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이들을 춤 추게 하는가?
무엇이 이들을 춤 추게 하는가?
  • 강남순
  • 승인 2015.03.09 0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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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주미대사의 쾌유 기원공연을 보며
▲ 강남순 교수 © <뉴스 M>

한 행사장에서 피습을 받은 주한 미대사의 쾌유를 비는 다양한 '공연'과 행사들이 있다는 뉴스가 보인다. 리퍼트 대사를 "사랑"한다는 플랭카드는 물론 난타, 발레, 부채춤까지 추며 한 기독교회의 신도들의 화려한 춤과 노래가 이어졌다.  "엄마부대봉사단" 이라고 하는 단체에 속한 사람들은 쾌유와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집회를 가지기도 했고, "청년학생 포럼"이라는 단체는 주미대사사 퇴원하는 날 까지 "기원단"을 설치하여 운용한다고 한다.

내 눈을 끄는 것은 이들 춤추고 노래하는 이들의 다수가 여성들이라는 ...점이었다. 피켓을 들고서 한 남성의  선창에 맞추어 맹목적인 반복적  구호를 외치는 그룹도 대부분 여성들이다. "000 목사님, 준비되었습니까"라며 피케팅을 시작하려고 하는 이는 남성이고, 그 주변에서 충실한 '보조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여성들이다. 나는 초봄이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 늦겨울에 시내 한 복판에서 하늘하늘한 여름옷을 입고 '발레'를 하는 집단의 젊은 여성들, '할렐루야'의 가사를 반복적으로 담고 있는 배경음악에 맞추어 부채춤을 추는 여성들--이 집단의 여성들을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누가/무엇이, 해야 할 일들도 많을 이 여성들에게 이러한 불필요한 과잉적 퍼포먼스를 하도록 하는 것인가?"

"왜 그들은 이러한 일들이 자신들이 믿는 신을 사랑하는 일이며, 자신들이 속한 한국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왜 이들은 그 공적 공간에서 여름에나 입어야 할 옷을 이 추운 날씨에 입으면서 까지 '공연'을 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나는 이들 여성들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빙산의 일부만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빙산의 90%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외면적으로 보면 저 "춤추는 여성들이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을 이렇게 만든 "보이지 않는" 요소들에 사실상 우리 모두는 공모자인지 모른다. 한국의 교육풍토, 정치-문화적 가치체제들을 보면 이러한 무비판적 행위들의 "악순환"이 어떻게 우리사회에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는가를 보게 된다.

"왜"를 묻는 것은 선생의 권위에 저항하는 "불순한" 학생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도자"의 가르침에 절대순종해야 생존하기가 편하다.
교회안에서 "왜"를 물으면 신앙없는 이라고 하는 질책을 받고, 기도를 더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받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신도"들은, 소수를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가부장제적인 "남성 지도자"들에 의하여 일방적 "가르침"을 받는다.
"왜-아니오"가 아니라, "녜-아멘"을 해야 모범적인 학생, 모범적인 아들/딸, 모범적인 회사원, 모범적인 종교인, 모범적인 애국적 국민으로 간주된다.

추운 날씨에 그 얇은 옷을 입고서 거리에서 춤추는 이들 여성들을 보며, 내가 마음 아픈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다. 가부장제적 사유와 가치체제를 "신적 질서 (Divine Order)"와 등등하게 생각하면서 남성중심적 세계관, 종교관, 관계맺기 방식을 반복하며 재생산해 오는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이들 여성들 속에서 "비판적 사유하기"는 그 작동을 멈추게 되는 것이다. 남성중심적 가치체제를 "내면화"하면서 이렇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 지는 것은, 강력한 가부장제적 사회에서 그들의 "생존의 테크닉"인 것이다. "할렐루야"에 맞추어 춤추는 것이, 신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지도자"들의 말에 "아니오"가 아닌,  "예"를 하는 것이 그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가정생활, 종교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있는 "생존의 테크닉"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 "춤추는" 이들을 단순히 비난할 수 없는, 비난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늘 물어야 할 중요한 물음중의 하나는 "나는 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는 것인가 (Why am I doing what I am doing)? 라고 강조한다. 인문학적 "배움"이란, 비판적으로 사유하면서 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며, 이 물음이야 말로 "비판적 사유하기"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물음은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누군가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세뇌당하고 조작 (manipulation)당하는 것으로부터 자신과 사회를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며, 이 삶에서 진정한 자기를 가꾸어 나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비판적 사유하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예"의 미덕만을 강조하면서 사유하기 자체를 통제하는 인식론적, 구조적 "악순환"의 고리에 조금씩이라도 균열을 내기 시작하는 것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어 져야 할 과제이리라.

강남순 교수 / Texas Christian University, Brite Divinity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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