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센 여자들한테 한 번 당해 볼래?
드센 여자들한테 한 번 당해 볼래?
  • 김기대
  • 승인 2015.06.10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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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매드 맥스], 여성이 세상을 구원할거야, 남성과 함께

황교안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한국시간으로 8일(월)에 시작되었지만  무난히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 야당의 전투력이 상실된 지 오래고 무엇보다도 메르스 공포 때문에 시민들의 관심이 청문회에 쏠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메르스는 동성애자들의 축제를 막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라 '신실한' 황교안 총리를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인지도 모르겠다.  민원이 많아 골치 아픈 지방자치단체처럼 하나님에게는 한국 기독교인의 민원이 가장 많을 것 같다는  '개그'성 추측도 가능하다.  

사실 황교안 후보자의 결격사유는 한국 사회 고위층의 평균에 견준다면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다. 서글프기는 하지만 병역면제를 비롯한 여러 흠결 사항들은 대한민국에서 고위층에 오르려면 갖추어야 하는 '자격'이 되어 버렸다. 나아가서 황교안 후보자의 정서는 검증할 수 없는 부분이다. 명문고에서도 리더 역할을 하던 학생의 명문대 입학 실패(2회) (황후보자는 청문위원 요청에 따라 고교 생활기록부를 제출하면서 성적 부분을 가리고 제출했다. 아직도 40여 년 전 성적으로부터 심리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에 따른 청소년기 심리적 좌절감도 그의 인격 형성에 한 몫 했다고 생각되고 보수적인 환경은 여성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 2004년 부산지검 동부지청 차장 검사 시절 기독교계 언론인들과의 대담에서의 "사실 부산 여자들이 드센 이유도 있다, 반면 남자들이 말싸움이 안 되니까 손이 먼저 올라가는 것"이라는 발언은 남편의 폭행 원인을 아내에게 돌리는 취지로 그의 여성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자들과의 술자리 한담에서 나온 실수가 아니라 기독교계 언론인들과의 대담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의 정서적 심각성을 보여준다.


매를 부르는 드세 여자들(?)

영화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조지 밀러 감독, 2015년)는 같은 제목으로 만든 감독의 4번째 영화다. 3편 이후 30년 만에 다시 만든 이번 영화는 쉴 틈을 주지 않는 자동차 추격 장면으로 관객의 혼을 빼 놓는 이 영화는 ‘드센’ 여자들의 영화다.  기존의 자동차 경주 장면을 담은 액션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남자였다. 스피드, 폭력, 갈등해결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고 여성은 나약함 때문에 주인공의 상대방에게 미끼가 되어 문제 해결을 꼬이게 만드는 설정인 경우가 많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약속의 땅’으로 이끈다. 그래서 일부 평론가들은 <매드 맥스>를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하기도 한다.

22세기 인류는 핵전쟁을 겪은 뒤 물과 석유를 지닌 자가 강력한 지배자로 군림하는 시대다. 핵전쟁 이후라고 해도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시타델을 다스리는 임모탄(불멸의 존재라는 뜻일게다)은 물과 기름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지배한다. 시타델 안에는 여러 계급이 있다. 임모탄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계급과 하층민들, 그리고 임모탄에게는 충성을 다하면서 하층민들에게는 공포의 존재인 워보이들이다. 워보이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피부 빛마저 탈색된 존재들이지만 영생을 보장 받기 위해 임모탄에게 충성을 다한다.

또 하나의 특별한 계급은 여성들이다. 신탁을 담당하는 미스 기디를 비롯해 젖을 공급하는 여성들, 정조대를 차고 생활하는 임모탄의 애첩들과 여기에 총사령관(Imperator는 로마시대 카이사르가 스스로를 불렀던 최고 사령관이라는 뜻)의 지위까지 오른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 분)가 추가된다. 임모탄은 자신은 강력한 남성적 리더십을 구사하면서도 여성의 필요성을 아는 리더다. 다만 여성을 ‘모유’의 기능, 성적 대상의 기능, 신탁의 기능으로 구분한다. 퓨리오사가 독특한 존재인데 그는 한쪽 팔꿈치 아래가 없는 장애 여성이다. 전통적인 여성성을 갖추지 못한 퓨리오사는 시타델의 이인자다.

