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부르는 간증의 소심함
전쟁을 부르는 간증의 소심함
  • 김기대
  • 승인 2014.11.05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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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멜랑콜리아], 나 혼자 죽기 싫은 사람들의 심리

어떤 전직 장성이 남쪽에 북한에서 판 수십개의 땅굴이 있다면서 최근에 빈번히 일어나는 싱크홀 현상도 그 때문이라고 우기고 다닌다.  간증집회에서 그런 말을 하고 다닌다는데 간증이란 그럴듯한 단어 뒤에  ‘우기기’, ‘억지’, ’끼워 맞추기’ 를 우리가 어디 한 두번 경험했는가? 중국에서 길가던 어린아이가 땅으로 푹 꺼지는 동영상이 SNS에 퍼진 적이 있는데  북한은 중국까지 땅굴을 파고 있는가 보다. 나라의 안보를 책임져야 할 한국의 국방부가 오히려 전쟁 위험을 과장하면서 국민을 겁박하던 전례와 달리 이번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반박하고 나서는 모양새도 재미있다.  

어떤 여인은 12월에 한국 땅에서 전쟁이 난다는 계시를 받았다며 역시 우기고 다닌다. 본래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씁쓸하게 웃어넘기면 될 일인데 그 여자가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풀러 신학교까지 해명 성명을 낼 정도로 파장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들의 간증은 전쟁을 예방하는 차원의 ‘고언’처럼 들리지만 실은 전쟁을 부르는 광기에 찬 사람들의 일상적인 행동에 다름아니다. 평화의 시기에 왜 전쟁을 부르는가?  영화 <멜랑콜리아>(라스 폰 트리에 감독, 2011년)를 보면 그 심리를 알 수 있다.

<멜랑콜리아>는 지독하게 불편한 영화다. 지루할 뿐 더러 영화 속 은유와 상징을 따라가느라 몰입에 방해를 받는다.  감독은 왜 저런 장면을 이곳에 장치해 놓았는가를 생각하다 지금 눈 앞에 벌어지는 장면을 놓치곤 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늘 그랬듯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도그빌>(2003년)에서는 그레이스(Grace)라는 은혜로운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세상에 폭력적으로 복수함으로써 은혜의 역설을 보여준다.  ‘신적 폭력’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개념을 즐겨 차용하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도그빌>을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어둠속의 댄서>(2000년) 에서 주인공 셀마(Selma)는 이용만 당하는 가장 바보스러운 여자이지만 그녀의 이름은 지혜의 임금 솔로몬의 여성형인 셀마다. 그 뜻은 신들에게 보호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영화 속 셀마는 신들의 보호도, 인간의 보호도 못받은 채 억울하게 죽어가면서 그녀의 독특한 인생관으로 신들과 인간들에게 보란듯이 복수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영화 속 인물의 이름을 통해 역설적 상황을 설명해 왔지만 평론가들이 놓치기 일쑤다. 앞서 지젝만이 <도그빌>에서 은혜(grace)의 역설을 발견해 내었었다.  <멜랑콜리아>의 두 주인공 자매 이름은 저스틴(Justine, 커스틴 던스트 분)과 클레어(Claire, 샤를로뜨 갱스부르 분)다. 저스틴은 올곧다는 의미인데(우리 이름으로 하면 ‘진실’이 쯤 되겠다) 영화 속 저스틴은 바르기는 커녕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우울증 환자다. 클레어는 지혜롭고 맑다는 뜻인데 (우리 이름으로 하면 ‘명숙’이 쯤 되겠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어리석은 여인이다. 제목 <멜랑콜리아>는 우울증을 의미하는 동시에 영화 속에서 지구를 파멸시키는 행성의 이름이다.

▲ 다가오는 거대한 행성 멜랑콜리아 앞에서 마법의 동굴에 앉아 있는 저스틴과 클레어, 클레어의 아이


영화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의 제목은  저스틴이다. 심각한 우울증 환자인 저스틴은 부자 언니 부부의 도움으로 호화로운 저택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리무진이 올라오기도 힘든 산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저택이지만 하객이 많은 것을 보면 언니 부부의 사회적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저스틴 부부를 실은 긴 리무진은 어렵게 산 길을 올라 간다. 꼬부랑 길에서 긴 자동차는 몇번의 전진과 후진을 반복해야 그 구비를 통과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후진이 쉽지 않다. 영화는 처음부터 인생과 역사에서 후진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려한 결혼식이지만 저스틴의 감정은 오락가락한다. 이혼한 저스틴의 부모는 헛소리로 결혼식을 망쳐 놓지만 누구 하나 겉으로 불평을 드러내지 못한다. 다시 한번 언니 부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장면이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저스틴의 감정은 양극을 오간다. 이제 결혼식의 주인공은 없어지고 사람들은 저택에서의 파티만을 즐긴다. 감정의 변동을 제어하지 못하던 저스틴은 마침내 그날 하객 중의 하나인 젊은이와 섹스를 나누고 남편 마이클은 그녀를 떠난다.

