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만한 시험은 없다...!?
감당할 만한 시험은 없다...!?
  • 강만원
  • 승인 2014.09.12 06: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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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시험'에 대한 고백적 성찰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허락하지 않으신다”

강만원 ⓒ  <뉴스 M>

여기에서 말하는 ‘시험’은 헬라어로 ‘시련’이나 ‘유혹’을 나타내는 페이라스모스(peirasmos)의 한글 번역이다. 고통을 뒤따르는 시련과 쾌락을 미끼로 내세우는 유혹은 분명히 성격이 다른 낱말이지만, 신자의 신앙 상태를 확인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때로는 신자에게 시련을 주시거나 때로는 사탄의 유혹을 허락하신다는 점에서 두 단어를 묶어 종종 ‘시험’으로 통용한다. 본문의 의미를 문맥 안에서 보다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새번역 성경’ 전문을 인용한다.

“여러분은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고전 10:13)

이처럼 개역개정은 ‘시험’으로 번역했지만 새번역성경은 ‘시련’으로 옮기고, 어떤 학자는 본문의 전후 문맥을 고려할 때 ‘유혹’이 바른 번역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단어의 뜻을 하나의 의미로 뚜렷히 구별지을 수 있는 문맥적인 지표가 없기 때문에 독자의 생각에 따라서 페이라스모스는 시련일 수도 있고 유혹일 수도 있다. 내용으로 볼 때 본문의 메시지에서 핵심은 ‘시험’이기 때문에 두 가지 의미를 혼용해도 무방하지만, 나는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서 ‘새번역성경’의 ‘시련’으로 의미를 규정한다.

시련으로서 시험은 본질상 ‘고통’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허락하지 않으신다” 라는 구절을 통해서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당장은 견디기 힘들망정, 그리스도인에게 결코 ‘무한의 고통’은 없으며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분명히 말하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고난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라면 어떤 사람도 이를 두고 ‘고난’이라고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난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의미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본문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은 온유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녀가 감당할 수 없는 가혹한 시련을 절대로 주시지 않는다는 뜻인가? 따라서, 지금 나에게 닥친 시련이 비록 견디기 힘들지만 머잖아 끝나고 더 이상의 고통은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사람의 처지와 형편을 익히 아시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 사람의 상황에 맞춰서 스스로 견딜 만한, ‘맞춤형 고난’을 주신다는 뜻인가?

사람마다 고난에 대응하는 방법이 다르고, 같은 상황에서도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은 대단찮은 질병에도 지레 겁을 먹고 힘없이 쓰러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온 몸에 전이된 말기암 판정을 받고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상처럼 겪는 흔한 아픔조차 다른 사람은 자신만의 특별한 고통인양 지나치게 연연하면서 절망의 수렁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정도가 다르다면, “견딜 수 없는 시련을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은 결국, 의지가 나약하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고난을 주시지 않거나 간단히 견딜 수 있을만한 고난을 주시고, 반면에 의지가 강건하고 믿음이 튼실한 사람에게는 그에 걸맞게 일부러 가혹한 시련을 주신다는 말인가?

이는 명백한 모순이다. 만약에 신앙심이 깊은 사람에게 일부러 극심한 고난을 주신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은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의도적으로 처절한 고통을 주신다는 주장인데, 이는 은혜의 의미와 가치를 부정하는 명백한 모순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의 시험에 대해서 분명히 정의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통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시험하시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시험을 받으시지 않는다”라고... 하나님은 당신의 지극한 사랑으로 손수 지으신 자녀가 처절하게 고통당하는 것을 바라보며 은밀히 즐기는 사디스트가 아니다!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신다”라는 말씀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에 따라서 차별적인 고난을 주신다는 뜻도 아니고, 설령 나에게 힘겨운 고난이 있다 해도 견딜 만한 정도까지만 고통을 겪다가 때가 되면 저절로 사라진다는 뜻도 아니다. 아픈 고난을 겪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본래의 의미를 오해한 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주문’을 외우듯이 쉴새없이 본문을 되뇌인다. “감당할 정도까지만 고난을 주신다”라고 약속하셨으니, 도저히 견딜 수 없을만큼 극한 상황에 처한 자신에게 더 이상의 고난은 없으리라는 섣부른 기대와 함께...

과연 그럴까? 만약 기대하고 기도하기만 하면 자연스레 고난이 멈추거나 사라진다면, 믿음의 선진들이 겪었던 끈질긴 고난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주께서는 죽음의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시며, 피를 토하듯 간절히 기도하셨지만 십자가의 끔찍한 고통과 수욕을 끝내 피할 수 없었다.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던 열두 사도들도 끝까지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모두 처참하게(?) 생명을 잃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험으로서 고난은 사람의 의지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능히 감당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슨 시험의 의미가 있겠는가?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계속 이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보고, 듣고, 겪고 있지 않는가. 처음부터 이 구절은 사람에 따라서 자신의 의지로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크기를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모든 고난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설익은 위로의 말씀도 아니다.

단언컨대, 사람의 육적인 의지로는 고난의 끈질긴 시험을 절대로 ‘능히’ 이기지 못한다. 이길 수 있는 고난이라면 처음부터 고난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의 남다른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께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주실 때 비로서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감당할 만한 시험’의 기준은 나의 육적인 의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은혜를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영적인 ‘능력’에 종속하며, 그 능력은 나의 존재 자체를 영혼과 골수까지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신비한 능력이다. 혹독한 시험을 능히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과 함께 고난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안타까운 기대가 아니라, 고난이 지속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하며, 고난이 좀처럼 멈추지 않는 처절한 그 순간에도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짓을 바라보는 ‘온전한 믿음’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나의 근본적인 변화... 그것이 고난을 이기는 승리의 검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지만, 내가 두 눈으로 보지 못할망정 그 순간에도 찬란한 태양은 변함없이 세상을 비추고 있다.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덮으면 육신의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너머에서 태양은 잠시도 쉬지 않는 채 밝은 빛을 토하고 있다.

내 안에 계신 주의 능력, 즉 나에게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영적 의지’로 고난에 당당히 맞서고, 마침내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다. 무지하고 무능하며 무력한 ‘내’가 섣불리 시험을 감당하려 애쓰지 말고, 주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 나의 약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강하신 주의 손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고난의 시험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약한 그 때에 주께서 강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허락하지 않으신다” 라는 구절을 마치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난이 결코 다가오지 않는다” 라는 의미로 섣불리 해석할 수 없다. 설령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치더라도 결코 절망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주께 온전히 의지할 때 내 안에서 역사하시며 나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가 어떤 고난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의미로 오롯이 해석해야 한다.

강만원 /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자. 작가.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의 저자이며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 단순한 열정,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신이 된 예수, 루나의 예언, 자연법의 신학적 의미, 예수의 역사와 신성 외 다수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아르케 처치'에서 성경강의 및 번역, 출판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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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주 2019-04-20 01:47:20
하나님은 감당 못하는 시련을
주지 않는다. 즉 시련을 주신다 해도
모두 다 감당 할수있는 일들이다
생각되는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