어선 이상 좋은 사회적 영향력은 기대할 수 없다. 자의이건 타의이건 이목사는 이제 싸움의 중심에 섰다. 사실 조용기 목사도 처음에는 서울 변두리 지역에서 기층 민중에게 복음을 전하던 '좋은'목사였다.  하물며 이런 과정도 거치지 않은 이목사가 일찌감치 교회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그에게도 교회에게도 한국 사회에도 결코 좋은 신호가 될 수 없다.  

김주교는 인터뷰에서 교회협이 살아야 한국교회가 산다고도 말했지만  교회협만으로 한국 교회를 대표하기에는 시대적 환경이 너무 변했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교회 연합활동의 출범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단체의 고유 정신이란 것이 고작 세불리기와 주도권 다툼으로만 드러나는 현재의 지형에서 어떤 연합 활동도 교회와 사회의 지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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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그네 2014-12-04 20:51:47
좋은 기독교 분열역사비평입니다. 리더들은 새겨들을 기사입니다.

종말 2014-09-06 11:05:59
한기총의 기본정신을 알려 드립니다. 잘 듣으십시요.
제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
1. 한기총 기본정신은 홍재철 목사의 정신입니다.
2. 이단 받아들이기 입니다. exampple: 다락방(류광수), 인터콥(최한우) 등등 받아들여 숫자 세력 키우기.
3. 정치 권력에 아부하기, 아첨하기: 정치인 김00 등등에 가까이 하여 권력의 힘을 입어 다급한 문제를 해결하고, 그런 세력가가 곁에 있음을 은근히 과시하기. 정부 여당이 잘못해도 그들을 옹호해주기,
4. 정치 권력에 잘 보이기 위해, 여당의 알바노릇하기.
여당의 반대편에게는 무조건 종북/좌파/빨갱이로 몰아부치는 알바생으로 전락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