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도 못 알아들으면서 다니는 미국 교회
설교도 못 알아들으면서 다니는 미국 교회
  • 김종희
  • 승인 2007.11.02 1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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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내가 쓰는 언어는 '저 높은' 곳의 언어인가, '이 낮은' 곳의 언어인가

소위 ‘모태신앙’이니까, 40년간 교회를 다닌 셈입니다. 근데 요즘은 교회에서 하는 얘기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몇 개월 미국 교회를 다니면서, 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경험은 저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제 모습에 대해 반성하게 만들어줍니다.

지금 다니는 미국 교회는 교인들 숫자나 분위기가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와 비슷합니다. 출석 교인이 100명이 채 안 되고, 할렘에 있다 보니 백인보다는 흑인이 조금 더 많은데, 어울림이 자연스럽습니다. 백인 목사와 흑인 목사가 공동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부흥 같은 것보다는 할렘에 사는 가난한 흑인 아이들의 교육 문제와 같이 지역 사회 현안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교인 중에 Social Worker가 많다고 합니다. 백인 목사 부부는 할렘에 사는데, 자녀들은 모두 흑인입니다. 입양했답니다.

제 아내와 두 딸도 교회를 두 번 가보더니 맘에 든다고 합니다. 큰딸은 특히 찬양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흑인들의 노래 실력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피아노와 드럼 연주도 수준급입니다. 흑인 특유의 경쾌한 찬양이지만, 장로교회인 탓인지 분위기나 곡이 우리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닙니다. 찬양이나 기도, 또는 설교 도중에 ‘Hallelujah’ ‘Amen’ 하는 추임새가 간간이 나오지만, 억지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대체로 만족스럽습니다. 예배 끝나고 맨해튼을 관광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입니다.

▲ 지난여름 교인들이 많이 사는 할렘에서 가까운 센트럴파크로 피크닉을 갔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애들은 먹을 것만 찾고, 목사(오른쪽 두 번째 회색 셔츠)는 열심히 소시지를 굽고 있습니다.
근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설교를 도통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 대해서 사전에 나름대로 조사해서 어떤 성향의 교회인지 대충 파악했고, 그렇기 때문에 설교의 방향에 대해서도 감 잡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실제로는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 하나 문제는, 사람들이 저희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몇 마디 대화하고 나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얘기, 듣고 싶은 얘기가 왜 없겠습니까. 속에 쌓이고 쌓였지요. 하지만 그걸 다 영어로 말하고 들을 줄 안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40년간 교회를 다녔지만, 다른 나라에 오는 순간 바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하고 싶은 그 많은 말을 어떻게 쏟아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이제 막 믿기 시작한 사람, 교회 문을 처음 열고 들어가는 사람의 심정이 바로 지금 저의 심정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처럼 그 교회에 대한 정보를 검색 사이트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이리저리 알아보고 찾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고 가도 한동안은 바보가 되어서 지내야 합니다. 저야 처음부터 그럴 각오를 했으니까 이 교회를 계속 다니는 데 이런 문제가 결정적인 난관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를 처음 오는 사람들은 교회 다닐 마음만 갖고 있던 터에 때마침 주위 사람의 적극적인 독려가 결합되어 채 준비 되지 않은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설교와 기도 시간에 쏟아지는 수많은 언어들은 기존 신자들에게는 은혜가 듬뿍 담긴 언어의 상찬이겠지만, 저와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 내지 ‘방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에서 한동안 급속도로 성장한 교회는 불신자 또는 구도자를 위한 교회가 되기 위해(아니면 그런 교회로 보이기 위해), 강단에서 십자가를 없애고, 성경책과 찬송가책이 없어도 예배에 참여하는 데 불편을 못 느끼도록 하고, 드라마와 같은 시청각 자료를 설교에 활용하고, 헌금에 대한 부담을 없애고,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 시간을 따로 만드는 등 노력했고, 실제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도 한때 유행병처럼 번졌지만, 회수를 건너자마자 탱자가 되어버린 귤처럼, 교회 성장의 획기적인 수단처럼 변질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적과 취지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수단과 방법만 복사한 까닭입니다. 너도나도 구도자를 위한 예배, 열린 예배를 간판처럼 내걸었지만, 저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낯선 언어들이 난무하는 것을 피할 길은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붐마저도 사라진 것 같습니다.

▲ 교인들과 카드에 적힌 단어를 알아맞히는 게임을 했습니다. 가운데 앉은 아줌마는 'abnormal'을 무슨 군사 용어처럼 이상하게 설명해서 그 팀은 그 단어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나는 한 문제도 알아맞추지 못했습니다. 단어와 설명을 연결시키려면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까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예수가 하는 말을 가난한 사람들, 못 배운 사람들, 몸과 마음이 망가진 사람들, 잘나가는 사람들에게 왕따가 된 사람들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종교적 열심이 대단한 사람들, 가방끈이 긴 사람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은 예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성육신한 예수가 저 높은 곳에서 이 낮은 곳으로 내려와서는 낮은 곳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쉽게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저 높은 곳은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성육신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여전히 저 높은 곳에 앉아서 거기 사람들끼리 통하는 말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를 따라 살지는 않는 모순에 빠지는 셈입니다.

처음 겪는 경험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 돌아보게 됩니다. 미국 교회 교인들에게 저와 같은 이방인을 위해서 영어를 쓰지 말고 한국어를 쓰라고 주문할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영어를 배워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것입니다(솔직히 말하면 해결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교회에 처음 오거나 예수를 처음 믿은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끝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 높은 곳의 언어를 쓸 것인가, 이 낮은 곳의 언어를 쓸 것인가. 그들을 내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인가, 나를 그 수준으로 끌어내릴 것인가. 이것은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전략이 아닙니다. 예수의 성육신을 내 몸으로 실천하는 것,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 바로 그 자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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