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와 ‘부자 예수’
나사렛 예수와 ‘부자 예수’
  • 강만원
  • 승인 2014.12.10 05:1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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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 강만원 ⓒ <뉴스 M>

기독교 신문에 게시된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연봉 1억이 넘는 목회자들 국세청에 소득 신고해야...” 라는 제목의 간단한 기사였고, 어찌보면 그리 흥분할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도 분노가 치밀었던 이유는, ‘돈을 사랑하는’ 유대 바리새인의 타락을 넘어서는 한국교회 부자 목사들의 탐욕과 위선이 도를 한참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연봉이 억대인 경우는 일부 교회에 지나지 않고 종교인 과세를 반대하는 목사들도 사실상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이 대부분 각 교단의 유력한 목사들이며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표면에 드러난 일부 목사들만의 지엽적인 문제를 넘어서 한국 교회 대다수 목회자들의 공통된 의식일 수 있다는 점에서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다. 얼마전에 ‘한목협’이라는 단체에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상대로 “한국교회에서 가장 닮고 싶은 목사가 누구인가?”라는 설문서를 돌린 적이 있었는데, 압도적인 1위가 조용기 목사였고, 김삼환, 김홍도, 오정현이 뒤를 따랐다.

이들은 소위 한국의 ‘메가처치’를 대표하는 이름있는(?) 목사들이 아닌가? 또한, 이들의 공통점은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른, 이른바 ‘부자 목사들’이다. 이미 진부한 내용이지만, 조용기 목사는 교회 재정을 제멋대로 유용해서 언론사와 대학을 비롯해서 다수의 기업에 투자했고, 하나같이 가족들을 대표로 앉혔다. 나이 칠십이 한참 넘어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당회장에서 은퇴하면서 수백 억을 퇴직금으로 수령했는가 하면, 원로목사로 가끔 설교하면서 매년 지급받는 돈이 수 억에 달한다.

정확한 액수와 성격이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명성교회 김 삼환 목사는 교인들과 장로들조차 잘 모르는 자금을 운용하다가 자금을 관리하던 재정 장로의 투신 자살로 온 세상이 떠들썩 했는가 하면, 교단의 대규모 행사 때마다 거액의 자금을 지원하는 큰 손으로 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는 어떤가? 심각한 수준의 논문 표절로 여론의 도마에 올랐던 그는 거듭되는 거짓말로 사랑의 교회 교인들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수많은 교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여론에 떠밀려 외유하듯이 잠깐 강단을 떠났던 그는 매년 수 억의 연봉을 받고 있으며, 별도의 목회활동비와 더불어 선교 명목으로 해마다 십여 차례 ‘퍼스트 클래스’로 해외여행을 즐기고, 명의는 사랑의 교회이지만 교인들과는 상관없이 사실상 거의 혼자 사용하는 골프장 회원권을 소유하고 있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다른가? 그는 이미 오래전에 MBC PD 수첩을 통해서 온갖 비리가 밝혀지면서 세상의 비난을 온 몸에 받았던 장본인이 아닌가? 거금의 횡령과 더불어, 심지어 권사와의 간통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서 상대에게 뒷돈을 지불했던 유명한(?) 인물이다. "나는 교회 재정에서 단 한 푼도 사용하지 않는다"면서, "내 명의로 흔해 빠진 통장 하나 없다"라고 큰 소리쳤지만 기자들의 끈질긴 취재 결과 차명으로 무려 수십 게의 계좌가 여지없이 발각됐다. 더욱이, 목회 세습의 ‘원조’로 한국교회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위인이다.

이런 목사들을 ‘마음으로 존경하며, 가장 닮고 싶다’고 애절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난한 목사들’에게서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정작 닮고싶은 것은 선배 목사들의 깊은 영성이나 신앙의 순수한 열정이 아니라 세상의 재물과 권력, 그리고 허튼 명예일 뿐이다.

기사에서 보았듯이 한국 교회 목사들의 대부분이 속마음에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마음에 품은 진실은 자명하다. 지금은 교회의 규모가 영세해서 작은 보수에 마지못해 만족하거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만, 만약에 교회가 커져도 과연 그들이 지금처럼 ‘가난한 삶’을 순순히 받아들일까, 좀처럼 신뢰가 가지 않는다. 교회의 양적 성장에 눈먼 한국교회 목사들의 전반적인 의식을 보건대, 그들의 순수성이 믿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컨대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지니는 소위 ‘목사의 지위’에 관한 기본적인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가시면류관을 쓰신 나사렛 예수를 바라보는 자들의 생각과 화려한 금관을 쓰고 왕좌에 앉은 ‘이스라엘의 왕’을 바라보는 자들의 생각은 근본부터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극히 가난한 자로 세상에 오셔서, 살 찢기고 피 흘리며 처절히 죽었던 나사렛 예수의 희생을 바라보는 주의 종들과, 성전의 보좌에 앉아서 왕처럼 군림하는 종교의 우상으로서 예수를 바라보는 귀족목사들은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말이다.

