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기 든 조선 처녀의 사진을 보았소
일장기 든 조선 처녀의 사진을 보았소
  • 전현진
  • 승인 2015.01.19 1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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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도쿄의 조선인들, 일본에서 발견한 한국 이야기

곱고 밝은 자태가 한 눈에 들어왔다. 분명 치마저고리였다. 청아한 조선 처녀였다. 그녀 손에는 ‘히노마루’(일장기,日の丸)가 들려 있었다. 흑백 사진에 억지로 색을 입혀 놓은 티가 역력했다.  하얀 미소의 조선 처녀와 검붉은 일장기는 무척 어울리지 않았다. 

도쿄의 고서점 밀집 지역인 진보쵸(神保町)의 한 골목, 쌓여 있던 오랜 잡지 더미를 무심히 뒤적이다 일장기를 든 조선의 처녀를 보았던 것이다. 우리 할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한 번도 뵌 적 없는 증조할머니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이 조선 처녀가 실린 잡지는 <사진주보> 제18호다. 제국주의 일본이 각지의 총독부와 군 공보부에서 보낸 온 사진을 모아 선전용으로 배포한 잡지다.  잡지 뒷편에 적혀 있는 표지 사진 설명을 번역하면 대략 이렇다. 

“초가을 반도에 펄럭이는 일장기는 경승지 조선에서 빛나 영원한 평화를 표징하고 있다. 8월 30일 일한병합기념일을 축하 하는 깃발로 반도 동포의 얼굴에 한 없는 안온함이 피었다. (하략)”

매주 수요일 발행되던 이 잡지는 '한일합방 기념일'을 맞아 조선총독부가 1939년 8월 촬영한 당시 조선의 모습을 담았다. 일제가 본격적인 태평양전쟁 준비에 앞서 중국 등에 싸움을 거듭하던 그 무렵이다. 조선의 처녀들이 성노예로 끌려 간 것도 이 때를 전후해서다. 이 조선 처녀는 한일합방을 자랑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얼굴이 되고 말았다. 이 밝은 미소 안에서 어두운 슬픔을 볼 수 있는 건 아마 우리네 조선 사람뿐이리라. 

도쿄의 골목에서 만난 조선의 과거는 이처럼 어두웠다. 기록과 보관을 중요하게 여기는 일본답게 진보쵸 서점거리에서 조금만 시간을 들여 발품을 팔면 관련 역사서 및 자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현지인들의 설명이다. 이 잡지를 판매하고 있던 서점은 일본의 국구주의 시대를 중심으로 군사 관련 서적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서점 곳곳엔 태평양전쟁 연구서와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자료들로 가득했다.

고서점 밖에도 우리네 역사의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도쿄 신주쿠의 한 구립도서관에는 메이지시대 거리에 뿌려진 호외들을 모아 정리한 자료집이 있다. 메이지(明治) 42년과 43년, 1909년과 그 이듬해의 두 가지 사건이 메이지 40년대에 해당하는 자료집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한일강제합병이다. 

▲ 이토오 히로부미가 저격당했다는 호외 © <뉴스 M>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이었다. 일본의 초대 총리를 지냈고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으며 근대 정치 제도를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 침탈에 앞장 선 그의 이름은 한국인들에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가장 익숙하면서도 증오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1910년 8월 한일합방 호외에는 일본 덴노(天皇)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서도 함께 뿌려졌으며, 당시 조선어 번역본과 함께 배포됐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이리 많다는 것은 글 쓰는 이들에게 축복이다. 다만 그 축복이 아픈 과거를 들추는 작업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기록에 남는 것만 역사로 기억된다. 기억된 역사만이 의미로 남아 현재에 질문을 던진다. 길거리를 다니며 만난 조선의 역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그저 길거리 서점에, 도서관 한 구석에 묻혀 있는 정도라면 우리네 역사라는 것이 아플 까닭도 없을 텐데 말이다. 울분을 토하고, 목소리를 높히려면 그에 맞는 기억의 노력도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역사란 그저 술 한 잔 기울이며 수다스레 늘어놓기에는 무겁다. 조선 처녀가 들어야 했던 일장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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