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김무성을 통해 본 해방 70년
김원봉 김무성을 통해 본 해방 70년
  • 김기대
  • 승인 2015.08.0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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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살아남은 김원봉 가족, 해방조국에서 학살

영화 <암살>이 무서운 기세로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 이곳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이번 주말 상영을 시작하는데 보수적인 한인 사회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어느 정도 관객이 모일지 미지수다. 사실 '보수적'이라는 말과 흥행이라는 말이 충돌할 수도 있다는 가정이 우스운 소리다. 나라를 지키는 일, 외세에 대한 항거하는 일이야 말로 보수의 신념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제 나라의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보수'라는 완장을 채워 주고 있다. 그래서 행여라도 이 보수적인 영화가 자칭 보수 세력들에게 배척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이 있다.   

한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보수세력'들에게 영화를 봐도 된다고 사인을 줬다. 김무성씨는 한국 시간으로 6일 오후3시 국회 의원회관 2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영화 ‘암살’ 상영회에 앞서 환영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제안해 참석자들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김무성의 아버지 김용주는 친일파다. 그의 아버지가 친일파였다고 해서 그 죄를 아들에게 물을 수는 없다. 독재 정권 시절 월북한 가족으로 인해 취업과 생업에 불이익을 당했던 연좌제 피해자들의 한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반대의 경우라고 해서 연좌제를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둑의 아들이라고 해서 경찰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전통적인 한국 보수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는 '서자'다. 이처럼 친일파 김용주를 김무성과 떼어 놓는다고 해도 그의 행보는 도무지 '대한 독립'과는 상관없어 보인다.

그는 주한미군 사령관을 등에 없는가 하면 미국 방문 시 재향 군인들과 워커 장군 묘소에 가서 넙죽 엎드렸다. 차라리 그 아버지야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하는 수 없이 친일을 했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이 시대에 상대방이 원치도 않는 일을 자발적으로 해대는 사람이 과연 독립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 더군다나 그는 좌파의 준동을 막아야 한다며 국사 교과서를 권력자의 입에 맞게 국정교과서로 통일시켜야 한다고 떠들고 다닌다. 4년 전 논문에서 국정교과서는 독재 국가에서나 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던 현직 교육부 차관 김재춘씨는 현재 국정교과서 추진의 선봉에 서 있다. 권력 앞에 비굴한 관료의 전형이다.

김무성을 그의 아버지 김용주에게 '연좌'시켜서 안 되지만 현재 김무성은 자발적으로 그 아버지의 세계관 속으로 '연좌'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대한민국은 진보좌파(그런 세력이 대한민국에 존재하는지 의문이지만)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들'의 나라이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시위하는 듯 하다. 말하자면 김무성에게 '대한 독립'은 외세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좌파'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이제 그로 대표되는 세력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영화라는 가상 현실에 가두어 놓고 그들을 비난할 세력이 없어진 '자유대한'에서 목청높여 '대한 독립'을 외친다. 일부에서는 그런 행위를 후안무치라고 비아냥 대지만 부끄러움은 짧고 권력은 긴 것을 아는 그들에게 '독립'은 분명 독립일게다.

김무성은 좌파를 몰아내고 독립하자고 주장하지만 영화 <암살> 속의 김원봉은 이동휘와 더불어 대표적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다. 

▲ 김원봉의 젊은 시절

영화에서는 배우 조승우가 약산 김원봉의 역할을 맡았다. 김원봉의 자료 사진을 보면 조승우처럼 풍모가 수려하다. 김원봉은1898년 9월 28일 밀양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를 상대로 무력 투쟁을 벌여 나갔다. 1926년 2월 26일 조선공산당이 작성한 '민족 해방운동의 정세와 당과의 관계'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민족 혁명 전선에 직접 투쟁하는 단체는 남북만주에서 김원봉 일파의 의열단 또는 신민부 혹은 통의부 밖에 없다"고 인정할 정도로 활약이 대단했다. 3.1운동 직후 그의 나이 20대 초반에 혁명활동을 시작한 김원봉은 1922년에는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다나카 기이치 대장을 상하이에서 암살하려고 했다. 영화에서 처럼 김원봉은 국내에도 암살 요원들을 다수 파견했다. 

김원봉이 언제부터 공산주의자들과 연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제하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3분파 중 하나인 ML(마르크스 레닌)파의 리더 안광천과 1928년 상하이에서 만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즈음 사회주의자들과 손을 잡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1930년대 초반까지도 김원봉은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장개석)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장제스를 봐서라도 대놓고 사회주의자라고 밝히지는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1937년 수세에 몰린 국민당 정부가 김원봉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자 김원봉은 사회주의자들과 본격적으로 연대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 역할을 맡은 조승우

김원봉은 항일 무장 투쟁을 하던 사람들 중에 단연 돋보여서 김일성을 능가할 공산주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고 한다(김일성이 1912년 생이니 김원봉이 14살 연배다). 1945년 9월 창간된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에서도 김원봉과 김일성은 동격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김원봉은 남쪽에 남아 분단상황을 극복해보려고 무진 노력을 기울이다가 1947년 여운형의 암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8년 북으로 넘어 간다.

