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길, 저항으로 나아가는 신비
목회자의 길, 저항으로 나아가는 신비
  • 김학철
  • 승인 2015.04.06 2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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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무한히 행복하고, 절대적으로 두려움 없으며, 항상 어려움 가운데에서

기독교, 특별히 프로테스탄트는 위기의 시기에 성서를 다시 읽는다. 마르틴 루터, 요한 칼뱅, 칼 바르트가 그러했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는 김재준, 안병무, 서남동 등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한국의 기독교의 위기, 아니 역사의 전환기에 성서를 새롭게 읽었고, 그들의 성서 읽기로 시대에 응답하였다. 이 땅의 기독교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는 소리가 높고, 그 목소리는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그 외부적 위기와 그에 대한 내부적 자성은 우리가 성서를 다시 읽는 배경이 된다. 성서를 다시 읽는다 함은 우리가 믿는 바와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성찰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한 신학자의 예언서 읽기 여정을 살펴보고, 우리의 성서 읽기의 자화상을 비교해 보려 한다. 또 독일의 신학자 도로테 죌레의 주된 논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우리의 목회적 현실을 진단할 것이다. 이를 통해 21세기 목회자상을 찾아가는 데에 일단의 도움을 얻고자 한다.

 

우리는 잠시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의 예언서 읽기 여정을 살펴보려 한다. 이는 단순히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 그의 예언서 읽기 여정이 우리의 성서 읽기 여정을 반추하고 점검할 수 있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보그는 엄격한 루터교 집안에서 태어나 서른 살까지 루터교회 신자로 살다가, 10년의 무신론적 시기를 거친 후 장로교 신자로 신앙적 성숙기를 맞고, 이후 예배 의식이 의전적이고 성례전적인 성공회에 속한 학자이다. 이런 그의 신앙적 전개는 그의 성서 읽기와 맞물려 있다.

▲ 낸시랭의 신학펀치 방송중인 김학철 교수(왼쪽)

1. 보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서른 살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미리 말한 사람이라고 배우고 알고 있었다고 한다. 곧 예언자란 수백 년 후에 있을 미래의 사건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이는 분명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특히 마태복음서의 ‘예언-실현’ 공식이 예언자들을 보는 틀이었다. 이런 예언들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명할 뿐 아니라, 성서가 진리이며 초자연적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고 보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성서를 비평적 눈으로 보기 시작한 이후 ‘예언-성취’ 공식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예언서를 보는 매우 특정한 방식임을 알게 되었다.

2. 보그의 예언서 읽기의 두 번째 단계는 대학 때 정치 철학 수업에서 찾아왔다. 그가 대학의 정치 철학 수업 시간에 접한 아모스 등은 웅변의 대가였고, 불온하고 설득력 있는 사회 비판가였다. 그로부터 예언자란 몇 백 년 후에 올 메시아를 예언하는 데에 온 힘을 쏟은 것이 아니라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세상의 죄와 불의를 향해 심판의 불을 내뿜는 개혁가임을 알게 됐다. 예언자는 고발하고 위협하는 신탁을 사회, 특히 이른바 지도층을 향해 거침없이 내뱉으며 자신의 온 삶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는 예언자적 행위를 한 사람이었다.

3. 1960-70년대 예언자를 읽는 두 번째 방식은 보그를 매료시켰다. 사회 정의를 향한 예언자의 열정, 반체제적인 그들의 메시지, 평화와 정의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사회가 직면할 결과에 대한 그들이 경고 등은 인종 차별, 베트남전, 이상주의 운동을 펼치던 시대에 적절해 보였다. 그러나 보그는 예언서를 읽는 세 번째 시기를 맞게 된다. 이는 그에게 다가온 신앙의 위기 때문이었다.

보그는 예언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이 없어도 그런 사회 비판적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른바 ‘비공개적 무신론자’, ‘장롱속의 무신론자’, ‘실제적 무신론자’, ‘기능적 무신론자’(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언서를 읽을 때에도 보그는 예언자들이 하나님 체험보다는 그들에게 내려온 전통 곧 성서적 전통을 상속받아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예언서는 하나님이 예언자를 만나주신 이야기 혹은 소명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너희가 무슨 권위로 그런 비판을 쏟아내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자신의 하나님 체험을 말해 주었다. 예언자들의 존재와 언어와 행동은 그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그들의 그 무모한 용기, 폭발할 듯한 외침은 하나님 체험에서 나왔고, 그들은 그 체험을 통해 ‘하나님에게 중독된’ 사람들이었다. 보그는 이러한 재각성을 통해 그의 세 번째 읽기에 도달했다.

