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들어주라"
"거울을 들어주라"
  • 김영봉
  • 승인 2007.11.14 22: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연속 설교 [영화관에 가신 예수님] 3 : 누가복음 15:11-24

▲ "이런 사랑도 있다." 신애와 종찬 사이에는 늘 Secret Sunshine이 있었다.

1.
영화 <밀양>은 어느 모로 보든 남녀 간의 러브스토리라고 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포스터는 마치 러브스토리인양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화 포스터에 “동그라미처럼, 그가 그녀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는 문구(카피)도 보이고, “이런 사랑도 있다……”라는 문구도 보입니다.

신애의 남동생이 밀양 역전에서 “사장님은 누나 타입이 아니예요”라는 말을 종찬에게 던지고 가는데, 관객인 우리가 보아도 시골 노총각 종찬은 세련된 서울 색시 신애에게는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종찬은 늘 신애 옆을 맴돕니다. 신애를 향한 종찬의 사랑이 이야기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남녀 간의 러브스토리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사람의 애정보다는 신애의 아픔과 치유 과정이 더 부각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종찬이 신애에게 주고 있는 사랑의 성격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애에 대한 종찬의 사랑은 왠지 연애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그런 사랑과 달라 보입니다. 물론 종찬은 신애를 이성으로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사랑은 이성을 향한 정염을 훨씬 초월하는, 뭔가 더 순수하고 더 온전하며 더 차원 높은 감정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물어봅니다. “왜 감독은 이 영화를 ‘러브스토리’로 부각시키려고 했을까?” 열 사람이면 아홉은 “이건 러브스토리가 아니잖아?”라고 반문할 것이 뻔해 보이는데, 감독은 왜 굳이 러브스토리로 선전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이성 간의 사랑보다 더 근원적인 참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혹시,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든, 친구 사이의 사랑이든, 그 모든 사랑이 지향해야 할 참된 사랑, 영원한 사랑, 진실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영화 포스터에 내세운 문구(카피), 즉 “이런 사랑도 있다”는 문구는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고 살아가고 있는 당신, 혹시 이런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반문하는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2.
종찬이라는 사람은 참 신기한 인물입니다. 그는 신애가 말하듯 ‘속물’입니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해 아무 개념이 없습니다. 카센터 사무실에 다방 여종업원을 불러 희롱하는 일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신애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가짜 상패를 만들어가지고 와서 손수 피아노학원 벽에 걸어줍니다. 신애가 “이게 뭐예요?”라고 묻자 종찬은 “이런 것쯤 하나 걸려 있어야 소문이 쫙 나가지고, 아이들이 많이 찾아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신애를 따라 교회에 나간 다음에 종찬이 하는 행동은 더 재미있습니다. 교회에 나가자마자 종찬은 주차 안내를 자원합니다. 원래 교회 봉사는 이렇게 처음 시작하는 분들이 잘 하는 법입니다. 어느 날 엉터리로 주차해 놓은 차를 보고는 쩔쩔 매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깔은 터져 나오고, 교회 앞이니 그 성깔대로 하지는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쌍시옷이 터져 나옵니다. 다른 데 같았으면 차를 몇 번 걷어찼을 텐데, 지나가는 교인들 눈을 의식하고는 몸만 비비 꼽니다. 그러다가 아는 선배가 와서 차를 몰고 사라지자, “언제, 소주 한 잔 사 주실랍니까?”라고 인사말을 던집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신애가 밀양 역전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전도하는 전도대에 참여하자 종찬도 거기에 가세합니다. 술친구들이 찾아와 그 모습을 보고 조롱을 하는데, 종찬은 아무 개념 없이 친구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며, “담배, 이기, 왜 이리 맛있나? 오늘따라 억수로 맛있네!”라고 말합니다.

신애가 하나님께로부터 배신감을 느끼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동안에도 종찬은 꾸준히 교회에 다닙니다. 잠시 누나를 보러 내려왔던 신애의 남동생이 차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보고, “아직도 교회에 나가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때 종찬이 하는 말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이렇듯 종찬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특별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도덕적 관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밀양으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신애가 “’밀양’이라는 말의 뜻이 뭔지 아세요?”라고 묻자, 종찬은 “뜻예? 어디 우리가 뜻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 기지예!”라고 답하는데, 그것이 종찬의 인생관처럼 느껴집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뜻’이니, ‘구원의 확신’이니, ‘제자도’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거의 습관적입니다. 