그곳에서 국가검열상을 지낸 김원봉은 1958년 김일성에 의해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당시 같은 죄목으로 투옥된 사람 중 한지성은 사형당했으나 김원봉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자살설을 비롯해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만 난무할 뿐이다. 김일성에게는 거물 김원봉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김원봉은 공산주의자라기 보다는 민족주의자였다.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냈고 독실한 기독교 전도사였던 이동휘가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자였다면 김원봉에게는 항상 민족이 먼저였다.  

1945년 12월 4일 <해방일보> 사설은 이승만이 만주의 항일 유격대를 경시하고, 일제하에서 개인적 번영과 부의 축적에 노력을 집중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승만과 반대 지점에 서 있는 신문임을 감안한다 하더라고 이승만의 행보는 사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이승만과 김원봉은 갈등이 깊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과 보도 연맹 사건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국민보도 연맹이 조직되었다. 국민보도연맹은 몸집을 불리기 위해 회원 확보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좌익 가족을 둔 사람들에게는 협박과 공갈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쌀 밀가루 같은 배급품으로 가입을 독려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북에 동조할 세력으로 보고 무차별 학살했다.  공식적인 조사로는 4934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대 120만 명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의 대학살 사건이었다.

▲ 쌀을 배급받고 보도연맹 가입원서를 썼다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다.

김원봉의 형제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되어 밀양의 산골짜기에서 총살 당했다. 총살을 면한 아버지도 전쟁통에 굶어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정부에게도 요주의 인물이었던 김원봉의 가족이었지만 일제하에서는 별다른 고초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좌파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6.25때 목숨을 건진 다섯 번째 동생 김봉철 4.19 혁명이후 네 형제의 유골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른 후 밀양 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를 결성했으나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하자 북한을 찬양하고 이롭게 하는 활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2심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가족들은 모두 걸인으로 거리에 나 앉았다. 2010년에야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가족은 풍비박산이 나고 당사자들은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는데 뒤늦은 명예 회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김원봉은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을 받았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떵떵거리고 살 때 독립운동가의 가족은 가난 또는 죽음을 감내해야 했다. 

이승만은 그런 상황을 조장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국부'의 호칭을 부여해야 한다고 보수 기독교계와 김무성이 앞장 서고 있다. 김무성의 아버지 김용주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승승장구한다. 미군정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일본인들의 재산이었던 전남방직을 전쟁 중에 접수해 부자가 되었다. 김무성이 중앙 정치 무대에서 조금씩 몸값을 올려가던 시기에 그의 아버지 문제도 불거져 나왔다. 하지만 7월 31일 한겨레 신문 보도에 따르면"'친일’ 김무성 아버지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며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 김용주 기록이 사라지고 있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포털사이트 수정과 함께 이승만을 국부로 숭앙하면 그의 아버지의 죄도 덮어지고, 애국자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다.

이승만을 사이에 두고 죽은 김원봉과 산 권력 김무성은 다른 지점에 서 있다. 민족주의 좌파 김원봉과 국제정치 감각이 남달랐던 이승만은 길이 달랐다.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병적인 공포는 당시 힘 한 번 제대로 써 본적이 없던 소련을 지나치게 두려워 한 미국 정치인들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그의 빠른 국제적 감각은 전쟁통에 상대방이 아니라 제 나라(남한) 백성을 학살하는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김무성이 미국에 가서 조아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국제 질서 속에서 그는 이승만이 그랬던 것처럼 단순하게 '미국' 하나만 믿고 나라를 운영해 보고 싶은 거다. 거기에 시선을 집중하면 실패한 이승만의 과오는 놓치게 된다. 그래서 그의 행보가 두려운 거다.  

광복 70년이 되었지만 영화 <연평해전>과 <암살>이 2015년 공간에서 여전히 진영논리로 대립하고 있다. 진보 보수를 넘나들며 함께 미래를 모색해야 한다는 허울 좋은 말이 지도층의 입을 통해 대중을 현혹하지만 글자 그대로 현혹이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주변에 '김일성'을 추종하는 진보세력은 없다. 그런데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자는 보수세력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상대방을 실체가 없는 '종북' '좌파'로 묶어 두고 화합하자는 정치인들의 덕담과 목회자들의 나라를 염려하는 설교? 우스운 이야기다. 광복 70년이 여전히 우울한 까닭이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미주뉴스앤조이>

약산 김원봉에 대한 자료는 로버트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이 지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돌베개,2015년)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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