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의 성경책과 고 최종현의 기(氣)
최태원의 성경책과 고 최종현의 기(氣)
  • 김기대
  • 승인 2015.08.18 0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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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기에서 무속을 거쳐 성경으로

선경 그룹(지금의 SK)의 회장이었던 고 최종현 회장(1929~1998)은 기수련에 심취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독실한'기독교 기업인이 회사 내에 사목(社牧) 을 두는 것처럼 최종현 회장은 회사내에  기전문가를 임원으로 두기도 했었다. 단전호흡과 기수련을 하는 사람들에게 최회장은 매우 상징적인 존재였다. 대기업 총수가 기독교나 불교 신자가 아니라 기수련 심취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 분야 사람들은 최회장을 통해 '기'의 공신력을 확증 받고 싶어 했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기수련과 대기업 총수에 의지하는 것은 모순되어 보이지만 아무튼 기수련을 하는 사람들 중에 '선경 최회장님'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인터넷에는 최종현 회장이 썼다고 하는 기수련에 관한 거의 논문 수준의 글이 있다. 실제로 그의 저술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최회장의 명성에 기댄 '외경'수준은 충분히 되어 보이는 글이다.

  이 고비에 나는  일생의 동반자를 잃기도  했다. 운명이 가혹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지만 내게 준비된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연습도 할 수 있었다. 「사람의 생명이란  욕심대로 가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깨달음도 새삼 가지게 됐다.  지금의 나는 생각지 못했던 폐암 수술로 건강에 중요한 고비를 맞고  있다. 그동안 지나치게 건강에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 오히려 불리하  게 작용한 것일까? 그러나 만약  「심기신(心氣身) 수련」을 모르고  오늘까지 왔다면 암이 던진 일격에 쉽게 무너져버리고  말지 않았을  까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10년만 더  일찍 기(氣)를 알아 나이  쉰이  되기 전에 수련을 시작했더라면 암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한  가닥 아쉬운 마음도 있다. 

이 부분 뒤에는 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오래 전 내가 만나 본 선경의 과장급 임원도 스스로를 '기'로 인해 특채된 사람이라고 소개했던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하면 이 글의 최종현 저작설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자수성가한 다른 재벌들과 달리 최회장은 서울대학교, 위스콘신 대학, 시카고 대학을 거친 엘리트였다. 엘리트로서의 그의 고집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기수련 같은 것들로 인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70 빠른 나이에 폐암으로 별세했다.

지난 14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고 최종현 회장의 장남이자 노태우 전대통령의 사위이기도 한 최태원 회장은 의정부 교도소에서 출옥하면서 성경책 한 권만을 직접 들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재벌 총수로는 이례적으로 2년 7개월의 긴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공표한 셈이다. 소문에 따르면 수감 기간 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국민일보>와 같은 기독교계 신문뿐 아니라 대부분의 일간지들이 이 사진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고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시계 바늘을 3 여 년 전으로 돌이키면 최태원 회장의 구속에 김원홍이라는 SK 고문이 언론에 등장한다. 최태원 회장은 횡령으로 법정에 섰을 때 그것을 기획한 주범이 김원홍씨였다. 재판 초기 김원홍의 존재에 대해 말을 아꼈던 최태원 회장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법정에서 “김씨와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부끄러워 이제야 진실을 말하게 됐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김원홍씨는 여의도 증권가에서 유명한 ‘무속인’이었다. 그의 신통력은 '특정 날짜의 주가를 정확히 맞춘다'고 입소문을 탔다. 1998년 아버지 최종현 회장의 별세 후 그의 가신으로 선경을 맡았던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을 통해 김원홍씨를 소개받은 최태원 회장(이하 최회장)은 재판 초기에 "김씨는 나의 ‘경영 멘토’였다. 그가 주가·환율, 미 연준 이자율에 정통해 덕분에 나도 열린 시야로 경영할 수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재벌이나 정치인들이 점술가를 찾는다는 비화는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만 알려졌으나 그것이 최회장을 통해 현실로 판명되었다.

최 회장은 자신보다 어린 김씨에게 최고의 예를 갖추었고 그 때문에 고위급 임원들도 감히 '김원홍'을 거론못했다고 전해진다. 김원홍씨는 2008년 10월에는 최 회장 형제와 김원홍, 김준홍씨가 얽힌 450억 횡령사건을 일으킨다. 결국 최 회장은 "실제 SK그룹의 지주회사와 다름없는 SK C&C 지분을 제외한 전 재산을 김씨에게 투자하고 돌려받지 못했다."(당시 언론보도 요약)

최 회장은 법정에서 “김원홍씨에게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뭔가에 홀렸던 것 같다”고 증언했다. 

한 사람이 고통의 세월을 거친 뒤에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지만 최회장의 정신적 편력을 보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최회장이 아버지가 몰두했던 '기수련'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기와 자신의 무속 신앙을 직간접적으로 거친 뒤에 경험한 그의 '회심'뒤에는 김장환 목사의 이름도 거론된다. 김장환 목사는 세상이 다 알다시피 전두환 노태우를 위해 기도해 온 인물이다.

무속신앙에 기대어 기업경영을 한 행위, 2년 7개월이나 살 정도(기업의 범죄에 관대한 한국 법의 입장에서 볼 때 기준)의 중죄를 지은 그가 회심으로 인해 정말 거듭났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를 '기'와 '무속신앙'과 '김장환'이라는 단어에서 동시에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혹시라도 주가의 등락시기를 맞추고 투자 종목을 결정하는데 무속신앙보다는 기독교가 조금 더 믿을만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택한 것이 아니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다른 사람의 회심을 검증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일단은 그의 순수성을 믿어 보련다. 하지만 최회장이 이것만은 꼭 명심했으면 좋겠다. 기독교는 자기 수련에 집중하는 기수련과는 달리 이웃(그에게 일차적인 이웃은 그의 회사에 속한 노동자들일 것이다)을 배려해야 하는 종교며, 하늘의 운수에 의지하는 무속신앙과 달리 이 땅의 사람들이 정의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랬다. 최회장이 선택한 새로운 종교가 이 땅 위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평안을 추구하는 땅의 종교라는 진실만은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늘(하나님)만 바라보면 우리가 마치 그분이 된 양 착각해서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땅을 생각하면 전두환 노태우는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인들이다. 김장환 목사가 최회장의 회심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그에게 주는 고언이다. 

 

김기대,편집장 / <뉴스 M / 미주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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