퓨리오사는 임모탄의 여인들을 데리고 탈출하면서 임모탄에게 반역한다. ‘녹색의 땅’을 향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곳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한 그녀를 억누르고 있다. 임모탄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퓨리오사를 추격하는 장면들이 영화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추격대 중에 노예로 끌려온 지 얼마 안되는 맥스(톰 하디 분)가 있다. 그는 지구 멸망의 시기에 가족과 이웃을 지키지 못한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전직 경찰이다.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면서도 영생을 보장 받기 위해  추격대에 참여하는 워보이 눅스(니콜라스 홀트 분)는 맥스를 자기 차에 매달고 그로부터 피를 공급받으며 퓨리오사를 추격한다.

퓨리오사, 맥스, 눅스 이 세 캐릭터가 축을 이루어 영화를 끌고 나간다. 추격전 끝에 맥스는 탈출하고 눅스 역시 맥스 때문에 얼떨결에 그와 합류한다. 퓨리오사와 맥스, 눅스가 이제 한 편이 되어 끈질기게 추격하는 임모탄의 군대를 격퇴해야 한다. 눅스는 도망가는 신세가 되면서 그 동안 자신이 임모탄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고 ‘반역자’들과 한편이 된다. 임모탄의 여인들도 처음에는 힘 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유약한 여성들이었지만 조금씩 강인해져 간다.

▲ 임모탄의 다섯 아내는 퓨리오사와 함께 탈주하는 과정에서 정조대의 끈을 스스로 끊어 버린다.

퓨리오사는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고향인 부발리니 부족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은 ‘녹색의 땅’이 아니고 할머니들(더 이상 생산력이 없는 존재들) 만 남은 세상이었다. 그들은 소금 사막을 건너 마지막 희망을 걸어 보려 하지만 그곳을 지난다고 해도 새로운 녹색의 땅이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다.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해야

여기서 퓨리오사 일행은 시타델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홍해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말과 같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으려는 맥스는 무모하지만 샛길로 가면 중장비를 가진 추격대가 오히려 기동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일말의 가능성으로 삼았다. 녹색의 땅은 먼 곳이 아니라 본래 우리가 있던 그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나온 결단이었다.

결국 해방의 공간은 모든 것이 갖추어진 평온한 땅이 아니라 착취당하는 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기성 구조를 타파함으로써 차지할 수 있는 곳이다. 임모탄이 장악하고 있던 생산 구조를 재설정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복해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그들은 소금 사막 앞에서 ‘회군’을 시도한다.

여기서 잠깐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비교해 보자. 그들은 홍해 앞에서 이집트로 회군하지는 않았지만 광야에서 벌인 여러 족속들과의 전투는 작은 이집트들과의 대결이었다. 자칭 진보 신학자들이 히브리인들의 폭력성 운운하면서 광야사건을 바라보는데 조지 밀러 감독만큼도 신학적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의 ‘폭력성’은 눌린 자에 대한 강한 자의 폭력이 아니라 이집트 ‘미니어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하삐루’들이 연대해  전복한 사건이다. 이른바 ‘입진보’들이 혁명을 이야기하면서도 기성 체제로부터 탈출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범하고 있다. 

