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표절은 왜 보수진영에 많은가
설교 표절은 왜 보수진영에 많은가
  • 김기대
  • 승인 2015.04.15 12: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예화 돌려막기'와 '감성팔이'는 이제 그만

표절자를 뜻하는 영어 ‘plagiarist’는  라틴어 ‘plagiarius’에서 나왔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노예를 훔치거나 자유민을 노예로 삼는 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미국의 판사 리처드 앨런 포스너의 말이다.

표절이 남의 것을 훔치는 행위라는 사실은 어원에서부터 드러난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표절시비도 그치지 않는다. 영화, 드라마, 가요, 공연 구성 등 모든 분야에 훔치는 행위가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의 가장 큰 시비거리로는 오정현 목사의 박사 학위 논문 표절이 있었고, '강남스타일'로 초대형 가수가 된 싸이의 콘서트가 김장훈의 콘서트를 베꼈다고 해서 두 사람 사이의 오랜 우정에 금이 가기도 했다. 태권도 국가 대표 출신 문대성은 박사학위 논문 표절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 

최근 표절 시비가 된 목사의 기사를 게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데스크에서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다. 표절이 확실하지만 당사자가 시인을 했고, 교회 차원의 징계가 있었고, 본인이 깊은 반성의 뜻을 보인 후 교회에 복귀한 상태에서 굳이 기사를 실어야 하느냐에 대한 실랑이였다. 그래도 경각심의 차원에서 실어야 한다는 '강경파'와 넘어가자는 '온건파'사이에서 결국은 온건파의 입장이 편집에 반영되어 기사는 사장되고 말았다.

이처럼 설교에서도 표절시비는 그치지 않는다. 한국 목사들만큼 많은 설교를 해야 하는 사람들도 없다. 일주일에 최소 서 너 편 이상의 설교에 쫓기다 보면 다른 이의 설교집에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해 <기독교 사상> 편집장을 지낸 한종호는 “한국 교회의 영적 성장이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며, 보다 진지한 영적 고뇌와 신앙 성장의 고투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자신을 온통 거는 노력을 하는 이가 드물다”며 “바로 이러한 노력에 설교자들이 자신을 바치며 헌신하지 않을 때, 설교의 표절과 복제는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며 한국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좀 먹게 되고 말 것이다”고 진단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두루뭉술하다.

한국 교회 시스템상 진지한 영적 고뇌가 거의 불가능할 뿐 더러 표절설교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른바 '영적'고뇌를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는 보수 진영 또는 복음주의 진영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보수진영에서 표절이 많이 일어난다는 전제는 충분히 반론이 가능한 부분이다. 한국 또는 미주내 한인교회에서 에큐메니칼 또는 자유주의라고 자신있게 스스로를 명명할 수 있는 목사들은 많지 않다. 보수진영이 수적으로 우세하고, 표절의 시비에 엮이는 목사들은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의 (보수적) 교회를 맡고 있으므로 당연히 눈에 띄는 통계적 현상을 놓고 보수 진보로 나누는 것은 억지라는 반론을 충분히 감수하겠다.    

하지만 한국 보수의 수준을 보면 '표절하기 딱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보여진다.


첫 번째로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명제 신학을 선호한다. 

전통적인 신학은 명제적(propositional) 으로 설명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명제를 놓고 설교하면서 묘사(describe)하기 보다는 설명(explain)하려 든다. 명제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다 보면 웬만한 이야기꾼이 아니면 설교가 지루해지기 십상이다. 결국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한계를 느끼게 되고 팀켈러와 같은 탁월한 설교가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다. 본지에서 다루었던 표절 설교자 모두 팀켈러의 설교를 베껴 왔다.

팀켈러의 유명한 "설교자는 성서를 석의하고, 우리의 문화와, 인간의 마음(human heart)을 석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는 말은 "청중들의 마음 깊은 곳을 파악하고 성서 내러티브로 이끌어 나가면서 그곳을 채워준다"는 의미라고 미주 장신대의 계지영 교수는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명제'를 '이야기화'하는 것은 쉽지 않기에 설교자들은 쉽게 유혹을 받는다.

예를 들어 본지가 게재하지 않기로 한 모 목사의 지난 설교 제목들을 보자. (표절한 설교는 교회 홈페이지에서 삭제된 상태다).  '때가 찼고', '부활의 소망과 능력', '그리스도의 십자가, 다 이루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등이다. 이런 류의 제목으로 설교를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 나가는 데는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 지금 회중이  2~3시간씩 계속되는 찰스 스펄전의 설교를 듣던 그 회중이 아닌데 지루한 설교를 무조건 들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 스토리 텔링이 막히면 '예화 돌려 막기'라든가 '감성팔이'로 가기 쉽다.

