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관 유물 이전 신중해야
국민회관 유물 이전 신중해야
  • 김기대
  • 승인 2014.09.26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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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한인연합 장로교회, 기념재단 유물 이관 왜 고집하나
지난 4일 열린 대한인국민회 유물 한국 위탁관리위한 공청회 © <뉴스 M>

9월 25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되는 미주한국일보는”대한인 국민회 기념재단이 2003년 발견된 유물을 한국 독립기념관에 조건부 위탁관리 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보도는 또한 “유물 소유권을 지닌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도 당회 결정으로 조건부 위탁관리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이로써 지난 2003년 대한인 국민회의에서 발견된 해외 독립운동 자료의 한국 이전이 가시화 되었는데 기념재단이나 한인연합장로교회 측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전을 추진하는 데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일단 지난 9월 4일 ‘대한인 국민회의 유물 위탁관리를 위한 공청회’에서 참석자 대부분이 “해외 독립운동의 소중한 자료는 해외 교민들이 지켜야 한다”며 반대의사를 밝혔다. 또한 교회 차원에서 보존과 관리가 어려우면 UCLA나 USC측에서 관리를 하겠다고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념재단측과 교회측이 위탁관리를 서두르는 이유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념재단의 이사장이었던 존 서 씨가 이전 반대를 주장하며 돌연 이사장직을 사퇴했다. 존 서 씨는 보도 자료를 통해 ▲기념재단 유물의 현지 보존 등 대안 무시 ▲이사회 유물 불법반출 시도 ▲사적지 유물 한국 반출 반대를 꼽고, 이사장직 사퇴와 동시에 이사회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존 서 이사장은 이어 “지난 4일 유물의 한국 조건부 위탁관리 공청회에서 발언자 모두 동포사회 유물의 한국 이전을 반대했다”며 “그럼에도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와 기념재단은 유물 보존을 위한 대안을 무시하고 유물을 비밀리에 반출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왜 꼭 보내려고 하나

지난 2004년 국민회관 복원위원회(위원장 홍명기)에서 21만불을 모금했으나 10년 만에 기념 재단은 관리능력이 없음을 자인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특히 존 서 이사장의 성명서 중 ‘비밀리’에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UCLA난 USC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마당에 굳이 왜 서둘러 이전을 추진하냐는 것이다.

한국 사학계에 밝은 S씨(UCLA 대학원)는 한국 측에서도 왜 그렇게 보내려고 하는지 갸우뚱해 하는 의견들이 많다고 전했다. 단순히 관리 능력의 한계라고 말하기에는 이유가 명확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모금 활동을 비롯해 국민회관 복원에 많은 애를 썼던 홍명기 씨의 처남이기도 한 존서 이사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사진들이 위탁관리를 주장하는 이유도 ‘유물의 효율적인 관리’라는 말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한국 이전 순탄하지 않아

기념재단이 위탁관리를 결정했다고 모든 유물이 한국 정부로 넘어가는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공청회에서 케네스 클라인 박사(USC 동아시아 도서관 관장)은 “1984년 캘리포니아 주 법원 판결문은 국민회관의 유뮬들은 캘리포니아 한인사회의 소중한 역사적 기록일분 아니라 로스앤젤레스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에 2083년까지 국민회관 이외로 반출 이전 매각 변경들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명시(사건번호 C297-554)”했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져 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장로교(PCUSA)의 입장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지난 6월 미국 장로교 총회에서 한미노회 해산이 결의되자 미국장로교 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일부 언론은 한미 노회의 해산으로 국민회관 유물 소유권이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연합장로교회가 속한 한미노회도 미국 장로교 소속인데 한미노회가 해산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소유권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닌데 그런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우려에 대해 한인연합장로교회 측은 지난 7월 1일 중앙일보를 통해 "법적인 문제만 따진다면 나성연합교회도 미국장로교 소속인 만큼 유적이나 유물의 소유권도 '미국'쪽에 있을 수 있다"며 "당장 노회 해산 결정으로 교회에서는 모든 물건, 볼펜 하나까지도 옮길 수 없게 된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기념관이나 유물은 한인사회에 의미가 큰 것인 만큼 미국 교단에서도 이를 감안하겠지만, 만에 하나 한인사회에 엉뚱한 다툼이라도 불거진다면 정말 후세들을 볼 면목마저도 사라지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인 교회들로 인한 법정 소송에 많은 비용을 소모한 미국 장로 교단 측이 C297-554로 인해 소송이 예상될 수 있는 일에 선뜻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교회 측 역시 중앙일보 보도에서 밝혔듯이 미국 장로교 제도를 잘 알면서도 이관을 추진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일 열린 대한인국민회 유물 한국 위탁관리위한 공청회 © <뉴스 M>

