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파 성도들'
'아멘파 성도들'
  • 정병선
  • 승인 2007.12.27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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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한국 기독인' 심층 분석 리포트 ①

‘한국 교회는 비정상이다’ 하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20여 년 전부터 꾸준히 회자되어 온 이야기다. 한두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다들 지적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교회는 오늘도 여전히 비정상의 모습 그대로 굴러가고 있다. 다들 염려하며 안타까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현실은 별로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절망할 것인가? 교회의 현실에 안주하는 것도 문제지만 절망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절망은 모든 걸 파괴할 뿐이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 역시 바른 해법은 아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해야 할 마땅한 태도이지만, 무작정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때를 묵묵히 기다리면서도 하나님께 구하고, 길을 찾고, 문을 두드린다(마 7:7~8). 기다리면서 서두르고, 서두르면서 기다린다. 믿음이 본래 그러한 것이기에 우리는 교회의 현실에 절망하거나 안주할 수가 없다.
 
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문제

한국 교회 안에는 경직된 교회 제도, 과도한 헌금 강조와 재정 운영의 비민주성, 왜곡된 교리와 신학, 윤리적인 타락과 부패, 지나친 경쟁과 갖가지 환원주의 등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하지만 문제만 보아서는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문제의 진상을 알 수도 없다. 문제는 결과적 현상일 뿐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넘어설 수 없다.

문제의 진상을 제대로 보려면 반드시 문제의 배후에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한다. 무릇 모든 문제는 결국 그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로 귀착되는 법이지 않던가. 가정, 학교, 교회, 정당, 회사, 나라를 보라. 문제를 파고 들어가면, 결국 사람이 문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오늘 교회가 욕을 먹고 흉포한 모습으로 구겨진 것도, 실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는 바로 나의 문제요, 우리의 문제다.

그러면 한국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자들인지를 살펴보자. 한국 교회를 들여다보면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첫째,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아멘파(순종파). 보수적인 교회의 상당수가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교회에 실망한 나머지 교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소적인 비판자의 입장에 서 있는 냉소적인 비판파. 이들은 아직까지 숫자는 많지 않지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개인적인 신앙에 만족하는 안주파. 이들은 교회에 깊이 참여하는 걸 꺼린다. 교회 문제로 깊이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저 개인적으로 영적 필요를 채울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들이다.
 
물론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본래 사람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세상에 사람처럼 복잡하고 오묘한 존재가 또 어디 있는가. 사람이란 한없이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하고,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끝없이 다른 존재가 아닌가. 때문에 사람을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섣부른 짓일 수 있다. 하지만 어쩌랴. 개략적으로 대별해 볼 수밖에. 하여, 한국 교회 구성원의 특성을 세 가지 부류로 대별해보았다.
 
아멘파 성도들

먼저 아멘파 성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소위 아멘파(순종파) 성도들은 교회에서 가장 인정받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며 그리스도인의 전형으로 칭찬받는 자들이다. 이들 중에는 하나님이 마냥 좋고 예수님이 좋아서 목사님과 함께 교회 일에 헌신하는 자들이 많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기 일보다는 교회 일을 앞세우며 헌신적으로 헌금하고 봉사하는 분들이 많다.

정말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의 헌신과 봉사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이 분들의 헌신과 기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가볍게 평가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 분들의 헌신과 기도의 땀방울로 세운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정상적인 교회, 하나님나라와는 거리가 먼 교회, 세상 사람들에게조차 손가락질 받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뭐 좀 이상하지 않나? 그렇게 아름다운 신앙의 사람들이 피땀 흘려 세운 교회라면 마땅히 아름답고 칭찬받는 교회로 반듯하게 서야 할 터인데, 실제로는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으니, 왜 그런 것일까?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롬10:2). 아, 그렇다! 이 말씀은 한국 교회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요, 한국 교회를 바라볼 때마다 진한 아픔으로 다가오는 말씀이다.

바울이 왜 이 말을 했는지 아는가? 유대인 동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으나, 그 열성이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복음을 억압하는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지식이 없는 열성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지난 날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이 뜨겁기만 한 신앙이 얼마나 비참하고 엉뚱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친히 경험했기에 증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말한 것이다. 이런 일이 또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말한 것이다.

그러면 오늘 한국 교회는 어떤가? 그렇게 많이 바울이 설교하고 있지만 바울이 염려했던 위험한 일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 목회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온전하게 가르치기보다는 눈곱 만한 ‘쪽복음’으로 성도들의 눈을 가로막고 있다. 올바른 지식으로 무장하면 성도들이 비판적이 되고, 목회하기가 힘들어지며, 결과적으로는 교회 성장을 가로막는다면서 지식이 없는 열성파 성도를 키우는 데 몰두해왔다.