가난한 예수의 청빈한 삶에서 스승의 본을 바라보는 목사들은 결코 ‘부자 목사’를 꿈꾸지 않는다. 한국 교회의 내노라 하는 부자 목사들이 앞장서서 교회의 영성을 파괴, 또는 타락시킨 배경은 무엇보다 그들이 사실상 ‘다른 예수’를 믿으면서 마음속 깊이 ‘부자 예수’를 추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라고 주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무슨 뜻인가? 재물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처럼’ 결코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준엄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돈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결국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성공 목회를 갈망하면서 마음속에 ‘부자 예수’를 바라보는 목사들은 처음부터 주의 종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이미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대형교회 목사들의 실제 수입은 이른바 ‘사례비’로 책정된 금액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목회활동비, 선교(활동)비, 홍보비, 도서비, 자녀 장학금 등의 명목으로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금액이 훨씬 많다는 것쯤은 이미 알려진 비밀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회계 장부에 정식으로 기록된 금액이 아니라 교회 재정을 마치 개인금고처럼 제멋대로 사용하면서 불법적인 횡령을 서슴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목사들이 얼마나 벌고 어떻게 사용하든지 수단과 방법이 정당하다면 굳이 따질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다. 다만, 그들이 ‘주의 종’ 또는 ‘하나님의 사자’ 운운하며 본색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일탈을 버젓이 저지르고, 교인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는 자들이 기본적인 도리를 망각한 채 공공연하게 비리를 일삼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다시말해, 목사들의 왜곡된 권위에 현혹된 순진한 교인들이 덩달아 ‘다른 예수’를 믿고 있으며, 소경이 소경을 따라가다가 모두 구덩이에 빠지듯이 목사와 교인 가릴 것 없이 모두 ‘부자 예수’를 바라보며 방황하다가 마침내 실족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절박한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단언컨대, 주의 종은 모름지기 가난해야 한다. 수입이 없거나 작아서 가난할 뿐 아니라, 설령 많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우선’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의 계명을 지키는 종으로서 목사들은 필연적으로 가난할 수 밖에 없다. 목사도 가정이 있으니까, 자녀가 있으니까, 경제생활에 어려움이 없어야 목회에 전념할 수 있으니까, 노후를 생각해야 하니까 등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려면, 뻔뻔스럽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허튼 주장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 주의 종이 아니라 좋은 직업으로 목사를 선택했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이 차라리 떳떳하다.

가난을 겪어보지 못해서 가난의 처절한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물질적인 동정을 넘어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너와 나의 눈높이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고난을 겪어 보지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고난에 진정한 동정compassion을 느끼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자기가 아프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왜냐하면, 고난은 마음으로 느끼는 관념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겪고있는 처절한 현실이며 실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는 가난한 자를 진정으로 동정com-passion하기 위해서 스스로 가난을 택하셨고, 스스로 비천한 삶을 사셨다.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려면 밑도 끝도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한다. 야고보서 2장 14-17절의 말씀을 묵상하라. “가난한 형제에게 네가 소유한 것을 아낌없이 나눠 주어라!”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그러나, 예수의 사랑은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로 돕는 ‘자선’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가 말하는 사랑은 물질의 자선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마음으로 ‘영접하며’ 섬기는 겸손이며 헌신이다. 스스로 낮아지고 작은 자가 되어 세상의 가난한 자를 섬기는 것이 예수가 말하는 사랑의 본질이며, 예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믿음의 순종이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자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18:2-6)

본문에서 ‘어린 아이’는 ‘작은 자’의 상징이다. 따라서 작은 자를 영접하는 자, 다시말해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작은 자를 섬기는 자라야 주의 계명을 지키고 마침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실로 두려운 가르침이다. 예수는 작은 자를 섬기기 위해서 먼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다...”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생경한(?) 가르침이다. 결국, 작은 자에 대한 연민과 물질적인 구제를 넘어서, 진정한 마음으로 그들을 ‘주처럼’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순종이다.

예수의 계명을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이나 물질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작은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가난한 나사렛 예수로 오셔서, 생명을 바쳐 세상을 구원하신 결정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변해서 낮은 자리에 설 때 비로소 예수가 말씀하신 ‘겸손한 종’으로서 세상의 작은 자를 섬길 수 있다.

교회개혁의 본령도 마찬가지이다. 입으로만 거창하게 개혁을 외치면 끝내는 잡다한 사변思辨에 그치고 만다. 교회개혁은 모름지기 주의 종들이 주를 따라서 생명까지 아끼지 않는 종으로서 자기 자리에 바로 서는 것, 즉 종이라는 가장 비천한 자리에 바로 서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교회 개혁을 원한다면 목회자들과 사역자들, 그리고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자 목사’의 검은 유혹을 떨치고 주저없이 가난한 삶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종의 모욕을 고스란히 감수하는’ 겸손(humility)의 어원처럼 철저히 낮아져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주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교인들을 위해서, 그리고 ‘주의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바람직하다.

강만원 /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자. 작가.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의 저자이며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 단순한 열정,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신이 된 예수, 루나의 예언, 자연법의 신학적 의미, 예수의 역사와 신성 외 다수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아르케 처치'에서 성경강의 및 번역, 출판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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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2014-12-11 11:31:44
구구절절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강선생님.
가난한 종의 길을 지향하는 목사에게 다가올 수 있는 분들이 관연 있을까요? 개혁을 부르짖는 성도들도 많고, 옳음을 주장하는 성도들도 많고, 의식 있는 가나안 성도들도 많지만 진리에 투신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성도들은 만나거나 보지는 못했습니다. 부디 강선생님은 그런 교회, 하나님 나라인 공동체를 꼭 이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흠흠 2014-12-10 09:55:16
당신은 가난한 삶을 실천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