3.
그런데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쁘게 보려 해도, 종찬이 미워 보이질 않는 겁니다. 종찬이 걸어준 가짜 상패를 모른 척 그대로 걸어두고 있는 신애의 내숭은 얄미워 보이는데, 가짜 상패를 걸어주고 있는 종찬은 미워 보이지 않습니다. 남의 아픔에 함부로 끼어들며 “신애 씨 같은 불행한 사람은……”이라고 말하는 약국 김 집사의 행동은 우리를 낯 뜨겁게 만들고, 신애의 유혹에 부질없이 넘어가는 약국의 강 장로도 우리를 고발하는 것 같은데, 종찬의 행동은 가식이라거나 허위라거나 위선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여워 보일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에게 더 좋은 대답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종찬의 정직함과 순진함과 진실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종찬은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믿는 것, 자신이 느끼는 것,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진실했습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볼 꿈도 꾸지 않습니다. 신애가 자신을 향해 ‘속물’이라고 쏘아붙여도 저항하거나 화내지 않습니다. 속물이면 어떠냐는 식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입니다. 남들 앞에서 “하나님 믿는 것이 꼭 연애하는 기분이예요”라고 달뜬 표정으로 전도하는 신애의 가식과는 달리, 종찬은 교회에 나가는 이유에 대해서도 솔직합니다.

이 같은 투명성(transparency), 정직성, 순진성, 그리고 진실성이 종찬을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종찬의 모습이 이상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보아도 종찬에게는 좀 더 많은 발전이 필요합니다. 도덕관념도 좀 생겼으면 좋겠고, 교회에 나가는 이유도 점점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져가면서, 다방 아가씨에게 희롱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도 느꼈으면 좋겠고, 쌍시옷 언어들을 점점 어색하게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종찬은 이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럽습니다. 도무지 연극할 줄을 모르는 사람, 꾸밈과 가식이 없는 사람, 자신의 무식과 교양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생긴 모습대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화 속에서 종찬은 항상 신애 옆에 혹은 뒷자리에 서 있는데, 그것이 마치 연극에 빠져 살고 있는 신애와 현실에서 살고 있는 종찬을 대비해주려는 의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또 하나 종찬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그의 일관된 헌신과 사랑 때문입니다. 신애를 향한 종찬의 일관된 사랑에는 어떤 불순한 의도가 없습니다. 계산도 없습니다. 사실, 종찬이 신애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연애 기술에 있어서 낙제생에 속하는 제가 보더라도 참 딱해 보입니다. 40줄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노총각으로 지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뻔히 보입니다. 그렇게 생각 없이, 아무런 전략도 없이, 그냥 무조건 주변에서 맴도는 것만으로 한 여인의 마음을 사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종찬은, 아무리 밀어내고 외면해도, 배알도 없는 사람처럼 또 다시 헤헤거리며 신애 앞에 나타납니다.

이 영화가 러브스토리를 표방하는데 결코 러브스토리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싶습니다. 종찬의 사랑은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바치는 이성적 사랑치고는 특별합니다. 그의 사랑의 목적은 신애를 품에 안는 것을 넘어 서 있습니다. 신애가 행복해지는 것, 오직 그것에만 있습니다. 만일 신애가 다른 남자를 만나 좋아지게 되면, 그리고 종찬이 보더라도 그 남자가 자신보다 더 나은 남자인 것처럼 보이면, 그는 아쉽지만 물러서서 “행복하게 사시지예!”라고 말할 사람처럼 보입니다.

▲ "비밀이 있습니다." 신애와 종찬 사이에는 늘 Secret Sunshine이 있었다.

4.
이 영화에서 참된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교회 목사도 아니고, 전도의 열심으로 충만한 약국 김 집사도 아닙니다. 도덕관념도 희박하고, 제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는 종찬, 바로 그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그 한 모델을 보여줍니다.

종찬이 보여주는 사랑은 아무 조건 없이, 그 어떤 일에도 굴함이 없이, 일관되게, 계산 없이, 오직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동시에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의지와 감정을 존중하며, 그가 도움을 청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랑입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종찬은 신애와 늘 어느 정도의 공간을 두고 떨어져 있습니다. 종찬은 신애에게 무엇도 강제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그대로 하게 내버려둡니다. 그 모습을 두고 지켜보다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가까이 다가갑니다. 마음 같아서는 신애의 영역으로 넘어가 모든 것을 대신해주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줄을 압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돕는 것도 아님을 압니다. 그 거리를 유지하고 기다리는 것으로 인해 애간장이 탑니다만, 언제나 그 거리를 유지하며 신애 곁을 맴돕니다.

