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억 호화 예배당과 중세 삽질의 부활
3000억 호화 예배당과 중세 삽질의 부활
  • 신성남
  • 승인 2014.09.25 03:06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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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건물 성장은 교회 성장이 아니다

“이 ‘돈’에 환장한 목사들아, 그러고도 너희가 가난한 목수 예수의 제자라고 주장하느냐. 이 ‘복’에 환장한 교인들아, 그러고도 너희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를 먹던 세례 요한을 존경한다고 말하는냐. 그리고 이 ‘건물’에 환장한 교회들아, 그러고도 너희가 가정에서 모이던 초대 교회의 그 순수한 신앙을 따른다고 자랑하느냐.”

▲ 신성남 © <뉴스 M>

돈과 세속적 복과 그리고 교회당 건물은 이제 한국교회가 애지중지하는 애완용 우상이 되어 버린 듯 합니다. 사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존경할 만한 목회자와 바른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위의 글은 필자의 진심입니다.

하여튼 바벨탑처럼 높은 아방궁을 하나 세워 놓고 떼로 몰려 가서 ‘솔로몬의 성전’이니 뭐니 하며 수선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서, 냄새나는 잔치상에 부끄러운 숟가락 하나 더 얹어 놓고 갖은 교언영색으로 두꺼운 얼굴에 서로 금칠하는 일부 거룩하신 목사님들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한 마디를 안 할 수가 없군요.

서울에 교회당이 모자라나

몇해 전 사랑의교회는 장소가 너무 비좁아서 신축을 한다고 공표했습니다. 그 심정은 필자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처럼 초호화판 아방궁을 세운 것은 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처음엔 2100억 원이라고 하던 건축비가 사전에 누구의 승인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려 3000억 원으로 슬그머니 바뀌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최종 건축비가 얼마가 될런지는 정말 며느리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 요란한 잔치가 대충 끝이 났다면, 이제라도 취기를 좀 몰아 내고 옆 동네 미자립 교회들을 한번 가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고작 몇십 평도 안 되는 셋방살이 작은 예배당마저 자리를 채우지 못 해 전전긍긍하는 교회들이 지금 아주 널렸습니다. 즉 현재 서울에는 교회 수에 비해 교인이 부족한 것이지, 결코 교회당 건물이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1960-70년 사이 전체 개신교 교인 수는 412%나 증가했고, 1970-85년 사이에도 103%나 증가했지만, 1985-95년 사이에는 그 증가율이 35%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1995-2005년 사이에는 14만 4천 명이 줄어들어 급기야 -1.6%의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반면에 같은 기간 동안 가톨릭 신도는 무려 220만 명이나 늘어나서 74.4%의 초고속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교인 수는 줄고, 자리가 빈 교회들이 매년 늘어 나고, 또한 은행 빚을 못 갚아 경매로 넘어 가는 교회들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랑의교회는 초대형 신축을 용감하게 단행했습니다. 극심한 건축 반대 여론은 그냥 무시했습니다.

자신들만이 바른 교회라고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 유명한 제자훈련은 도대체 왜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까. 수십 년 동안 훈련을 했으면 이젠 장성한 제자들을 이웃 미자립 교회들에 조직적으로 파송해야 옳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아니면 실전 배치는 평생 미루고 허구한 날 비대한 몸집만 키우며 끝까지 훈련만 받다가 그냥 편안히 돌아가시겠다는 말인지요.

‘아방궁’은 중국 시황제가 위수의 남쪽에 세웠던 호화롭고 거대한 궁전입니다. 후궁들의 처소였던 이 왕궁은 수많은 미희들로 가득했으나 그 진나라는 고작 15년만에 멸망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최초로 초호화 성전을 지었지만 도리어 나중에 후궁들에 둘러 쌓여 음란한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금으로 성전을 치장하고 그 화려함을 자랑했으나 왕과 백성들은 오히려 메마른 광야에서 천막 생활할 때 보다 더욱 극심하게 타락했습니다. 어리석고 부패한 인생들이 하는 일이란 늘 이 모양입니다.

결국 그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것은 오직 여자와 사치와 향락밖에 없었슴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의 대형 교회 담임목회자들 또한 간통과 호사와 공금 횡령으로 온 동네 망신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한 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분들은 완공된 서초예배당을 보며 ‘일단 짓고 나면 땡이다’ 하며 혹시 기뻐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대단한 착각입니다. 무리한 건축으로 인한 엄청난 은행 빚의 상환 등 진짜 어려움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9천 명이 모이던 제자교회가 담임목사의 부정 행위가 들통난 후에는 2천 명 이하로 급감했다는 사실이 그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우선 당장 교회의 회복을 갈망하는 ‘마당기도회’에 대한 치졸한 방해와 압력을 즉시 철회하지 않는다면, 그런 난관은 더욱 구체화될 것입니다.

