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는 남았는데 '민중'은 어디로
'물소'는 남았는데 '민중'은 어디로
  • 김기대
  • 승인 2015.03.03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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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고스케 고야마의 물소신학과 민중신학

일본 신학자 아라이 사사구에게 안병무는 "나는 한국 민중의 현실을 가지고 신학하는데 너는 그 장이 없구나.”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1970년대를 겪어온 안병무에게 한국의 현실은 신학하기 딱 좋은 현장이었다. 고문과 사법살인, 의문사, 여공들의 죽음 등의 현장에 비한다면 1970년대 일본은 저만치 앞서 있는 선진국이어서 신학적으로 성찰할 대상이 그리 많지 않았다. 반면 한반도라는 현장에서 안병무와 서남동 두 신학자가  7~80년대 한국 신학을 견인해 갔다. 그들로부터 오클로스, 암하레쯔 등을 배우던 청년들이 중장년이 된 지금의 청년들에게서는 QT와 CCM말고는 다른 것을 찾아 보기 힘든 것 같다. 현실은 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2015년, 한국에서 신학하기 좋은 현실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이렇다 할 신학을 찾아보기 힘들다. 민중은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핍박받고 있는데 민중신학은 연구실 안에서만 살아있는 것 같다. 남북문제, 세월호, 양극화와 청년실업, 환경파괴, 민주주의의 후퇴  어느 하나 신학적 관심을 벗어날만한 것이 없는데, 그리고 실제로 그 현장마다 기도의 소리가 사라진 것도 아닌데 뭔가 신학적으로  내세울만한 것이 없어 보인다.  

물소 신학

일본의 현장에서 출범한 신학은 아니지만 일본 신학자 고스케 고야마의 <물소 신학>(Water buffalo theology)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태국 선교사로 나간 고스케의 눈에 처음 띈 것은 농사짓는 모습이었다. 아시아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을 통해 고스케는 태국 농부들에게 복믐을 전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엉덩이까지 물에 차있는 상태로 소를 몬다고 상상하며 성경을 읽었다. 이렇게 성경을 읽다 보니 말씀을 현장에 맞게 재해석하고 새로운 말씀을 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는 것이다.

허리까지 물에 찬 상태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삶을 먼저 이해하고 그들의 질문과 고난에 대한 메시지를 찾는  삶의 현장에서 물소신학이 나왔다.  

1929년생인 그는 1961년부터 1969년까지 태국에서 선교사로, 태국연합신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1974년에 <물소신학>을 발표했다. 1980년 이후에는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물소신학>은 출판 25주년 기념으로 1999년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고스케는 2009년 별세했다.

고스케 재뿌리화라는 용어를 통해 기독교 사상이 태국의 상황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물을 옮겨 심는 것과 같이 다양한 지역을 옮겨 다니며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았던 살아있는 믿음의 씨앗을 그 본래의 토양에 심자는 의미다. 

고스케는  '몬순장마는 하나님을 젖게 할 것인가?'(Will the Monsoon Rain make God Wet? (개정판 20쪽 이하)라는 글에서 기독교의 역사관과 구원사건을 상승적 나선적(Ascending Spiral) 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순환적 자연관을 가진 태국인에게 '단한번'이라는 구원관이나 역사관은 받아들여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주적 순환 자체가 하나님께 그 기원이 있으므로 성경의 내용과 배치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고스케에 있어서 .토착신학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다기 보다는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그 위에 신학과 성서를부어 넣는 과정이다.

고야마는 아시아의 상황으로부터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원했으며, 하나님의 개념도 다음과 같은 4가지방식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 구원의 개념을 이 세상에서 비참여적인 것으로 보는 동양적인 근본적인 개념하고는 다르게 보면서 현재의 상황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감동적인 하나님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자연의 순환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동양적 구원의 개념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비윤회적인 면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셋째 하나님은 단순히 초월적이라기 보다는 현실가운데 하나님의 신성한 참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억압받고 버려진 자들과 함께 연대성을 갖고 삶의 예민한 부분과 함께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김영남, 물소신학 비평)

고야마의 제자인 종교학자 정경일 박사는 고야마의 별세 후 그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고야마 박사가 언어, 문화, 종교의 경계를 넘어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고난에 동참하려 했던 그의 삶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의 삶과 신학은 다음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립된 문화, 언어, 종교는 없습니다. 이 연결되어 있음은 생태학, 도덕, 신학의 양식입니다. 나는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물음에 단언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내 자매와 형제로부터 분리된 '나'는 없습니다."

 

민중은 어디로

<물소신학>이 이름이 독특한 이름 때문에 서구 신학계에 관심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민중신학은 해방신학의 아류처럼 여겨져서 서구 신학계에서 그리 생명력이 길지 않았다. 물론 서구 신학계의 반응이 있어야만 바른 신학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민중신학이 물소신학에 비해 신학적 영향력이 적었던 데는 민중신학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는 점도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 많던 '민중'은 다 어디로 갔을까?

첫째로 민중신학은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라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자 순진한 민초들은 그것이 곧 민중의 승리라고 쉽게 단정지어 버렸다. 민중신학의 배경이 되어 주어야 할 진보 기독교 인사들은 정치 사회로 진출했고, 산업선교의 대부였던 인명진과 강명순이 새누리당으로 가면서 그 정점을 찍었다. 김용민(국민 TV)은 <복음과 상황> 2011년 5월호에 강명순의 변신을 가리켜 '빈민의 대모에서 부자의 식모로 전락하나'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민중의 승리가 없는 상태에서 승리라고 확신하면서 당장 할 일을 잃은 민중신학은 연구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민중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담론들을 생산해 내었다. 그곳에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물소도 황소도 없었다. 고스케 고야마의 신학적 언어는 매우 절제되어 있으나 민중신학은 어려운데다 때론 필요 이상 과격할 때가 있다.

둘째로 복음주의권 교회의 성장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진보 기독교계는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의 등장을 너무 쉽게 봤다. 오랜 비주류 생활에서 주류가 된 듯 착각한 진보 기독교는 새로운 복음주의권 교회들로 진보 교회의 저수지 역할을 해왔던 지식인들이 이동해 가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진보교회들은 목회를 잃었고, 목회에 성공한 복음주의권 교회에는 새로운 인력  넘쳐 났다. 목회 없는 교회 또는 목회만 있는 교회에 짜증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소위 '가나안 교인'현상을 낳았다. 그런 점에서 '가나안 교인'현상은 복음주의권이 생산한 현상이 아니라 진보 기독교계의 산물이다. 결자해지의 입장에서라도 진보 기독교의 큰 축인 민중 신학은 이제 교회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셋째로 민중 개념이 모호해진 것도 한 원인이었다. 1980년대 경제 호황을 거치면서 동구권의 몰락을 경험하면서 계급 계층 개념이 다소 모호해 졌다. 학계에서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이 민중과 혼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기승으로 시대는 다시금 계급이 뚜렷해지는 시대로 변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다시 계급에 충실해야 한다. 

복음주의권을 우습게 보지 말고, 선교사 파송을 비판만 하지 말고 복음주의권이든 선교현장이든 들어가야 한다. <물소 신학>은 태국이라는 선교 현장에서 나왔다. 가톨릭 전통에서 출발한 해방신학이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의 오순절 교회들과 접점을 찾아가고 있듯이 민중신학은 세월호, 양극화 등에서 고민한 신학적 담론들을 삶의 현장과 교회 현장에 적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민중신학에서 민중이 사라진 현상이 안타까워서 드리는 고언이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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