 

2부 클레어 – 영웅도 과학도 필요없는 종말

도시로 돌아간 클레어는 시간이 지나 다시 언니집으로 돌아온다. 그 즈음 뉴스에서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향해 달려오고 있어 곧 지구는 멸망하게 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동안 수없이 보아왔던 지구 재난 영화와는 다른 장면이다.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할 백악관의 긴급 회의 소집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회의장에 늘 보이던 수백개의 모니터를 비치한 통제실도 없다. 집은 저택이지만 사람들은 티브이 하나로부터만 정보를 얻는다. 재난 영화에서 등장하는 영웅들도 없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시아 지역의 공포를 소개하는 장면도 없다. 거대한 지구가 이제 파멸을 맞지만 장면은 세상과 격리된 산 속 저택의 사람들에게만 집중된다. 

결국 멜랑콜리아 행성은 지구와 충돌하고,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한채 지구는 멸망한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부질없다는 허무한 결말이다.

영화의 1부와 2부는 동생과 언니의 이야기지만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다. 1부는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저스틴의 종말을 의미하고  2부는 세상을 다 가질만큼의 부를 갖춘 언니의 세계가 종말을 맞는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우울증에 걸린 동생은 종말의 공포에 증상이 심해지지 않고 차분히 기다리며, 세상을 다 가진 언니는 눈물로 종말을 맞는다. 1부는 화려한 결혼식이 주 내용이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만남은 사랑에 기초한 새로운 출발로 보였지만 충돌로 끝이 난다. 2부는 멜랑콜리아와 지구 두 행성의 충돌로 끝이 난다. 

 

나 혼자 죽을 수는 없잖아?

저스틴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녀가 우울하면 세상도 우울해야 하고 그녀가 기쁘면 세상도 기뻐야 하는데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 견딜 수 없다. 자신이 우울해진 상황에서 섹스를 하자고 덤벼드는 남편을 밀쳐내고 정원에 나가 그날 처음 만난 젊은 남성과 섹스를 나눈 것도 그 때문이다.  저스틴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어쩌면 감독은 영화의 2부에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저스틴의 의식 세계를 담았는지도 모른다. 산속 저택을 제외하고 종말의 어떤 장면도 나오지 않는 이유는 종말이 저스틴을 둘러싼 세계에만 갇혀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실제로 행성의 충돌이 있었다 해도 피해는 전지구적인 규모가 아니고 저택에만 국한될 수도 있다.

TV 뉴스를 통해 보여진 행성 충돌 뉴스가 이런 가정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나 영화 <싸이코>(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1960년)에서 시골 여인숙의 주인이 죽은 어머니의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어 놓은 채 어머니의 음성을 복화술로 재생했던 장면을  떠올리면 TV뉴스 조차도 영화 속에서는 무의식의 반영을 위한 장치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실화를 다룬 영화이기는 하지만 <뷰티풀 마인드>(론 하워드 감독, 2001년) 에서도 이런 설정이 있었다.  골프장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영화에 나오는 19번째 홀이 영화의 2부가 환영이라는 추측을 뒷받침 해준다. 

행성의 충돌에 앞서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그들을 구원할 동화적인 마법의 동굴에는 저스틴과 언니 클레어, 그리고 조카 만이 머문다. 자기의 세계가 이미 파괴되어 버린 저스틴의 입장에서 세계가 망하는 것이 차라리 낫고 그래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면 자신과 자신을 받아 주는 언니와 조카는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망해도 된다. 설령 자신이 죽어도 세상도 함께 죽으니 애석해 할 이유가 없다. 

전쟁을 부르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와 같다. 그들은 현실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다.  곳곳에 ‘종북세력’이 난무하는데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승만이 보도 연맹으로 엮어 수만명을 학살했듯이, 박정희가 법의 힘을 빌어 사법살인을 했듯이, 전두환이 광주시민을 탱크로 짓밟았듯이 반대 세력을 모두 처단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 정부에 대한 경고가 그들의 주장에 담겨 있다.  