종찬의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종찬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는 동안, 제게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기보다는 ‘어리석은 아버지의 비유’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정서를 감안해 보면,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에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나에게는 아버지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설득하다가 지쳤는지, 둘째 아들 몫의 유산을 떼어줍니다. 그 아들은 유산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멀리 가서 방탕하게 살다가 거지가 되어버립니다. 그때 이 아들은 제정신이 들어,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니, 아버지께 돌아가서 사죄라도 하고 죽자”라는 심정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탕자가 생각했던 worst scenario는 아버지에게 맞아죽는 것이고, best scenario는 아버지 집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서 오고 있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반겨 맞아줍니다.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라고 명령합니다.

도대체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아는 옛날 아버지들 같았으면, 유산을 나눠주지도 않고 내쫓았을 것이며,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는 작대기를 들고 달려가 쫓아버렸을 것입니다. 아들을 쫓아 보내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면사무소로 가서 아들을 호적에서 지워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아버지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아주 이상한, 매우 어리석은 아버지상을 이 비유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일관되어 변함이 없고, 기다릴 줄 알며, 간섭하고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행하도록 버텨주는 사랑입니다. 심지어 타락하고 실패하는 것까지도 참아가면서 지켜보고, 그 모든 것을 통해 성숙하고 자라고 회복되기까지 버텨주는 사랑입니다. 때로 받은 상처로 인해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서 함께 아파하며 그 고통의 기간을 버텨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사람들을 사랑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5.
이창동 감독은 종찬을 이상적인 인물로 제시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를 통해 암시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닮았는지요!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을 어쩌면 그렇게도 빼어 닮았는지요! 이 감독은 특별한 종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사랑만이 신애가 당한 것과 같은 깊은 상처를 치유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신애는 남편을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잃은 깊은 상처를 어떻게든 빨리 치유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신애로서는 그 아픔이 너무 커서 그대로 안고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치유 집회에도 찾아갔고, 그래서 잠시 잠깐 찾아온 정서의 변화를 하나님의 치유로 성급하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상처의 치유에 대해 신애가 알았어야 할,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상처의 치유에는 그만한 시간과 아픔이 따른다는 진리입니다. 그 시간을 줄일 방도가 별로 없고, 그 고통을 줄여줄 방도가 별로 없습니다. 그 고통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나밖에는 아픔을 당할 사람이 없고, 그 고통을 줄일 다른 방도가 없으며, 그 고통은 충분한 시간이 지나야만 치유됩니다.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는 옛날 유행가의 가사는 참으로 통속적으로 보이지만, 정신과의사들이 하나같이 이 진리에 동의합니다.

최근에 베스트셀러로 많이 읽힌 <인생수업>이라는 책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처 입은 사람들과 함께 지낸 경험을 토대로 하여, 저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시간이 그 모든 것(상처)을 치유하리라는 사실입니다. 불행히도 치유의 과정이 언제나 직선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프의 상승선처럼 빠르고 분명하게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치유의 과정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온전히 자신을 회복해가다가도 갑자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역행하는 것 같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치유의 과정입니다. 결국 당신은 치유될 것이며, 온전한 자신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지는 못하겠지만, 그 상처를 치유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여행의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당신이 잃어버렸다고 슬퍼한 사람이나 사물이 결코 당신에게 소유된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로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88쪽)

따라서 상처 입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길은 그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함께 견뎌주는 것입니다. 종찬이 신애에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사람의 고통을 대신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아픔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약국의 김 집사는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상처받은 사람을 돕는 일에 아주 서툰 사람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자주 그런 잘못을 범합니다. 안타깝지만, 그 사람이 아파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버텨주는 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요 사랑입니다.

▲ 응급실에 누워 있는 신애의 머리카락 향내를 가만히 맡는 종찬.
6.
그렇다고 해서, 상처의 치유에 있어서 믿음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 생활은 마음의 치유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안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영적 생활이 자신의 상처를 잊기 위한 노력이 되며 당해야 하는 아픔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이 되면, 그것은 오히려 치유를 늦출 뿐입니다. 영적 생활은 우리에게 그 반대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영적 생활은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상처로부터 오는 아픔을 끌어안고 견딜 영적 힘을 제공해줍니다. 또한, 영적 생활을 통해 우리는 지금 당한 상실과 상처로 인해 우리의 생애가 끝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 상실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실과 상처에 붙들려 과거의 포로가 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해갈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통해 치유의 기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아픔을 면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은 신앙은 상처를 당했을 때 무심하게 견뎌내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지요! 그것은 마치 칼에 손을 베이고는 기도로써 그 상처가 빨리 아물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이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치유하십니다.