또한 그는 예언자들의 고발과 비판이 무차별적으로 ‘원죄를 지은 모든 사람’을 향하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깨달았다. 예언자들의 고발 대부분은 지배와 착취 구조들을 조성하고 보존하는 데에 앞장 선 엘리트들을 향한 것이었다. 곧 예언자들은 모든 사람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지배 체제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세 번째 읽기에서 보그가 예언서에서 발견한 주요한 또 다른 사항은 예언자적 격려이다. 예언자들은 지배 체제를 비판하였지만 희망을 일으키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언어를 사용했다. 바빌론 유배 중, 그리고 후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비판의 언어와 함께 지배 체제의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민족과 개인의 희망을 새롭게 하고 활력 넘치게 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특히 제2이사야는 하나님을 부모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그릴 뿐 아니라 나아가 젖먹이를 키우는 어머니에다 하나님을 비교하기도 한다. 이는 절망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약속의 민족,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족속임을 일깨우는, 곧 정체성을 확인해 주고, 그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게 하는 격려이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신다는 확신을 거듭 선언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사랑을 알리는 데에 힘쓴다.

 

보그의 예언서 읽기의 세 단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 자화상과 그의 것이 부분적으로 겹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초기 민중의 희망으로 이 땅에 들어왔던 기독교는 교리주의화,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 교권화를 거치면서 근대 이전의 신화적 세계에 고착되었다. 민중의 온 삶을 향한 신앙이 아니라 ‘종교’라는 특정 영역 안에 안온하게 머물면서 해방 이후에는 남한의 자본주의 발전 논리에 따라 ‘종교’로서 급속하게 양적 성장을 누렸다. 양적 성장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판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체적으로 풍요를 누리게 된 보수적 색채의 교회들은 폐쇄적이고 몰역사적 신앙 문법만을 양산했다. 현재까지 이러한 양상은 계속되고 심화되어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도리어 시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해줘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보그의 두 번째 예언서 읽기와 유비되는 읽기 과정이 있었다. 우리가 앞서 거명한 김재준, 안병무, 서남동 등의 읽기가 보그의 두 번째 읽기에 유비될 수 있다. 물론 거명된 분들 모두 이른바 ‘예언자적 비판’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그들의 글에는 보그의 세 번째 읽기의 요소가 얼마든지 들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글, 그리고 삶을 통해 주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주목한 것, 그리고 당시 사회에 간절히 요구되던 바는 ‘예언자적 비판’과 예언자적 사회 참여였다.

첫 번째 단계가 모든 것을 교회로 집중시키는 구심력의 단계였다면, 두 번째 단계는 원심력 곧 교회 밖으로 나가는 힘이 작용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의 진취성과 과감성은 놀라운 것이었고, 한국 교회 뿐 아니라 한국 사회 역시 일단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교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원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그 힘이 때로 중심을 놓쳐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성의 시기가 20세기 말부터 찾아오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의 자기 돌아봄은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목회자란 누구인가, 성서란 무엇인가,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등. 은유하자면, 보그의 세 번째 단계의 읽기의 요구가 대두된 것이다. 보그가 새롭게 예언서를 읽기 시작한 것처럼 한국교회도 자신의 신앙을 조명하기 위해 새롭게 자신이 믿는 바와 성서를 읽어야 했다.

 

