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슐러를 보내며
로버트 슐러를 보내며
  • 백승배
  • 승인 2015.04.21 07: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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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20일 수정교회에서 장례식 성대히 열려

번영신학의 대명사인 로버트슐러 목사의 공개 장례식이 20일(월) 가든그로브 수정교회(Crtystal Cathedral)에서 열렸다. 수천명이 운집한 가운데 호노룰루 제일장로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 of Honolulu) 댄 천(Dan Chun) 목사의 기도로 시작된 의식은 로버트 슐러 목사의 딸 세일라 슐러(Sheila Schuller Coleman)와 아들 로버트 슐러(Robert Anthony Schuller)의 가족사 이야기와 함께 엄숙하게 진행됐다.

슐러 목사는 1926년 아이오와주 알톤(Alton, Iowa) 태생으로, 1970년 TV 설교 방송 ‘능력의 시간’(Hour of Power)을 진행하면서 수백만의 시청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적극적) 사고’(Possibility thinking)로 유명해졌다. 2006년 수정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가정 불화가 심화되었고, 급격한 교세 감소에 따른 재정난으로 2010년 파산 신청을 해 교회 건물은 가톨릭의 오렌지카운티 교구에 매각됐다.

그는 2013년 식도암 진단 후 투병해 왔으며, 지난 2일 향년 88세로 요양시설에서 숨졌다. 본지는 연합감리교회 은퇴목사인 백승배 목사가 로버트 슐러의 장례를 맞아 쓴 글을 소개한다. - 편집자 주

▲ 호노룰루 제일장로교회 댄 천 목사가 오픈닝 인사를 드리고 있다 © <뉴스 M>

로버트 슐러 목사의 장례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성공을 꿈꾸는 목사들의 선망이었고 번영복음의상징이었던 슐러 목사는 자신이 세운 교회(그러나 지금은 다른 이의 것이 되어버린)를 빌어장례식을 치렀다.  알테시아의 요양소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던 그는 성공한 목사인가, 실패한목사인가?.

로버트 슐러는 1926년 알톤 아이오아에서 더치의 후손인 어머니 제니와 아버지 안소니 슐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개혁을 꿈꾸고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에 자리잡았던 청교도의 후예다. 아이오아 농장에서 성장하며 슐러는 뉴커크 고등학교 졸업한다. 그 후  역시 더치 이민자들이 세운  호프 대학에 입학, 1944년을 졸업하고 1950년 죤 칼빈의 신학과 실천을 따르는 홀랜드 미시간의 웨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미 개혁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일리노이스주의 리버데일에 있는 아이반호 개혁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55년 캘리포니아주로 떠났다. 그의 큰 꿈의 시작이었다. 가든그로브의 드라이브인 교회와 다른 한 편 침례교회 건물을 빌려 목회를 했다. 한 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의 큰 비전은 드디어 “능력의 시간 (Hour of Power)과 수정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결국 그의 '비전이 몰락하는 것을 보고 말았다.

슐러의 꿈 시작과 메시지

다섯 살 나던 해 그의 삼촌이 심어준 전도자의 꿈은 허황된 꿈이 아니었다. 삼촌은 아이오아 농부의 아들인 조카에게 전도자의 꿈을 심었고, 그 씨가 성장하여 그는 신학을 공부하여 개혁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하며 계속 성장하는 꿈을 꾸었다. 성장하는 교회를 위하여 그는 비기독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메시지를 선택했다. 비기독인에 초점을 둔 것도 허황된 꿈은 아니었다. 그의 꿈의 성취를 위해, 그는 인간은 죄인임을, 저주받을 죄인임을, 또한 용서받는 죄인임을 선포하는 대신 최선의 나를 실현하기 위해 자존감을 심어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택했다. 최선의 나를 꿈꾸게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자존감을 심어 상처를 치료하여 건강한 삶을 찾고, 해방감을 갖게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그가 낳기 전에 세계 1차 대전이 있었고, 그가 어릴 때 경제공항이 있었고 그가 고등학교 시절 미국은 2차 대전에 휩쓸렸다. 그가 살면서 목양한 20세기는 상처가 많은 사회요 경쟁이 심각한 사회였다. 여기 저기 상처받고 실패한 사람들이 위로와 격려를 필요로 하는 사회 성장을 꿈꾸는 사회였다. 그들을 그리스도로 인도하기 위해 긍정적인 설교, 성장과 번영을 꿈꾸는 설교를 했다.