나성한인연합 장로교회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 박일영) 는1906년 창립된 교회로 도산 안창호를 비롯해 독립운동가인 김성락(2대 담임목사)목사 등 미주 독립운동의 명망가들이  거쳐간 유서깊은 교회이다. 1936년 지금의 위치로 (1374 W. Jefferson Blvd.)로 옮긴 후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한인교회의 모교회로 순탄하게 발전하던 교회는 1970년 들어서 분규를 거듭, 조금씩 명성을 잃어갔다. 1928년 첫 한인목사(김종수 목사) 부임 후 1989년까지 5대 목사가 목회했던 (평균재임기간 12년) 교회는 1989년 6대 담임목사(정용철 목사) 부임후 현재까지 12대 목사가 거쳐갈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목회자의 잦은 교체로 교인들의 들고 날고도 심해 교세가 하락하던 차에 박일영 목사의 나성제일교회와 지난 2010년 통합했다.  (평균재임기간   3.5년, 현재 박일영 목사가 12대로 시무중). 말하자면 유물 관리를 지속적으로 관리할 교회의 일관된 행정체계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념재단이 발족하던 2003년 교회 대표로 공동이사장을 맡았던 김도기 장로도 현재는 교회를 떠난 상태다. 유물관리가 어려운 이유를  한인 사회의 무관심으로만 돌리기에는 궁색해 보인다.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는 미국 장로교 한미노회 소속이었다가 노회 해산으로 거취를 모색 중에 있다. 교단의 동성결혼 허용문제로 미국장로교 소속의 다른 한인교회들과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으나 교회의 역사성으로 볼 때 미국 장로교단도 연합교회를 쉽게 포기 하지 않을 전망이다. 한편  교회 입장에서는 지리적으로 미국 장로교 노회 중에서도 진보적인 노회에 속하는 태평양 노회로 옮겨 가야 하는데 그것도 또다른 고민이다. 그런 모든 점을 고려해야 하는 교회 입장을 생각하면 유물 처리를 서두를 수 밖에 없는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교회나 재단 측 모두 소중한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유산에 관계된 사안을 서둘러 추진하지 말고 좀 더 신중하게 여론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존 서 전이사장 측에서 제기하는  ‘비밀리’의 의혹을 푸는 길이기도 하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 대한인 국민회

1908년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에 의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저격의거를 계기로 일어난 재미 한인단체 통합운동의 결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였다.

그 이듬해 5월에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국민회에 흡수됨으로써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였다. 이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로 구성하기 위하여 미주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구성하였으며, 1909년 4월 멕시코에도 멕시코지방회를 조직하였다.

나아가 1911년에는 시베리아지방총회를 설치하고 치타·이르쿠츠크·수청(水靑) 등 16개 지방에 지방회를 구성하여 회원이 1,150여명에 달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만주지방총회를 설립하고 8개처에 지방회를 구성하였다.

1912년 다시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각 지방총회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설치하고 재외한국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최고기관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로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하여 국내외에 배포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조국 광복 때까지 해외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1935년 총회장으로 부임한 최진하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위상이 크게 높아지자 그 다음해부터 새 총회관 건립을 추진해서 1937년에 완성을 보았다.

2003년에 대한인국민회기념관 재단은 대한인국민회복원위원회, 대한민국정부, 도산기념사업회, 교포 등으로부터 기부금을 모아 원래의 총회관을 대지 200평에 건평 100평의 1층 건물로 새로 건축하였다. 현재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와 한 울타리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은 대로변에 대한인국민회기념관Korean National Association Memorial Hall이라는 안내판이 있고, 일종의 박물관이자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총회관, 특히 자료실은 독립자금 및 임정후원 관련 자료와 미주이민관련 자료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1991년 로스앤젤레스시는 ‘Korean Independence Memorial Building’으로 시 사적지 548호로 지정하였다.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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