따라서 그들은 우울증 환자처럼 죽을 듯이 불안하다. 혼자 죽을 수는 없다.  전쟁이 나던 행성이 충돌하던 함께 죽어야 한다.  이처럼 그들의 어설픈 우기기는 전쟁의 위험을 알려서 사전에 예방하자는 취지가 아니라 함께 죽자는 뜻이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세상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자칭 전도사라는 여인의 ‘예언’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곧 동성애 천지가 될 것 같고 그들의 ‘보수’신앙이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것 같을 때 이런 현상들이 나타난다. 곧 ‘화가 단단히 나신’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것 같은데 휴거만큼 전지구적 규모로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런 이들의 공통점은 함께 죽기를 바라면서도 영화 속 '마법의 동굴'이라는 유치한 설정처럼 처럼 전쟁과 종말이 자신은 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 든다.  안식교인들이 그랬고 모르몬 교인들이 그랬고 1990년대 휴거 논쟁이 그랬다. 이번에는 범위가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으니 저택에 국한된 영화 속 설정처럼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세상의 규모가 너무 작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모두 죽을 수 있는 세상이기에 혼자 죽기 아까워 다른 이들의 세상을 끌어 들인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마법의 동굴이라는 ‘그들만의 신앙’에 기대어 살아보려는 비겁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  

 

죽음에 앞서 함께 살려던 바울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종말을 기다리면서 노동을 거부할 때 바울은 그들을 향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다(데살후 3:10). 종말은 허무감 속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철저하게 깨어 있는 상태에서 맞는 시간이다.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과정에서 배의 난파를 맞는다. 거기서 그는 혼자 살려고 하지 않고 함께 살려고 한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거센 바람만이 심하게 불었으므로, 우리는 살아 남으리라는 희망을 점점 잃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에 바울이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여러분은 내 말을 듣고, 크레타에서 출항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이런 재난과 손실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지난밤에, 나의 주님이시요 내가 섬기는 분이신 하나님의 천사가,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반드시 황제 앞에 서야 한다.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사도행전 27:20-25)

 

성서의 약속인데 우리는 종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깨어 있지 못할 때 우리는 종말의 징조를 구분하지 못한다. 저스틴의 남편 마이클의 이름은 천사장 미카엘로부터 왔다. 미카엘은 사탄 루시퍼를 몰아낸 천사장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영화 속 마이클은 자기 세계에 갇힌 저스틴을 구해내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결국은 실패하고 종말의 현장인 저택을 떠난다. 마이클은 결혼 선물로 사과 과수원을 저스틴에게 선물하지만 그녀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게다가 그곳에서 열리는 사과의 이름은 제국(empire)이다. 희망(내일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의미에서)과 제국(인간 모두가 가진 욕망)을 모두 제공해 봤지만 자기 세계에 갇힌 저스틴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저스틴의 형부 즉 클레어의 남편 존은 묵시록의 저자 요한이다. 요한은 묵시적 종말을 예언하면서 많은 상징들을 남겼으나 종말론자들은 그것의 의미를 신비적으로만 해석하려 든다. 묵시록의 배경인 1세기 정치 경제적 상황을 외면한 채 666같은 상징만 붙들고 씨름하는 게 종말론자들의 특징이다. 영화 속 존은 사도 요한과는 반대로 끝까지 종말을 부인하며 과학적 합리적 이론을 들이대며 행성이 비껴간다고 낙관하지만 그의 합리성도 힘을 쓰지 못한다.

존은 상당한 부를 소유했다. 그가 부를 축적하기까지 그의 합리적 선택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합리적 선택과 도덕성으로 부를 축적하던 막스베버가 분석했던 건전한 자본주의 시대는 갔다. 그런데도 그것에 매달리는 불행한 캐릭터다.

▲ 저스틴의 형부 존은 천체 망원경으로 멜랑콜리아를 관찰하는 부질없는 일을 한다.

저스틴은 광고회사에서 광고 문안을 만들던 카피 작가였다. 광고회사 사장은 그녀의 능력을 높이 사서 결혼식에 참석해 하객들 앞에서 그녀의 능력을 치켜 세우며 계속 일해 달라고 부탁한다.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광고 카피 문구들, 더러는 성서의 구절보다 더 영향력이 있는 문구를 만드는 최고의 카피라이터의 정신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속성을 보여주는 기막힌 장면이다.

종말을 향해 치닫는 자본주의의 기차에 올라타지 말고 기독교인으로서 함께 사는 방법을 찾는 일이 깨어있음이 지닌 현대적 의미이다.  종말이 온다면 전쟁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문제로 인해 올 것이다. 두 가지는 밀접하게 닿아 있어 분리하기가 쉽지 않지만 자본으로 덕지덕지 무장한 세력이 지닌 전쟁의 광기를 외면하면서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인 북한이 일으킬 전쟁을 염려하는 것은 스케일이 너무 작다. 전쟁을 부르는 ‘신흥 예언자들’이여! 부탁하건데 스케일을 좀더 키우라.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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