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갑’을 향한 ‘을’들의 각축장
개신교, ‘갑’을 향한 ‘을’들의 각축장
  • 양재영
  • 승인 2015.04.04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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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천민자본주의와 천민복음주의의 오버랩

지난 26일(목) LA만나교회에서 국민일보 미주지역 창간을 축하하는 자리가 열렸다. 깔끔하게 차려진 식탁과 다양한 음식, 은은하게 반짝이는 금색 전단지는 이번 축하연이 소위 ‘좀 있어 보이는 자리’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열악한 미주지역 교계 언론사의 형편을 고려한다면, 28년의 노하우와 재력을 갖춘 일간지가 미주지역에 진출한다는 건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솔직히 직원월급 주는 것도 어려운 열악한 현실 속에 있는 교계언론을 생각한다면, 충분한 재력과 능력을 갖춘 국민일보에 거는 교계의 기대는 결코 적지 않다. 언론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냉혹한 비판을 받으면서도, 오늘도 동분서주하는 교계 언론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기 어렵다.

국민일보 창간식엔 남가주 교계의 대표적 원로 목사들과 각 기관 대표들, 한인 정치인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소위 교계와 정계를 대표한다는 그 사람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다만 ‘언론’이라는 타이틀의 힘이었을까?

국민일보의 대표는 한국의 일간지 대표를 지내다 ‘신문발전기금’ 2억여원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기소된 뒤 1심과 2심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받고 미국으로 넘어왔다. 젊은 나이에 굴지의 언론사 대표가 된 것은 그의 능력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혈통 때문일까?

 

“천민자본주의와 천민복음주의” 

지난 근대사회의 발전을 주도한 사회가치는 자유주의였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천민자본주의’ 윤리이다.

원래 ‘천민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독일의 막스 베버(Max Weber)가 생산이 아닌 투기를 통해 돈을 벌던 유대인 금융업자를 향한 용어로, 윤리의식 없이 돈만 추구하는 행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천민자본주의는 근대 이후 민주주의와 기독교정신, 2차 대전 이후의 공공복지제도와 노동조합운동 같은 ‘가치 운동’으로 일정정도 억제되어왔다.

하지만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에 의해 이러한 억제력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자유화’란 이름으로 정부규제는 축소되었고, 재벌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세상 자본을 싹쓸이해버렸다. ‘자본’ 앞에선 윤리도 가치도 쓰레기일 뿐이다. 과거 구조조정이란 명목으로 직원을 내쫓을 땐 악덕기업주란 혹평을 감수해야 했지만, 오늘날 수천명의 직원을 내쫓음으로 자신의 연봉과 회사의 이윤을 높인 경영자는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세상이 되었다.

미국 잡지인 롤링스톤스의 기자 맷 타이비는 자신이 쓴 책 <오 마이 갓!뎀 아메리카>(서해문집, 2012년)에서 “왜 월가에서 금융위기와 관련해 감옥에 간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골드만은 천재들의 회사가 아니라 범죄자들의 회사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의 결실이 아니라, ‘사기꾼 시대’의 정점이며, 미국 정부와 납세자들에게 착 달라붙어 뻔뻔스럽게도 우리 모두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 기업이다”라고 혹평한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도 호화호식하며 잘 살고 있다. 사기를 치든, 실형을 받든 ‘돈’이 많고 ‘이윤’만 높이면 예수님 대접을 받는 세상이다. 그래서 오늘의 사회는 ‘갑’이 되고자 하는 ‘을’들의 처절한 각축장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현실도 전혀 다를 바 없다. 한국교회를 둘로 나눈다면 ‘대형교회와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교회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하며 쓴웃음 짓던 한 목회자가 떠오른다. 복음의 본질이 ‘대형화’는 아닐진데 왜 한국교회는 여전히 대형교회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목회를 세습하는 수많은 목회자를 손가락질하고, 실형과 고소가 범람하는 순복음재단이나 사랑의 교회를 보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내심 그들을 동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개신교는 어느덧 복음은 값싸지고, 맘몬은 위대해지는 ‘천민복음주의’의 현실이 되어버렸다. ‘갑’을 향한 ‘을’들의 각축은 교계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부활절이 다가왔다. 교회는 형형색색의 부활절 계란을 만들거나, 부활절 행사 또는 연합새벽예배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분주하다. 성탄의 기쁨 못지않게 부활의 기쁨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는 점점 더 많아지고, 세련되고 고급스러워 지고 있다. 하지만 성탄절 못지않게 부활절도 자본의 영향으로 적지 않게 오염되고 있다는 비판도 곳곳에서 들려온다.

부활절을 축하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정신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는 ‘갑’을 동경한 ‘을’이 아닌, ‘갑’을 내던진 ‘을’의 삶을 고집했다. 그는 세속의 관점으론 중고 소형차 수준의 ‘나귀’를 모는 ‘을’의 인생이었지만, ‘천민복음주의’의 현장인 성전을 마음껏 뒤엎는 ‘도발’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갑’의 인생을 사셨다. 지금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더욱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양재영 기자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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