또한 기독교는 예수에게 여러 모습이 있는 것 같이, 교회의 얼굴 역시 다양했고, 미국기독교는 더욱 그러하였다. 이들 모두를 아우르기 위해 그는 포괄적 설교를 택했다. 제시 잭슨 목사와 시카고의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그는 그의 기본적 신학적 입장을 피력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적 주요 구세주임을, 두 번째는 긍정적 사고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큼 중요함을, 세 번째는 성령의 실재를 믿고 기도와 성령의 열매를 위한 기도를, 네 번째는 성령의 열매와 그리스도의 실재와 긍정적 사고는 만인을 행제된 세계로 이끈다는 것을 피력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전통적 성서적 접근보다는 포괄적 조직 신학적 자세로 접근하였다. 또한 자존감의 회복을 위해 심리학적, 정신적 자세를 견지, 프로이드, 애들러, 아브라함 모슬로, 빅토르 푸랭클을 아우르는 자세로 청중들을 인도하여 변화를 모색했다. 그의 꿈은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었다.

슐러는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인간의 중심을 바꾸려 하는가?  당신은 사람에게 가서, 당신은 반역자요, 더럽고, 부패한 죄인이라고 말하려는가?" 슐러는 외친다. ”아니”라고.

신학교에서는 그는, 첫째, 인간은 참혹한 죄인이라고, 둘째, 그들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셋째, 그들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들려주라고 배웠다. 또한 하이델버그 지침서는 1. 인간의 죄와 참혹함의 크기와, 어떻게 예수께서 구원하실 수 있는 것, 3.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표할 수 있는가를 전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으나 슐러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고 믿었다. (Robert Schuller,  Michael & Donna Nason, 1983)

그리고 그 나름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방법으로 긍정적 사고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했다. 그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놀만 빈센트 필 목사를 그의 교회에 초청하여 토크쇼 스타일의 예배도 드렸다.

문제는 방법론이 아니라 신학의 문제다

그의 이런 방법론이 문제였나? 아니다. 비기독자에게 접근하려는 그의 포괄적, 긍정적, 적극적 전도의 방법론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신학이 문제였다.

그는 말한다. “죄는 행동이전의 상태이다.” 그리고 슐러는 기독인과 비기독인이 하느님과 그들의 꿈을 믿는 것을 통하어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격려한다. 그는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꿈꾸면, 당신은 할 수 있다 (If you can dream it, you can do it!"

슐러 목사의 꿈, 그가 세우고자 하는 큰 꿈은 예수를 전파하기 위한 꿈인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기독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으로 긍정적 사고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하여 그 꿈의 성취를 그는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젼을 이룩하기 위한 욕심이 그를 얽맨 것이 아닌가? 욕망에 눈이 어두어 그도 불완전한 인간이요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 정신을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잊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신학교에서 그의 신학은 “유행신학” (Pop Theology) 이란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현명한 방법론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샀고 그 나름의 성공을 이루었었다. 그는 자진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말로, 연기로 효과있게 전달하는 천재였다.

다트머스 칼리지 아메리카 종교역사 교수인 랜달 바머는 평한다. “그것은 잘못된 신학일지 모른다. 그러나 빛나는 마케팅이었다.” (It was a bad theology. But it was a brilliant Marking.) 본회퍼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값싼 은총”의 판매원일지 모른다. 그러나 잘못된 신학일지 몰라도 그는 사람들에게 위로도 희망도 주었기에 한 때 큰 일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긍정적 설교, ‘할 수 있다’ 의 설교로 많은 사람들을 모았고,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게하는 천재였고, 모금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돈 있는 자의 환심을 사 역사적인 건물을 건축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는 저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는지 모르지만 많은 대형교회들처럼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어 섬김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룩하는데는 실패하여 파산했다. 그는 예수의 중심 메시지, 하느님 나라의 꿈을 잃어버렸던 것이 아닐까?