몇해 전 ‘거룩한 땅 밟기’ 운운하며 새 예배당 부지에 빨간 리본들을 잔뜩 깔아 놓고 성황당처럼 신성시 하던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기존 강남예배당의 마당을 쓰레기장 취급하며 별로 거룩하지 못 한 행동을 하시는 것인지요. 이젠 그 ‘거룩한 땅’마저 토사구팽을 하시나요. 이는 너무 모순적인 처사가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리 출입문을 용접하고 높은 담을 올리며 갖은 수단 다 동원해도 결국 양들의 의로운 분노를 막기는 힘들 것입니다.

삽질로 망한 중세 교회

사전을 찾아 보니, ‘삽질’이란 말은 ‘쓸모 없는 일을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관용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한국교회의 예배당 대형화를 통한 건축 경쟁 행위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단어는 드물 듯 합니다.

같은 소리음이라도 이를 어떻게 사용하는냐에 따라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잘못 사용하면 듣기 싫은 소음이나 잡음이 됩니다.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규모와 용도가 적절한 건축은 예술이지만, 실속 없는 허장성세용 건축은 삽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사기성 면죄부까지 팔며 무리하게 추진한 초대형 건물 ‘성베드로성당’의 공사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공교회가 저지른 무분별한 건물 삽질의 아주 원조격인 셈이지요. 당시 교회의 내부는 썩고 또 썩어 있었는데 오히려 외형만 키우고 겉치장에 열을 올린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교회는 루터의 그 묵직한 쇠망치가 다시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대형 교회들 현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또 못질해야 정신을 차릴까요.

어두웠던 중세 천년 동안 그 시대 교회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은 고작 삽질 사역의 유산인 대형 건물들뿐입니다. 이스탄불의 그 거대한 성소피아성당도 이젠 관광용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한 때 융성했던 유럽의 개신교도 형편은 비슷합니다. 큰 건물들만 딸랑 남겨 놓고 지금은 거의 다 망했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모텔, 식당, 상가, 그리고 술집 등 다른 용도로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결국 역사 속의 수많은 교회들은 교인들의 귀한 헌금을 허비하며 이렇게 허망하게 변해 버릴 건물에 열심히 삽질하다가 쫄닥 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건물이 아무리 크고 많아도 교회가 그 본질을 상실하면 언제나 망할 수 있다는 것이 교회사가 보여 주는 냉엄한 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가 예수의 이름을 팔아 가난한 신도들 장바구니 돈까지 짜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은행 빚까지 돌려 막으며 대형 건축을 하는 행위가 그보다 무엇이 더 나은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아 한쪽에서는 계속 문을 닫고 있는데 말입니다.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따르는 무리들의 푼돈을 걷어 허름한 초막이라도 하나 지은 적이 있으셨던가요.

과연 서초동의 그 무슨 쇼핑몰같이 생긴 사치스런 벽돌 덩어리 속에서 종의 형체로 낮게 오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정신과 가난한 목수의 마음을 진정으로 잘 전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아니면 과거 거대한 헤롯성전 안의 상인들처럼 본격적으로 좌판이라도 한번 멋있게 펼쳐 보려는 것인가요.

그러나 그처럼 크고 화려한 성전을 자랑하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절대로 잊지 마십시요.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13:2).”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고상한 아방궁에서 철따라 냉난방 틀어 놓고 품위있는 예배를 즐기는 동안, 같은 시각 다른 한편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천 길바닥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힘든 삶을 버티고 있는 줄 진정 알기나 하시는지요.

반면에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풍족치 않은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에 먼저 힘을 쏟았습니다. 전도나 선교를 위한다는 허구적인 명분으로 자신들을 위한 대형 예배당 건축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교회들이 정작 배우고 닮아야 할 것은 초대 교회의 검소한 사역이건만, 많은 대형 교회들은 하필이면 삽질하다 망한 중세 교회를 닮아 가는 짓만 골라서 하는지 정말 답답합니다. 최근 여의도순복음교회, 경향교회, 제자교회, 왕성교회, 경서교회, 광성교회, 그리고 사랑의교회에서 일어난 사태를 보십시요. 이 외에도 주목할 만한 교회가 ‘물 반, 고기 반’으로 아주 차고 넘칩니다. 이를 보면 배도적인 목사 귀족화, 신도 우민화, 건물 대형화, 복음 기복화, 그리고 교회 사유화에서 자유로운 대형 교회가 요즘 과연 몇이나 되는지 정말 의문입니다.

중세 삽질의 부활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려면 ‘왕궁’으로 가야 하고, 선지자를 만나려면 ‘광야’로 가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눅7:24-26).”

