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의 여정을 거친 이들, 가나안 성도
출애굽의 여정을 거친 이들, 가나안 성도
  • 홍동우
  • 승인 2014.12.18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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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성석환 목사 '갈리리 성도' 담론에 대한 논박

양희송 대표의 역작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다시 프로테스탄트>를 통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던 양희송 대표는, 이번의 역작을 통해 자신이 제기한 이른바 ‘가나안 성도’의 담론을 점점 확대하고 있다. ‘가나안 성도’의 정의는 아주 간명하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안나가’를 외치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이에 대해 ‘도시 공동체 연구소’의 성석환 목사는 ‘가나안 성도’는 기성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영적만족을 누리지 못한채 교회 밖에로 존재하기로 결정한 책임감이 결여된 담론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러면서 정치사회학적 반성과 분석이 결여된, 전형적인 복음주의적 담론이라고 규정한 이후, ‘가나안 성도’가 아닌 교회의 후패함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궈내는, 복음서 속의 ‘갈릴리 성도‘의 담론이야말로 진정한 대안임을 주장한다. 과연 그의 말은 일리가 있을까?

그의 글을 읽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하다. 성석환 목사에 대한 답답함만은 아니다. 아직까지도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우리네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기의에 닿지 못하는 기호’에 머무른 현실을 마주하고 있자니 생기는 답답함이다.

▲ 성석환 목사(좌)와 양희송 대표(우)

"교회를 찾지 말고 교회를 일궈라"

사실 성경 속의 ‘가나안’은 출애굽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40년간의 광야생활을 전제로 한다. 어쩌면 성경 속의 ‘가나안’의 배경인 출애굽, 그리고 광야생활은 오늘날 ‘가나안 성도’를 해석하는데 중요한 모티프를 던져준다. 바로 ‘가나안 성도’로 자신을 규정짓기 전의 신앙적 삶과 거기서 유래된 결단의 무게를 한번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는 점이다.

양희송 대표가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가나안 성도는 꽤나 많은 류의, 그리고 많은 기간의 섬김과 봉사로 자신의 삶과 열정을 교회에 모두어 바쳤던 사람들이다. ‘제도권 교회’에서 쌓아낸 추억과 눈물, 그리고 땀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교회를 떠났다. 애굽에서의 부추와 파와 마늘을 그리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들도 분명 ‘제도권 교회’의 향수가 있을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나안 성도’로 거듭났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답변은 사람마다 제각각일테다. 따라서 본인의 이야기로 대신하려 한다. 3~4년전 본인은 온갖 신앙의 방황을 거쳐 새로운 교회를 찾고 있었다. 아니 당시에는 새로운 교회를 찾을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읽어낸 독서와, 신앙에의 분투로 일궈냈던 내 인격은, 교회사역자들에게 대부분 교회봉사를 위한 마른 장작 취급을 받았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청년층을 지도하던 사역자가 갖고 있는 자질과 독서력은 형편없었다.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신에 대한 권고와 사역자만이 가진 소위 영적권위로 위협해왔다. 막막했다. 도저히 다닐만한 교회를, 아니 함께 교회됨을 일궈나갈 교회를 찾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너무 굵어져버린 것일까?

따라서 그 가운데 나름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때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를 찾지 말고 교회를 일궈라.’ 그래 맞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작 20대 중반이였던 본인에게 옳은 말이긴 했지만 적합한 말은 아니었다. 누구와 함께 일궈낼 것인가? 그 '누구'가 없어 방황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럼 그런 ‘가나안 성도’였던 본인은 어떻게 제도권 교회로 귀환할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신학을 공부한 후 ‘파트타임 전도사’로 당당하게 귀환했다. 제도권 교회에서 한 청년이 교회를 일궈내는 방법은 그 방법 밖에 없었다. 다양한 방식의 개척 외에는 말이다. 만약 내게 소명조차 없었다면 어땠을까? 나 또한 지금까지 ‘가나안 성도’로 살아가고 있을테다.

"자본주의라는 '바로'로부터 출애굽"

예수는, 그리고 선지자들은 제도권에 의해 온갖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생길 적에, 항상 제도권의 권력자들을 비판했다. 그리고는 제도권의 권력자가 비판당하고, 배척당하는 사람들만의 공간에서 새로운 시작을 약속했다. 그 정점이 예수의 십자가 사역이기도 하거니와, 또 한편으로는 성석환 목사가 제기한 ‘갈릴리 교회’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갈릴리 교회’는 예루살렘이라는 기존 이스라엘 공동체의 변두리로 쫓겨난, 이른바 배척당한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갈릴리 교회’는 오늘날의 ‘가나안 성도’들과 일치한다. 그들이 정말 성석환 목사의 지적대로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가나안 성도’를 자처하였을까?

‘가나안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바로 자본의 꾐에 빠져버려, 하나님나라의 담론을 잃어버린 채 굳어져버린 제도권 교회의 탓이다. 그들은 마음도 주고 몸도 주었던 순정의 성도들을, 싸늘한 시선과 함께 ‘제도권 교회’ 바깥으로 몰아내고 있다. 핵심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제도권 교회’가 어느새 애굽이 되었다는 것이며, 자본주의라는 바로에 굴복해버린 애굽에서 도저히 못견뎌낸 이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성도’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런 과정 속에서 어떻게 참된 교회를 일궈낼 수 있을까? 답은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나안 성도’라는 현상은 분명 그 답을 찾아가는 수많은 길들 중의 하나일테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맛깔나는 비유를 한번 개작해본다. 들어보시라.

주일 아침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르다는 애써 치장을 하고 교회를 섬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씻지도 않은 얼굴로 예수를 맞이하고는, 마르다를 다분히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교회에서 봉사해야할 많은 일로 분주하여, 예수께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홀로 교회 가도록 보고만 있는 것을 그냥 두십니까? 저를 명하사 함께 교회로 가서 교회봉사를 도우라 하소서. 어서 빨리 하나님 나라를 일궈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주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구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나름 좋은 몫을 택했으니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과 학부생. 학생과 전도사의 경계, 부산과 대구의 경계, 보수적 기독교와 진보적 기독교의 경계, 인문학과 신학의 경계 사이에서 양자와 서로 대화하며, 갈팡질팡 방황하는 한 평범한 청년 전도사이자 경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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