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계승 목사들을 어이할꼬
'가업'계승 목사들을 어이할꼬
  • 김기대
  • 승인 2015.06.18 07: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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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어른 아이'목사가 만드는 세상은?

LA 지역의 한 목사는 성탄절 시즌만 되면 교회를 비운다. 아버지의 기일마다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서인데 그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일가를 이룬 명망 있는 목사였다. 하지만 성탄절은 교회의 가장 바쁜 시기, 한 해를 정리하고 새 해를 준비하는 일도 이 계절에 몰려 있기에 교회를 비우는 목사를 향한 교인들의 시선이 곱지 못하다. 본인이야 목회도 중요하지만 고인에 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도리가 우선이라고 항변할지 모르겠으나 만약 그의 아버지가 이름없는 조그만 교회의 목사였어도 그렇게 했을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교회까지 비우고 간 추모 예배 자리에서 그는 아버지의 제자들(그들 역시 한 자리 하는 목사들이다)과 앞줄에 나란히 앉아 교제하면서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인해 볼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목회의 현실에서 그 '위상'은 확인 받지 못한다. 이 괴리감이 목회에 건강한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딸을 잃고도 맡겨진 예배를 모두 집례한 뒤 병원을 찾았던 허봉기 목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지만 어쩌면 이런 장면은 목사들이 감당해야 할 숙명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교회가 아니어도 '가업'을 이은 목사들의 '어른 아이'같은 태도는 한국 교회의 또 다른 그늘진 모습이다.

예수 소망 교회의 당회장은 곽요셉 목사지만 곽선희 목사는 아직도 1부 예배의 설교를 하고 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곽선희 목사의 설교에 더 많은 교인들이 참석한다는 소문도 있다.

김삼환 목사의 아들 김하나 목사는 지난해 명성교회와 불과 5km 떨어진 하남시에 새노래 명성교회를 개척(?)했다. 창립예배 때는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장상 전 이대 총장, 김명용 장신대 총장,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이현재 지역 국회의원, 하남시장 등 진보 보수를 넘나드는 인사들이 함께 와 축하했다. 명성교회 출신 부목사 4명, 교육전도사 2명이 지원된 상태에서 '땅 짚고 헤엄치게' 된 새노래명성교회는 명성교회가 기존에 운영하던 하남기도실 교인 600여 명을 흡수하고, 이들을 위해 주일 1부 예배에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의 설교를 중계한다. 김하나 목사는 2부 예배부터 설교하는데 예수 소망교회의 벤치 마킹이다.

최근 김하나 목사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이사로 선임되어 눈길을 끌었다.  프린스턴에서 석사만 한 젊은 사람이 이사를 맡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이사 선임이 김하나 목사만 보고 이루졌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 하다. 명성 교회가 최근 짐월리스 목사 초청 강연을 두고 세습에 비판적인 진보 진영 또는 개혁적 복음주의 진영을 염두에 둔 행보가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짐월리스 강연 통역은 김하나 목사가 맡은 것으로 알려 졌다. 징검다리 세습을 위한 포석이라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분명 '함량 미달'은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늘 밑에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함량'이 제한 받게 되고, 그 손해는 고스란히 교인들의 몫이다.

세습을 둘러싸고 눈살을 찌푸리게 한 사건으로는 충현교회가 압권이다. 1997년 고 김창인 목사는 아들 김성관 목사에게 세습했지만 부자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괴한에 의한 아들 목사의 피습에 김창인 목사가 개입되었다는 김성관 목사측 주장과 아들의 자작극이라는 김창인 목사의 주장이 맞부딪히면서 1972년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 남진 피습사건 이후 최고의 흥미진진한 뉴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김창인 목사는 별세(2012년) 전 세습을 후회한다고 토로했었다. 아들 김성관 목사는 지난 2013년 충현교회 당회장 직에서 물러났으나 부목사를 담임목사에 앉히고 유지재단 이사장 직은 계속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 졌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려 했던 시도는 '치정극'이 되고 말았다.

'나는 가수다'를 통해 진한 인상을 주었던 가수 거미의 히트곡 '어른 아이'의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착한 아이처럼 말만 잘 들으라 해서

시키는대로 했는데 자꾸 지겨워 해

내가 봐도 나는 정말 쉬웠어

쉬워진(겸손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목사가 무슨 사역을 하고 무슨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까? 목회 뿐 아니라 모든 분야가 경쟁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 뒷배가 없으면 홀로 서기 힘든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런 기이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목사들이 '어른 아이'처럼 아버지의 품 속에서 양육될 때 과연 맨 땅에서 살아가는 교인들의 칙칙한 삶의 자리를 알기는 할까? 그들의 목회를 통해 사람들은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나는 내 후대에게 무엇이라도 물려 줘야 하겠다는 절박함만 배우게 되기 쉽다.

미로슬라브 볼프 예일대 신학부 교수는 삼위일체와 교회(새물결 플러스, 2012년)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산당원들이 아무런 견제 없이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에 유고슬라비아의 노비 사드라는 도시의 한  목사 사택에서 자라났다. 어떤 면에서 부모님이 교회에서 "일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부모님은 자신들이 돌봐야 할 신자들의 작은 공동체를 위해 "살았다." 아직 어렸던 나와 여동생은, 말하자면 바로 그러한 공동체의 삶의 궤도 속으로 온전히 빨려 들어갔다. 우리 가정은 교회 소겡 있었고, 교회는 우리의 가정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교회가 우리의 부분이었기에, 우리도 교회의 부분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 졌었다. 공산당원들은 수시로 밀고자가 없는지 그의 집을 뒤졌고 사택인지 교회인지 구분이 안 되는 작은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게다가 볼프의 아버지는 오순절  계통의 목사였다. 공산치하라 할지라도 정교회가 여전히 위세를 부리던 시절, 개신교에서도 마이너리티였을 오순절 목사의 삶이라는 게 얼마나 팍팍했겠는가? 유러피안의 합리성, 사회주의의 경직성, 게다가 소련에 예속되지 않은 당시 유고 독재자 티토(Marshall Tito)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독자적 노선이라는 유고적 환경 속에서 '오순절'이 가당하기나 했을까?

그러나 이 환경이 볼프의 모판이 되었다. 그는 이 환경에서 '하나님의 다스림 없이는 교회도 없고, 교회 없이는 하나님의 다스림도 없다'는 사실을 배우면서 대학자로 성장했다. 

세습이나 아버지의 후광의 문제는 단순히 윤리, 정의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함량이 자격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신학이 제대로 설만한 조건은 갖추지 못하게 된다. 물론 가난이 신학의 필수 요건은 아니지만 땅 짚고 헤엄치며 시작한 목회에서 어떻게 바른 신학이 나오겠는가? 재벌의 불법 승계를 비롯한 사회의 여러 부조리에 대한 비판은 그들의 선포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대가 그랬던 것처럼 '환경도 실력'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가 될 뿐이다. 세습문제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함량도 되고 아버지의 후광도 든든하면서 나는 아버지와 완전히 결별하겠노라고 선언하는 '다 큰 어른'들이  보고 싶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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