폭력과 자동차 추격 장면의 거의 전부인 영화를 여성들이 이끌고 간다는 점에서 <매드 맥스>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동안의 전통적인 페미니즘과 달리 고유의 여성성에 기초한 페미니즘을 감독은 보여주고 있다. 모유, 섬세함, 돌봄과 같은 여성성을 배제하지 않는 페미니즘 말이다. 위기 극복이나 회군 결정에 맥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은 강성 페미니스트들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최근 여성운동가들이 판문점을 걸어 넘은 ‘위민크로스DMZ’ 행사의 중심 인물이었던 미국의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81)은 “결혼은 관계를 파괴하는 제도”라고 주장해오다 66세에 결혼함으로써 당시 동료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포스트 페미니즘 이론가인 벨 훅스(뉴욕시립대 교수)는 “페미니즘은 사랑을 향한 여성들의 강박을 바꾸지도, 사랑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하지도 못했다”고 지적한다. 페미니즘이 전통적인 남녀 관계를 비판하고 해체하면서 감정이 없는 페미니즘이 되었고 이로 인해 남성들은 여성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 페미니즘이 감정 없는 페미니즘을 극복하자는 의도를 갖고 있는데 비해 조지 밀러의 연출 의도는 페미니즘과 포스트 페미니즘의 중간 쯤 서 있다. 고유의 여성성 자체가 혁명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리를 둔다. 눅스와 임모탄의 여인 중 한 명과의 관계가 잠깐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맥스는 시타델을 접수한 퓨리오사를 두고 떠난다. 쿠바 혁명에 성공한 뒤 카스트로를 떠나는 체게바라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퓨리오사도 떠나는 맥스를 잡지 않는다. 둘 사이의 로맨스를 감독은 처음부터 설정하지 않았다. 

 

서로 연결하라

영화에 이처럼 페미니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가 시종 보여주려 했던 메타포는 ‘연결’ 혹은 ‘끈(줄)’이다.  '피주머니'로 불리면서 눅스에게 피를 공급하는 맥스와 눅스의 연결하는 헌혈 호스, 임모탄의 여인들의 해방을 상징하는 정조대의 사슬을 스스로 끊는 행위, 탯줄, 차와 차를 연결시키는 체인,  많은 연결 고리들이 영화에 메타포로 쓰인다. 이 연결을 유지해야 할 때도 있고 끊어야 할 때도 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도 이와 같이 연결된다. 여성이 정조대의 사슬을 끊고 성적으로 독립하는 순간 남성과 함께 전사가 된다. 전사가 되어도 물리적 힘은 남성보다 약할 수 밖에 없다. 맥스의 도움이 필요한 지점이다. 이렇게 남녀의 근원적인 성차를 인정하되 그것이 차별이나 사회가 만들어낸 후천적  '제 2의 성'이 되지 않게 끔 서로 연결되어 시너지 효과를 내라고 영화는 웅변한다.  

1세기 상황을 고려 않고 현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머리를 가리고',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여성관이 거슬릴 수 있다. 그럼에도 정치철학자들이 현대 사회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지점으로서 사도 바울을 소환한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복한 바울의 사상 때문이다. 주님(키리오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부르는 호칭이며 세상의 영원한 왕국은 영원하지 않다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도전한다. 이 전복에는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연대의 대상으로 불러 들인다. (갈라디아 3:28)

연대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을 때 기성의 수직 체제를 극복하는 연대의 힘이 생겨난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살아가지 마십시오.  (에베소 4:15-17)

그러므로 <매드 맥스>는 페미니즘 영화라기 보다는 남자건 여자건, 종이건 자유인이건 서로 연대해서 지금 서있는 현장을 변화시켜 나가자고 설득하는 영화다. <이끼> (강우석 감독, 2010년)에서 여성 주인공 이영지(유선 분)는 남성들과 연대하지 않고 그들의 힘을 이용해서 권좌에 오른다. 연대를 악용한 이영지의 웃음에는 섬뜩함이 묻어있지만 퓨리오사의 웃음에는 '협력하여 이룬' 열매의 가치를 아는 아름다운 미소가 묻어난다.     

영화 속 시타델,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순 투성이의 현실은 도피할 공간도 아니고, 워보이들의 '8기통'이라는 구호처럼 큰 것을 추구해야만 살아남는 공간은 더더욱 아니다. 이곳이야 말로 여러 결핍을 소유한 이들의 연대와 공감이 숨쉬는 근본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곳이며, 8기통의 정서가 아니라 '녹색'의 정서로 회복시켜야 할 땅이다. <매드 맥스>는 그걸 가르쳐 주는 영화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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