그러다보니 복음을 증거한다고 했는데 복음을 가리는 경우가 많았고, 교회를 세운다고 세웠는데 그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가로막는 교회 왕국이 되고 말았다. 사회로부터 비판과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우스운 교회가 되고 말았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몇몇 대형교회들로 대표되는 많은 교회들의 행태를 생각해보라.
 
교회와 하나님나라

본래 교회는 하나님나라와 매우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함께 임한 나라가 하나님나라요,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도 하나님나라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가르침과 사역이 전부 하나님나라와 연결되어 있었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다 하나님나라를 드러내고 가르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나라의 실체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출현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나라가 아니고 교회였다. 이건 뭘 의미하는가? 교회와 하나님나라는 깊은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하나님나라 대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교회가 하나님나라는 아니다. 하나님나라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이 땅에 증거해야 할 책임을 맡은 하나님의 기관이긴 하나 교회가 곧 하나님나라는 아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나라를 향해 집중하고 헌신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나라를 닮은 모델하우스가 되어야지, 교회가 하나님나라인양 행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타락이요 반역이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언제나 하나님나라를 향한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나라에 충실한 것도 아니었다. 초대교회 시절, 교회가 힘이 없을 때는 교회를 세우는 일이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힘이 커지면서부터 교회는 점점 하나님나라와 멀어졌다. 하나님나라를 받드는 길을 걷기보다는 교회 스스로 왕국이 되는 길을 걸어갔다. 중세 시대에는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 권력이 될 정도로 교회는 스스로 제왕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나라를 위해 존재해야 할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지금의 한국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의 힘이 막강해진 지금, 한국 교회는 점차 교회 왕국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은혜를 사모하며 기쁨으로 순종한 성도들의 뜨거운 열정과 순전한 믿음으로 헌신하고 땀 흘려서 세운 교회가 하나님나라와 멀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협소한 구원관

특히 신앙관과 구원관이 협소하다. 본래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의 세계와 경륜을 보아야 한다. 역사와 우주를 아우르는 구원의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런 안목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평안과 축복, 가족의 안위를 좇는 데 급급하고 있다. 그게 구원의 전부인 줄 알고 있다. 교회를 넘어 하나님나라를 보아야 하는데 교회밖에 보지 못한다. 목회자들이 그렇게밖에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보니 아멘파 성도들의 헌신과 봉사가 하나님나라를 세우기보다는 교회 왕국을 세우는 데 일조하는 것으로 오용되고 말았다. 이들의 소중한 땀방울과 에너지가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세우는 데 쓰였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고 교회만 보았기 때문에, 개인적인 구원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교회가 성장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정상적인 교회가 되고 만 것이다.

한일장신대 철학과 김동민 교수가 묘사하는 오늘 교회의 모습을 들어보자.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 주에 수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백 명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갖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득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 붓고도 득의한 듯 히히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한겨레21>, 1999년 4월 15일자)

김동민 교수의 이 그림 같은 묘사는 바로 하나님나라와 거리가 먼, 그래서 기이한 곳이 되어버린 한국 교회의 슬픈 자화상을 기막히게 그려내고 있다. 김동민 교수가 말한 대로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열심을 다해 헌금하고 봉사하고 모이고 있다. 구심력이 대단하다. 그러나 그 에너지가 하나님나라를 드러내고 세우는 데로 모아지지 않고 있다.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물론 정말 아름답고 향기 나는 교회,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분투하는 교회가 곳곳에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천사도 부러워하는 교회가 분명히 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교회가 커갈수록, 힘이 강해질수록 교회는 더 크고 더 강해지기를 꿈꾸며 교회 왕국이 되려 하고 있다.

근본주의적 성향

거기다가 신앙의 열정을 강화하는 데 익숙한 목회자들은 대부분 근본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의문이나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질문하는 것을 불온시했다. 의문은 곧 불신앙으로 통하고 사단의 역사로 통하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교회 안에 건강한 이성, 거듭난 이성이 자리 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신앙 앞에서 이성은 찍소리도 해서는 안 된다고, 무조건 목사가 가르치는 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그래서 아무리 똑똑하고 배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단 교회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생각하고 고민하고 질문하는 것을 멈추어야 했다. 이성을 잠재워야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또 가르쳤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오면 으레 생각을 멈추는 습관이 생겼다. 아니, 자동으로 이성이 멈추어버린다. 마치 개에게 밥을 줄 때마다 종을 쳤더니 나중에는 종만 쳐도 개가 침을 흘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자동으로 이성은 OFF가 되어버린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이성을 내려놓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정말 그럴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이성을 내려놓아야 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왜 이성을 주셨을까? 생각하고, 상상하고, 질문하고, 의문을 품을 필요 없이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한다면 필요도 없는 것을 뭐 하러 주셨을까?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이성이라는 게 신앙의 걸림돌밖에 안 된다면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 없이 살든지, 이성을 죽이고 하나님과 함께 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텐데, 그럴 거면 뭐 하러 이성을 주셨을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이성을 주셨다는 것은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것 아니겠는가? 이성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부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물로 주신 것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하여, 나는 교회가 이성을 거부하고 불온시하는 것을 고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의문은 또 있다. 이성을 신앙의 걸림돌이라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이성을 내려놓고 살까? 하나님 앞에서 생각도, 상상력도, 의문도 없이 백지 상태에서 살까? 정말 이성은 멈추고 성령과만 직통할까? 소가 웃을 일이다.