신앙의 근본 다시 돌아보기

보그가 세 번째 읽기 단계를 이끈 가장 결정적인 재발견은 예언자들의 하나님 체험 이야기 곧 소명 이야기의 재발견이었다. 예언자들은 사회적 비판에 열중했던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중독”된 이들이었다. ‘예언자들이란 하나님께 중독되어 생각하고 행동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심도 있고, 신중하게 사고하게 된 데에서 보그의 각성이 왔다. 이러한 각성 배후에는 보그 자신의 정체성 위기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보그는 성서를 읽으면서도 실제적 무신론자였던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어야 했다. 우리 교회가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것은 그러한 정체성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신앙 정체성의 핵심에는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독일의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서구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는 이유, 그 신앙이 활력을 잃은 이유를 ‘신앙의 근본에 놓인 경이로움, 황홀경, 걱정의 사라짐, 평화, 조화,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 안에서 삶의 비밀들의 조명, 이전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던 ‘새로운 세계’의 객관적 변화, 행복의 극치와 황홀경 등의 신비적 경험을 소홀히 한 데’에 있다고 진단한다. 서구 교회는 신앙의 근본에 놓인 신비적 경험을 복권하는 데에 활로가 있다. 더 이상 그런 경험들이 사소하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신앙의 활력은 돌아올 수 없다. 한 마디로 죌레는 “경험을 통한 하나님 인식”이라는 신비주의적 전통을 서구 교회에 되살릴 것을 주문한다. 이는 성서나 전통, 혹은 이성이나 교육을 통한 하나님 인식과 대비되는 것이다. 후자가 정규적, 교리적, 위계적, 남성적, 지성적이라면, 전자는 비정규적, 체험적, 비위계적, 여성적, 감성적이다. 이 신비를 여실히 파악하기 위해서 저자는 이데올로기 비판에 효과적이었던 “의심의 해석학” 대신 “배고픔의 해석학”을 택한다. 배고픔의 해석학은 이런 저러한 종교 전통을 기웃거려보는 유희적 관심이 아니라, 먹을 만한 신비적 빵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 빵과 해방을 향한 배고픔, 영성을 향한 허기짐, 무의미한 삶의 공복감, 소비지향주의의 인간이 빠져 버린 공허감 등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종교적 전통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고난과 희망을 담은 종교적 언어를 통해 그들의 경험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서구 교회에 대한 죌레의 해결책은 효과적이며 설득력 있다. 그러나 죌레 주장이 참으로 기여한 바가 신비적 경험의 일방적인 강조에 있지 않다. 죌레는 자신의 주장을 통하여 결국 신앙의 균형을 얘기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서구 교회는 성서나 전통, 혹은 이성이나 교육을 통한 하나님 인식에 경도되었다. 또한 신앙의 다양성을 정규적, 교리적, 위계적, 남성적, 지성적인 측면에서 재단하였다. 죌레는, 신비적 경험을 놓친 서구 교회가 하루속히 신앙의 균형을 찾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염려할 때 죌레의 균형에 대한 호소를 귀 기울여 듣는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해결책은 죌레의 제안과는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신앙양태를 살펴볼 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적 경험의 부족이 아니다. 도리어 신앙 경험(혹은 열광주의적 체험)이 너무 많은 것이, 그리고 그것이 너무 많이 강조되는 데에 우리 교회의 문제가 있다. 물론 종교적 요구나 촉촉한 신앙적 감수성은 우리교회의 매우 큰 자산이다. 그것은 단연코 폄하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서구 교회가 재빠른 머리에 빈 가슴이라면 우리의 모습은 뜨거운 가슴에(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금방 식어버린다!) 빈 머리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영성은 지성의 영성이다. 곧 신앙적 지성의 부족, 교회에서 성서와 교회 전통의 침묵, 신비의 이름 앞에 혹은 교회 성장이라는 이름 앞에 이성과 교육이 당하는 무시 등에 우리의 문제가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이른바 ‘영성’이 은둔을 가장한 도피, 이치에 맞지 않는 궤변, 열광적이고 기복적이며, 자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에 둘러싸여 있는 한, 그리고 이를 분별하고 수정하려는 신앙적 지성이 계속 침묵하는 한 교회는 맹목으로 간다. 지성과 신학이 건강하게 비판하지 못한 교회는 허탄한 경험과 교회 성장, 무분별한 세계 선교라는 넓고 많은 이들이 찾는 그 길로 내달음친다.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지성적 영성’은 결코 협소한 의미의 ‘지성적 영성’ 아니다. 곧 신학 교육, 교리 교육을 비롯하여 신학대학원의 커리큘럼을 다시 작성하자는 협의의 의미인 ‘지성적 영성’이 아니다. 그보다는 보다 광의의, 그리고 근본적인 지성적 영성, 곧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가려내는 지성적 영역을 뜻한다. 바로 그러한 지성적 영성을 회복하여 우리는 목회란 무엇인가, 목회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복음은 무엇인가, 신앙은 무엇인가를 해명하려고 매우 처절하게 노력해야 한다. 나는 그러한 물음에 진지하게 답변하며 목회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한국의 기독교가 다시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헌신해 온 하나님, 복음, 교회가 매우 참되고 옳으며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신앙의 참여 다시 돌아보기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설교해야 한다”는 칼 바르트의 권고를 다음과 같이 패러디하여 우리 교회의 현실을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찬송가를,” “한 손에는 성경의 교리적 읽기를, 다른 한 손에는 조중동을,” “한 발은 교회에, 다른 한 발은 이른바 진보적 시민단체 혹은 ‘좌파’ 정권 기관에,” “한 손에는 미국 성경을, 다른 한 발은 시청 앞 극우보수 집회에.”