명제를 이야기식으로 전개하다가 한계에 부딪히면 장경동 목사의 그 유명한 '삼위일체론'처럼 이단적으로 흐를 수도 있다. 장경동 목사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직장에서는 사장님, 집에서는 아버지'라는 양태론적 원리로 설명해 한때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단시비에 잠시 휘말렸지만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두 번째로 설교를 통해 사회 문화적 현상을 분석하는 능력이 보수진영 목사들에게 많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국의 성공회 평신도 신학자였던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 1875-1941)은  "가장 타락한 종교가 천상의 이야기만을 하고, 가장 건강한 종교가 이 지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천상의 이야기를 하기 좋아한다. 천상의 이야기를 적용하기 위한 지상의 이야기에 내려와서는 사회문화적 현상을 제대로 분석할 준비가 부족해 지상의 이야기를 '가족', '교회', '건강', '성공'에 국한시켜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다 보면 매일 계속되는 설교에서 보다 자극적인 지상의 이야기를 찾게 되고 다른 이의 설교에 사용된 예화의 주인공 '철수의 위암'이 '영희의 유방암' 으로 슬쩍 바뀌거나 신문을 읽어주는, 그것도 보수적 설교와 맞는 보수 언론의 논조를 대변하는 설교로 흐르기도 한다. 복음의 관점에서 신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의 논조로 복음을 읽는 목회자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결국 지상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준비가 안 된 목사들이 표절의 유혹을 쉽게 받는다. 이블린 언더힐은  '지상의 이야기'를 강조했지만 <신비주의>라는 책을 통하여 '일상의 신비주의'라는 개념을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언더힐이 정리한 신비주의의 특징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언더힐은 머리만큼이나 가슴을 강조했다. 그것은 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열정’이다. 둘째, 그는 신비주의를 실천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관한 것이며, 자신의 이웃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행동에 관한 것이다. 셋째, 그는 신비주의를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누구나 이 신비주의의 길을 붙잡고 걸을 수 있다.

원문 : Jane Shaw, http://goo.gl/3J4h3, 번역: 주낙현 신부

지상의 이야기라고 해서 세속적인 결론을 얻으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지상의 이야기라는 개별 내러티브에서 신비를 찾을 수 있는 설교는 그 '개별성' 때문에 표절의 유혹을 원천적으로 받지 않게 된다. 오히려 천상의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지상의 성공으로 결론 맺는 설교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노출되어 왔는가!

 

세 번째,  미래를 표절하라(?)

명제설교는 텍스트 안에만 머물러 버리는 경우가 많아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예를 들어 희망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인데 희망은 종말론과 함께 간다. 그런데 이것 역시 치열한 성찰이 없으면 말세론이나 재림론이라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풀어 이야기하면 ' 미래를 미리 사는 연습'이다. 그런데 종말론 설교에서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프랑스의 피에르 바야르(파리8대학 교수)는 <예상 표절>(여름 언덕,2010년)이라는 책에서 전 세대 작가들이 다음 세대 작가들을 미리 표절했다는 다소 엉뚱한 발상을 전개한다. 고대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훗날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이론화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미리 표절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빅토르 타우스크가 “프로이트의 뇌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 아이디어를 표절”함으로써 프로이트보다 먼저 개념과 이론을 제출했다는 황당한 주장도 있다.

이런 역발상은 뛰어난 작품들은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천년 이후에 나타날 사상이나 문화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작가의 생각을 담고 있다. 지금의 컨텍스트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지만 그것은 먼 훗날에 조금 더 세련된 모습으로 학계나 문화계에 얼굴을 내밀 작품들을 예상하고 그것들을 표절했다는 말이다.

표절이라는 말은 모두가 피해야 할 단어이지만 '예상 표절'은 설교가들이 새겨 들어야 할 역발상이다. 지금의 설교가 과연 미래(궁극적으로는 종말)를 미리 예측하는 상상력이 담겨 있는 설교인가? 우리는 미래를 제대로 표절하는 설교를 하고 있는가? 오래 전 '여자'와 '흑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을 때 극소수의 앞선 설교가들은 미래에는 여자와 흑인이 사람인 사회가 올 것을 '표절'하고 소수자의 해방을 위해 설교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보수적 설교가들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커녕 말세론으로 흐르거나 어줍잖은 도덕주의나 과거 회귀주의로 돌아가곤 한다. 

영화용어 중에 오마주(Hommage)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어로 "존경, 경의"를 뜻하는 이 단어는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감독의 작품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 작품의 일부 장면이나 모티브를 따오는 연출기법을 의미한다. 이것도 일종의 표절인 셈인데 오마주를 바치는 감독들은 그것이 아무개를 향한 오마주라고 이야기한다.  이 행위에는 그 감독에 대한 존경도 있지만 "내가 아무개 감독을 존경해서 이 장면을 이렇게 만들어 보았습니다"라는 자신감의 표출이다, 본래 장면의 의미를 잘 살려서 내 영화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야 말로 원래 감독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설교는 명망가 아무개의 설교를 오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야기를  오마주해야 할 것이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