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중심, 예배 중심, 그리고 교회 중심
목사 중심, 예배 중심, 그리고 교회 중심
  • 신성남
  • 승인 2015.09.23 05:4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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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신성남 ⓒ <뉴스 M>

구약의 희생 제사에 따르면 속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랐습니다. 제사장이나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제단에서 그 고기를 먹을 권한이 없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짐승의 피는 장차 구세주로 오실 어린 양 예수님의 피를 의미하며, 성 밖으로 나가는 육체는 십자가 고난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진 밖이라고 하는 곳은 저주받은 자가 버려지는 장소로서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영문 밖의 십자가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2-13)"고 말합니다. 피로 상징이 되는 구속의 사역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으나, 아직도 한 가지 남은 사역이 더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영문 밖이란 거룩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의 성문 밖을 뜻합니다. 즉 성도들이 져야 할 십자가는 거룩한 성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이 땅의 수많은 교회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며 귀한 사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교회들을 보면 크게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 고난을 기피하며 목사 중심, 예배 중심, 그리고 교회 중심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성전 제사가 완료되었는데, 오늘날의 교회에 무슨 구약적 제사장이나 중세적 사제 따위가 더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단지 종의 직분인 일부 목사들은 마치 중세 시대의 무식하고 탐욕스런 교황처럼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도 된 듯 무당 행세를 하며 공교회의 교권을 사유화하여 독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배와 교회라는 신성한 이미지를 이용하여 신도들을 모아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맹신화하고 교조화한 후 오직 교세 확장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무지'가 덕이 되고, '맹종'이 의가 되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샘물 같이 멀쩡하던 사람도 교회만 나가면 이상하게도 맹물처럼 맛을 잃은 맹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영문 밖으로 나가라"고 외치건만, 이들은 오로지 예배당 안에서만 부선을 떨며 북적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 중심, 사역 중심, 그리고 세상 중심

어느 기록에 따르면 주후 66년의 유월절에는 무려 25만 5,600마리의 양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 제사가 얼마나 많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신약 교회에는 그런 번잡한 속죄의 제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교회들은 예배를 제사화하여 부지런히 모이고 바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주간 내내 예배가 넘치고, 찬양이 넘치고, 기도가 넘치고, 그리고 그 덕분에 헌금도 제법 넘치지만 갈수록 예배당은 '비나이다 성황당'이 되어가고 삶은 더욱 공허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옮겨진 산이 없고, 아무리 금식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왜 이럴까요.

게다가 한국 개신교는 직분자들의 체질화한 비리와 부패로 인해 세인들로부터 온갖 상스러운 욕설을 홀로 앞장 서서 독식하고 있습니다. 매우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이 방면에서는 가히 타 종교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는 지극히 독보적 존재입니다.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에 대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함이라(렘6:13)"고 탄식했습니다. 당시의 유다 땅이 아예 통채로 썩었다는 말이지요. 헌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요.
 
왜 우리는 성도 중심, 사역 중심, 그리고 세상 중심의 건강한 신앙공동체를 이루지 못 하고 있는 걸까요. 신도들의 종교적 열정은 그토록 뜨겁지만, 그 사역의 열매라는 것은 왜 이리도 빈약한지요. 도대체 누가 예수님의 교회를 고작 '목사를 위한 교회, 돈을 위한 교회, 그리고 출세를 위한 교회'로 추락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신약의 제사는 '선행'과 '나눔'

과거 로마인들은 삶의 모든 목표가 오로지 출세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요즘 우리의 모습과 잘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군인으로 승리하여 성공을 하거나, 웅변이나 운동으로 명예를 얻는 등 그들의 삶은 출세가 가장 큰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야 돈을 벌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의 기독교는 전혀 달랐습니다. 자신의 출세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고, 또한 제물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로 물질을 나누며 도와주었습니다. 따라서 이같은 신앙은 로마의 주류 시민정신에는 마치 마약같이 위험한 독소였습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로마제국이 초기 기독교를 그토록 미워하고 박해한 진정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한국 개신교 또한 너무 출세지향적이라고 생각해 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항상 말로는 갈보리 언덕을 향하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실상은 늘 성문 안에 안주하며 거룩한 예배를 빙자하여 건물 키우기와 재물 키우기에 몰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제사는 '선행'과 '나눔'입니다. 신약 교회의 제사는 단순히 주일예배나 새벽예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배로 삶을 바꾸려 하지 마시고, 오히려 삶이 예배를 바꾸도록 해야 합니다. 종교적 예배가 삶의 중심이 아니라, 삶이 영적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옳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 예배, 그리고 교회당이 모두 필요하고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외형적 제도와 도구들이 신앙의 중심이 되거나 전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사역'이 아닌 '사욕'에 헛되이 한눈 팔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영문 밖의 세속 도시에는 주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신성남 /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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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철 2015-09-30 14:13:47
항상 느끼는 것인데 비판을 위한 비판만 있는 칼럼, 이제 그만 실으면 안되나요? 억지 비판을 위해서 무리하게 설정해 놓은 현 교회들의 상황과 구약의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짜맞추는 기법도 그렇고...
물론 한국교회가 많이 타락에 빠지고 연약함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칼럼은 이제 더 이상 보기 싫으네요. 뭔가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건전한 운동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깡사 2015-09-23 16:03:04
물론 중요하지만 특별한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요... 목사님들처럼 권위적인 논조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