근본주의자들도 성령 안에서 이성을 통해 말씀을 해석하며, 신학교나 교회에서 배운 것을 써먹기도 하고, 때로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고민하며 의문에 휩싸이기도 한다. 근본주의자들도 목회할 때 수많은 목회적 계산을 한다. 그런데 이성을 내려놓으라고? 이성은 신앙의 걸림돌이라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극단주의의 위험성

근본주의자들은 흑백논리에 강하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절대주의, 말씀 절대주의, 교회 절대주의, 신앙 절대주의를 외친다. 다른 교리나 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배타적이며 전투적이다. 윤리적인 완벽주의를 추구한다.

이뿐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은 신앙에 의해서 쉽게 이성이 마비된다. 근본주의자들은 신의 이름을 내걸면 쉽게 미치고, 쉽게 전쟁 지지자들이 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잔인하고 무서운 전쟁을 보면 대부분 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을 볼 수 있다. 십자군 전쟁, 보스니아 내전, 30년 전쟁,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전쟁, 유대인 학살이 그렇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 배후에도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근본주의가 작용하고 있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도 그렇다. 이성 절대주의나 신앙 절대주의 둘 다 문제다. 이성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이성의 한계 안으로 신앙을 구겨 넣으려고 하는 것도 문제고, ‘하나님 앞에 왔으니 이성은 나가 놀아라’ 하는 것도 문제다. 신앙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극단주의나 절대주의가 아니라 진리의 균형 감각이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를 동시에 붙잡는 지혜와 용기다. 신앙은 이성을 활용할 줄 알고, 이성은 신앙의 인도와 지도를 받을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굴복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말씀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 그러나 굴복과 겸손이 능사가 아니다. 굴복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알기 위해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묻고 생각하고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과정이 없다. 그냥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생각 없이 믿고 따른다. 베뢰아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고상해서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행17:11).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베뢰아 사람들처럼 해야 한다. 스스로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자기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자기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깥에서 들은 대로 믿고 따르는 것은 결코 잘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아멘파 그리스도인들을 보라. 그들 중에는 아름다운 신앙의 향기를 발하는 성숙한 성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녔어도 신앙적으로 성인이 되지 못하고 유아적인 수준에서 맴도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는 지식도 많고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는 이상하게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목사 의존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또 단순한 성경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성경이 말하는 바가 뭔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도 많다.

왜 이렇게 됐을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봉사와 헌신만 가르치고 강조했지, 신앙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눈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세계를 열어서 보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매 순간 선택의 갈등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목회자들은 교회 성장과 목회적 필요에 도움이 되는 것들만을 강조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치하기 그지없는 유아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순진하고 어린아이 같은 아멘파 그리스도인들은 양과 같아서 목회적인 필요에 의해 걸러진 말씀을 양식이라고 의심 없이 먹고 따르다보니, 결과적으로는 눈곱만한 구원의 세계에 붙잡혀 하나님나라가 아닌 교회 왕국을 세우는 일에 소중한 헌신을 쏟아 부은 격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한국 교회 안에 고상하고 성숙한 성도들보다는 무지하고 단순하며 편견에 붙들린 아멘파 성도들이 많아지게 된 것은, 목회자들이 진정한 복음의 세계로 안내하지는 않고 신앙의 열심을 강화하는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진정한 복음에 못 미치는 ‘쪽복음’(왜곡된 복음)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지금의 한국 교회다. 한국 교회가 덩치는 커졌지만 세상에게 욕을 먹고 흉포한 모습으로 구겨져 손가락질과 조롱을 받는 오늘의 교회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건 필연이다.

정병선 목사 / 전 수원 한길교회 담임

* 필자는 한길교회를 개척하고 15년 동안 목회하다가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몸을 돌보며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대장간에서 만든 <어느 목회자의 고백>, <신앙의 마스터클래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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