▲ 로버트 슐러의 딸 세일라 슐러의 가족사 © <뉴스 M>
▲ 로버트 슐러의 아들 로버트 앤소니 슐러가 가족사 도중 울먹이고 있다 © <뉴스 M>

예수의 복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것이 예수의 중심 메시지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우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누가 4:18-19)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심은 ‘하느님 나라’ 와 ‘해방’ 이다. 예수 안의 성공은 “예수 안의 사람됨” 이다. 거듭남이다. 그의 실패는 사람의 실패다. 그 자신과 그 가족 모두가 죄인임을 망각한, 아니면 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임을 가볍게 생각한데서 온 실패다.

그의 실패는 자존감을 너무 중하게 여겨 크리스마스의 영광 (The Glory of Christmas) 과 부활의 영광(The Glory of Easter)을 강조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Crucifixion) 의 진수를 망각한데 있다.

이 세상엔 겉으로 말하는 성공보다 화려하지 않아도 예수 안의 정의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있어 이 세상은 아직도 안전한 세상이요 살만한 세상이다.     

로버트 슐러는 하느님 나라 (Kingdom) 아닌 보이는 물질왕국 (Thingdom)을 전파하는데 공헌했던 것은 아닐까? 슐러가 땀흘려 이룩했던 수정교회는 슐러 교회도 아니고, 가족의 교회도 더욱 아니다. 그러나 수정교회가 대형화 되며 이미 가족은 거기에 기생하려 슐러화 되어갔고, 파산의 길을 가고 있던 것은 아닐까. 말년에 지도자의 세습을 통하여 슐러화를 이어가려다 2년만에 아들 담임 목사를 딸로 교체하여 전통을 이어가려 했지만 결국 그리스도 교회가 아닌 슐러 가족교회처럼 되어 파산의 길에 이른다.

오늘날 우리 모국에서도 대형 혹은 중형교회를 가족에게 세습하는 일이 허다하다. 욕망의 노예들이다. 구약시대로 돌아가는 행태다. 돈이 오고 가기도 한다. 그들도 그를 따르는 신자들도 문제를 직면하기보다, 확인해 주고, 변화보다는 현상유지에 눌러 않고, 동의하지 않아야 할 일도 침묵 혹은 참여로 동조함으로 하느님 나라가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더디게 할 뿐 아니라 이 땅을 더욱 혼돈케 하는데 가담하고 있다.

수정교회의 몰락은 그리스도 교회에 큰 경종을 울린다. 어느 교회도 개인화 해서는 안된다. 복음에서 “꿩 잡는 것이 매이다” 라는 방법은 배제되어야 한다. 신학도 옳아야 하고, 신앙의 실천도 정도를 가야한다. 언제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눈을 뜬 것처럼 예수와 동행해야 한다. 개인을 넘어, 가족을 넘어,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렇게 예수처럼 기도하며 행동하며 살아야 한다.

백승배 / UMC 은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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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현실 2015-04-22 11:54:24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긍정의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말씀에 기초가 없는 긍정은 일반 점쟁이나 무당이 전해주는 긍정과 다른 게 무엇인가? 그래서 결국 로버트 슐러가 인기를 얻은 긍정의 힘이 남겨 좋은 것은 결국 슬프고 비참한 말씀이 존재하지 않는 복음의 깊이가 없는 번영신앙이라는 장르를 더 깊이 남겨 놓은 것 이닌가?
더욱 더 슬픈 것은 이 땅의 목회자들이 잘 먹고 잘 살 수만 있다면 결국은 번영이든 기복이든 타협해서 수용할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헛 된 꿈을 심어주는 지도자의 말로는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