진리는 때로 잔인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다 당하는 상실과 상처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순식간에 상처를 치유 받고 아픔을 면제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랬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겠습니까? 하지만 진리는 또한 자비롭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과 하루하루 동행해나가면, 우리는 상처가 치유되는 동안 그 아픔에 짓눌리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대면하고 아픔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받은 상처 이상의 것을 보며, 우리가 당하는 아픔 이상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시편 저자처럼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119:71)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의미에 대해 궁금한 분들이 많은 것을 압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여운치고는 너무 모호한 여운을 남겨 주는 것 같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신애의 앞날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신애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생에 대해 홀로, 그리고 스스로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여자가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새로운 마음으로 뭔가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머리를 자르는 신애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될 것처럼 보입니다. 셋째, 거울을 본다는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애가 보고 있는 거울의 왼쪽 아래 구석에 작은 사진이 꽂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죽은 아들 준의 사진입니다. 그런데 신애는 더 이상 그 사진에 붙들리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보고 머리 손질을 합니다. 그만큼 치유되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때 종찬이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넉살 좋은 웃음을 웃으며, “내가 들어줘도 되겠지예?”라고 말하고는, 거울을 들고 신애의 얼굴을 비추어줍니다. 신애는 자세를 고쳐 앉아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종찬의 사랑, 종찬의 도움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의지와 감정을 100% 존중하면서, 늘 옆에 서서 도울 것이 없는지를 찾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신애가 강 장로를 유혹하다가 실패하고는 종찬의 집으로 찾아와 망가지려고 할 때, 종찬은 딱 한 번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역정을 냅니다. 하지만 종찬은 신애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주었고, 자신을 스스로 볼 수 있도록 앞에서 거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 사랑이 있기에 신애는 아직까지 생을 붙들고 있었고, 앞으로 회복될 희망이 보입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입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회복할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지금 마음의 깊은 상처로 인해 고통 받고 계십니까? 혹시, 과거에 받은 상처 때문에 아직도 아픔을 겪고 계십니까? 이미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문득 문득 시뻘건 상처가 그 모습을 드러내어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까?

영적 생활로써 얻는 믿음의 능력을 통해 여러분의 상실과 상처를 인정하고 대면할 힘을 얻기 바랍니다. 믿음의 능력으로써 그 아픔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견딜 만한 영적 힘을 얻기 바랍니다. 믿음의 능력으로써 인간적인 상실 이상의 세계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과거의 포로가 아니라 미래의 전사로서 전진해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리석은 아버지’ 같은 하나님께서, 마치 고통을 겪고 있는 신애를 저만치에서 바라보며 가슴 아파하며 견뎌주는 종찬처럼, 여러분이 고통을 겪는 과정을 아픈 가슴으로 지켜보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또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부모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고, 자식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배우자를 사랑하는 법에 대해서도 우리는 무지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며, 감정적이고, 변덕이 심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너무나 조급하여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내 뜻대로 상대방을 주조하는 것을 사랑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라는 허울을 쓴 욕심이요 폭행입니다.

사랑하되,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행하는 사랑! 사랑하되 내 욕심이나 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서 행하는 사랑! 상대방에게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해로워 보여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 그가 스스로 알아서 선택하고 결정하도록, 거리를 지키고 지켜보는 사랑!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시행착오를 함께 견디며 기다리는 사랑! 상처를 당하여 아픔을 겪을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곁에서 버텨주는 사랑!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일어설 때, 그 사람이 스스로를 잘 볼 수 있도록 앞에서 거울을 들어주는 사랑! 이 사랑을 우리는 얼마나 압니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긴다는 우리는 과연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압니까?

이 영화는 종찬을 통해, 믿음이 좋다고 자부했던 우리 모두에게 “당신들은 이런 사랑이 있음을 알고나 있습니까? 당신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랑으로 상처 입은 영혼을 한 사람인들 버텨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의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버텨 준 일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 모두가 정직하게 응답하고 깨어나지 않으면, 우리도, 양 손을 앞으로 내밀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낯간지러운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예배당 밖에서 홀로 고통스러운 씨름을 하게 내버려두는 잘못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왠지 하나님은 예배당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예배당 밖에서 종찬과 함께 계신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사랑의 주님,
저희가 사랑을 모릅니다.
저희가 사랑에 무능합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행하게 하소서.
오, 주님,
저희로 진짜가 되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의 연속 설교가 영화 '밀양'을 소재로 4주간 연재됩니다.
* "거울을 들어주라" 동영상 설교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