예수님과 제자들은 광야로 가셨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틈만 나면 아방궁 같은 건물을 세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부족한 광야에 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바른 교회라면, 신도들이 그 광야에서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들이 아니라 ‘선지자’를 만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요즘 왜 교회에 안 나가는 ‘가나안 성도’가 급증하고 있는지 알고나 계십니까. 어떤 교회에는 부드러운 긴 옷 입은 자들만이 설치고, 정녕 선지자는 보여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줍지 않은 박사모를 쓴 자들은 넘치는데, 예수님 고난의 가시관은 잘 보여 주지 않습니다. 물질적 축복은 넘치게 노래하는데, 십자가의 도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한 반복성 건물 삽질과 기만적 가르침에 염증이 나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 개신교의 진정한 악성 안티는 일부 무신론적 논객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귀족 교회의 ‘거짓된 목사’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시지만, 이 종교 상인들은 반대로 신도들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를 포함한 많은 성도들은 신축된 사랑의교회 서초예배당이야말로 성베드로성당에서 종지부를 찍었던 그 ‘중세적 원조 삽질’의 화려한 부활이 아닌가 그리 의심하고 있습니다.

건물 성장은 교회 성장이 아니다

만왕의 왕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고작 나귀 새끼를 타셨는데, 초대형 건축으로 인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은행 빚을 지고 있는 교회의 목사가 수억 원의 연봉을 받고, 기사가 딸린 최고급차를 굴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대형 콘도를 분양받아 골프치며, 비싼 특급 호텔에 가서 운동한다면 이게 정말 종의 모습일까요. 게다가 거액의 두 자녀 유학비까지 모두 교회 돈을 가져다 채웠다고 하는데 정말 듣고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 돈이 다 어디서 난 것입니까. 모두 순진한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께 바치라고 뜨겁게 설교하고 그 주머니를 열심히 흔들어서 나온 것 아닙니까. 신도들이 무슨 돈 내는 기계인가요. 입만 열면 ‘하나님께 바치라’며 설레발 치던 소중한 헌금을 엉뚱하게 목사가 사치를 떠는 데에 허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담임목사는 한 부목사가 나이 드신 성도들에게 모리배처럼 함부로 반말을 지껄이며 폭력적 언사를 하는 행위도 마냥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느 부목사는 한 여성도가 집단 폭행 당하는 것을 보고도 제지하지 않았다지요. 이처럼 담임목사에게 애완견처럼 충성하는 부목사들 중 상당수가 군목 출신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군견’도 저런 짓은 안 할 것입니다. 물론 군 사역에 성실히 수고하시는 다른 군목님들께는 너무 민망한 일입니다.

그리고 귀족 목사들 중에는 ‘의전’을 핑계로 최고급차를 굴리는 분들이 제법 많다고 하던데, 이게 종이 할 처신인가요. 하여간에 하늘 아래에 의전이 필요한 종놈이 있다는 말은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참된 경건은 눈물 연기와 잔 재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진정 자숙하기를 원한다면, 만날 성도들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우려 하지 말고 목사들부터 손수 그 비싼 차들을 팔아서 실용적인 차로 바꾸고 남은 은행빚이나 조금이라도 더 갚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지난 30년간 영국 교회는 무려 5천 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약 30% 이상의 교인 수가 감소했다고 합니다. 건물 삽질에 비해 신도 양육을 제대로 하지 못 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건물 확장에 몰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인의 바른 성장입니다. 큰 건물들만 잔뜩 세워 놓고 무너지고 있는 유럽 개신교를 보십시요. 건물 성장은 결코 교회 성장이 아닙니다. 따라서 일부 목회자들은 목사 말 잘 듣고 헌금 잘 하는 맹신도를 키워 교회 외형만 확장할 궁리를 행여라도 하지 말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바른 성도를 키우는 데에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성전 건축’이라는 기만적 명분을 빙자한 경쟁적 건축을 이제 즉시 멈추기 바랍니다. 건물이나 재력 또는 교세를 자랑하는 교회는 이미 십자가 정신을 상실한 타락한 교회일 뿐입니다.

서초동의 그 거대한 콘크리이트 덩어리는 결코 ‘성전’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그 아무리 잘난 건물이라도 감히 성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만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삽질로 목회하던 목사님들은 더 이상 예배당 건물이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요. 목회자로서 그런 거짓말은 면죄부 판매만큼이나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건물은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바르게 성장해야 비로소 진정한 교회 성장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

신성남 집사 /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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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덕 2014-10-27 18:51:27
한국기독교의 파수꾼이 될만합니다. 광야의 외침으로 들립니다. 나팔의 역활을 충실히 하여주십시요...로선에 변절은 허용하지말고요...

2014-10-02 09:51:41
신 박사님, 오랜만입니다. 경북기독신문 김병학 편집국장입니다.
'85가지 헌금' 기사 좀 gumicn@hanmail.net으로 보내 주십시오. 부탁 드립니다.

김 목사 2014-09-29 13:16:38
구구절절이 맞는 말씀입니다.
성전삽질 좋아하고 숫자삽질 좋아하는 목사들은 꼭 필독하면 좋겠습니다.
읽어야 할 목사들은 안보고, 안 읽어도 될 목사들은 보고 있으니 참 안타깝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무익한 종 2014-09-27 07:43:58
전적으로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