교회가 사회 안에 존재하고, 하나의 사회적 실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정치, 사회와 관계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신앙공동체가 사회와 불가피하게 연루 된다면, 신앙공동체의 목회자들은 어떻게 공동체를 정치, 사회, 문화, 경제와 관련 맺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이에 충분히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저 소박하기 그지없는 답변이 제안될 것이다. 지면의 제한도 문제이지만, ‘교회와 세상(혹은 국가)’의 적절한 관계를 조망한다는 것은 교회사 전반을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선 기본적인 사항부터 점검해야 한다.

신앙의 근본을 다시 돌아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재확인하는 작업은 근본적으로 말해서 신앙이 알려주는 ‘참 현실’을 재점검한다는 뜻이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신앙의 현실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현실이 따로 있고, 그 안에서 세상과 구분되는 신앙인으로서 산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른바 현실과 신앙을 따로 구분하고, 그 신앙을 지키고 전개하며 사는 사람은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러나 참된 의미에서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말은 신앙이 알려주는 참 현실에 눈 뜨고, 그 현실을 생생히 목도하면서 가장 알맞게 산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사회 참여는 그러한 방식의 참여, 곧 우리의 신앙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감은, 곧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사회에 참여함은 대부분의 경우 이른바 기존 세상에 대한 ‘저항’과 ‘변혁’의 길을 걷게 한다. 이는 죌레의 신비주의 연구의 결과이기도 하다.

죌레에 따르면 신비주의자들은 자연적 본성을 가혹하게 짓누르고,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자신을 학대하며, 다른 이들을 돌보지 않는 내면성에 치우치고, 기쁨보다는 의무에 집중된 삶을 살지 않았다. 도리어 신비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 및 다른 이들과의 사랑을 통해, 고난을 뚫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는 공동체 속에서 기쁨으로 체험된다. 신비주의자는 세상과 몸을 긍정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의 고난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세속적 경험과 분리되지 않는 기쁨을 발견한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려는 신비주의자들은 현대 사회의 저항자들이다.

죌레는 우리가 “1989년 이래로 단일화되고 지구적으로 기계화된 경제 체제 안에 살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신앙인들마저 “지구화 더하기 개인주의화”라는 감옥에 잠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성서적 신앙은 경제적 세계화 및 그것과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상업적이고 소비향락적이며 경제중심적인 인간의 개인주의화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라고 고무한다. 우리의 신앙은 ‘나’를 버리고(무자아), 더욱 가난하게 되어(무소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비폭력)에게 구원의 길이 있다고 선언하는 것인데, 이는 현대 사회가 ‘현실’이라고 말한 그 감옥으로부터 출애굽을 명령한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곳으로 가서, 자발적으로 가난해 지며 살아 있는 모든 존재와 연대하여 감옥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 우리 교회가 예수를 따를 때 지어야 할 우리의 십자가이다. 죌레의 인용에 따르면 “우리의 무기는 아무 무기도 갖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강한 것이라는 유혹에 휩쓸리지 않을 때 유혹을 이긴 예수의 길이 있다. 죌레는 그 예수의 길을 걸어간 신비가들, 곧 톨스토이, 다그 함마슈트, 아씨시의 프란시스, 존 울맨, 도로시 데이, 헨리 데이빗 소로,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등의 글들을 인용하고 동의하며 새롭게 설명한다. 죌레가 말하는 ‘신비적 기독교’는 “무한히 행복하고, 절대적으로 두려움 없으며, 항상 어려움 가운데에서” 하나님이신 조용한 외침을 듣고, 그 조용한 외침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도로테 죌레가 풀어놓는 신비와 저항의 언어는 세계화 속에서 천박해질 대로 천박해진 일단의 ‘기독교’와 소비주의적 개인주의에 갇혀 작아질대로 작아진 ‘신앙인’에게 매우 깊은 영감을 준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 때 부딪히는 세상과의 대결을 예수의 십자가에서 미리 보았고, 십자가가 부활로 이어진다는 것을 매주일 강단에서 외치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우리가 외치는 그것을 실제로 믿느냐 마느냐일 뿐이다. 아니, 우리 눈에 무엇이 참 현실로 보이느냐이다.

 

우리 목회자들은 “무한히 행복하고, 절대적으로 두려움 없으며, 항상 어려움 가운데에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나서는 이들이다. 우리는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확신한다.

 

김학철/ 연세대 신학과 교수 

이 글은 제14차 한국기독교장로회 21세기목회협의회(2008년)에서 행한 "교역자, 그는 누구인가?"라는 주제 강연으로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것을 허락을 받아 옮겨 싣습니다. 김학철 교수는 지금은 종방된 CBS의 '낸시랭의 신학펀치'에서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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