콥틱 기독교, 그 지난한 역사
콥틱 기독교, 그 지난한 역사
  • 김기대
  • 승인 2015.02.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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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이집트의 신속한 대응으로 IS의도 빗나가

ISIS의 잔혹성이 이집트 콥틱 기독교인 21명을 참수하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극에 달했다. 희생자 대부분 리비아에서 일하던 노동자들로 콥틱(Coptic) 기독교 지도자인 안바 에르미아는 희생당한 이들을 순교자로 공표했고, 이집트의 엘시시 대통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ISIS 거점을 폭격했다.

IS 대원들은 "모든 십자군들이여. 너희들이 우리 모두와 싸우려 한다면 너희들의 안전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너희들 모두와 싸울 것”이라며 “우리는 너희들이 오사마 빈 라덴 님을 수장한 바다를 너희들의 피로 얼룩지게 할 것을 알라 신에게 서약했다"고 말한 뒤 콥틱교도들을 참수했다. 그들의 만행을 종교전쟁으로 규정함으로써 수니파 국가들의 단결을 꾀하려 했으나 이집트의 신속한 대응으로 의도가 빗나가 버렸다.

이집트는 인구의  90% 정도가 수니파고  ISIS역시 수니파 원리주의 단체다. 때문에 이집트는 ISIS 대응에 미온적이었다가 콥틱 기독교인들의 희생에 대해 발빠르게 보복함으로써 서구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콥틱 기독교의 기원

이집트에는 약 10%의 콥틱 기독교인들이 있다. 콥틱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70인역의 출판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는 모든 분야의 최고 학자들을 배출했고, 그런 분위기에서 기원전 3세기 경 히브리어 성서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이 출판되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많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살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로부터 초기 기독교의 성립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던 셈이다.

기원후 74년 마사다 전투 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유대인들은 이미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했다. 이때 예루살렘계 기독교들도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와 이집트인들 사이에 기독교는 급속히 퍼져 나갔다.  이들 사이에서 그리스어의 알파벳을 빌려 쓰는 이집트말 표기법이 생겨났는데 이를 콥틱어(the Coptic language)라고 한다. 그리고 콥틱어를 쓰는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나면서 콥틱 기독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에 있는 콥틱 정교회 내부 전경. 미국에도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콥틱 교회가 있다.

콥틱 교회는 마가를 그 시조로 삼는다. 콥틱 교회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첫 기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 사건때 마가가 그 곳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로마에 있을 때 천사의 지시를 받고 이집트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마가는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9세기 마가의 유해가 발견되자 베니스의 상인들이 그의 유해를 베니스로 밀반입했다. 넓은 광장과 비둘기로 유명한 베니스의 산마르코 성당은 이러한 전설 위에 건축되었다.

단성설에 대한 오해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 이후 단성설은 이단으로 규정되는데 이번 참수 비극 이후 일반 언론에서 콥틱 기독교를 설명하면서 '예수의 신성만을 인정하는 단성론'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웨스트 민스터 교회사 사전은 단성론(Monophysites)을 "in Christ deity and humanity are fused into one entity,physis"라고 쓰고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한 본체 안에 섞여 있다는 것이다. 신성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니케아 회의에서 인정한 양성론은 신성과 인성이 각각 다른 본체에  속했다고 본다(.In Two natures, full humanity and full divinity).

콥틱 기독교도 정교회계 90%와 개신교계 10%로 구분된다. 이러한 신학적 차이 때문에 콥틱 기독교는 이슬람이 주류인 이집트내에서도, 주류 기독교 내에서도 늘 소수자의 지난한 길을 걸어 왔다. 하지만 기독교라는 이유로 친서방 정권 하에서는 나름 보호받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1992년 부터 1996년까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이집트의 정치인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는 콥틱 기독교인이었다. (부트로는 베드로의 이집트어다)

무바라크 전 대통령 축출 시위가 벌어졌을 때 무바라크=서방=기독교라는 인식을 가진 흥분한 일부 무슬림계 시위대들이 교회 건물을 공격하는 일도 있었으나 다른 무슬림 시위대들이 콥틱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고 나선 일은 타임지에서도 대서특필될 정도로 훈훈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집트의 정치가 불안한 상태에서 콥틱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11년 10월 교회의 방화 사건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인 기독교인들을 해산시킨다는 명목으로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했다. 이어 카이로에서는 시위도중 27명이 희생되었는데, 기독교인들을 직접 겨냥한 진압은 아니었지만 27명의 희생자 중 대부분이 콥틱 기독교인들이었다. 이 사건은 ‘마스페로 학살(Maspero Massacre)’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이집트의 발빠른 보복은 콥틱 기독교인들도 엄연한 이집트 국민임을 공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판해야 할 것은 IS의 잔혹성이지 이를 종교 분쟁으로 몰고 가면 오히려 그들의 전략에 말리는 것이 된다. 실제로 지난 2007년 4월 이라크 북부에서 이슬람 출현 이전의 종교인 야지디를 믿는 17세 쿠르드족 소녀가 무슬림 청년과 사귄다는 이유로 주민과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빠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구타당한 뒤 돌에 맞아 숨지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흥분한 수니파 무슬림들은 이라크 내 소수 종파인 야지디를 멸족 위기로 내몰았다. 반면 서방세계에서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콥틱 기독교인 소녀가 명예살인을 당하는 내용으로 둔갑돼 유포되기도 했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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