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신비의 기도 세계에 빠져봅시다
새해에는 신비의 기도 세계에 빠져봅시다
  • 김종희
  • 승인 2007.12.29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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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어릴 때 나의 아버지는 집에 거의 안 계셨다. 1년 내내 부흥회를 인도하러 다니셨기 때문에, 아버지 얼굴을 보는 날보다는 못 보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20~30년 전에는 교회 부흥회를 월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저녁까지 하면서 아주 뽕을 뽑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볼 수 있는 날은 주말뿐이었다. 그것도 주로 교회에서.

토요일 오후, 피곤에 지쳐서 현관문을 들어서는 아버지를 맞을 때 어머니는 일주일 동안 밀린 빨래 보따리와 책이 잔뜩 든 가방을 챙기지만, 철딱서니 없는 우리 새끼들은 부흥회를 인도했던 교회에서 챙겨준 먹을거리들을 챙긴다. 먹을거리라야 특별한 것이 없다. 강사 숙소에 넣어주는 주전부리할 것들을 모았다가 집에 가져오신 것이다.

늘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는 아빠의 모습에 우리 두 딸은 아주 익숙하기 때문에 내가 현관문을 들어설 때 아이들은 내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 관심이 없다. “아빠” 하고 뛰어와서 둘이 돌아가면서 뽀뽀를 ‘쪽’ 하고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조잘대다가 잠시 후 지들 할 일을 찾아 돌아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아버지는 속으로 조금 섭섭하셨을 거다. 아버지 얼굴은 보는 둥 마는 둥 손에 들린 먹을거리에만 마음이 가 있으니. 그런 생활이 적어도 20년은 지속됐던 것 같다. 죄송하다. 그래서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 얼굴을 마음으로라도 자주 보려고 애쓴다.

▲ 새해의 기도는 매달려서 조르는 간청의 기도가 아니라 따뜻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귐의 기도가 되었으면 한다.

연말과 연시를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맞으려는 사람들은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갖는다. 조금 더 경건한 사람들은 금식도 한다. 마치 현관 앞에 도착한 아버지를 마중나간 자식들 모습 같다. 근데 어떤 자식은 아버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데, 어떤 자식은 자기가 아버지에게 부탁한 것을 제대로 챙겨갖고 왔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심한 경우는 이른 새벽 정화수 떠놓고 빌어야 소원 성취가 더 잘 될 거라고 믿는 아낙처럼, 2008년 1월 1일이 시작되는 종이 ‘땡’ 하고 칠 때 하나님께 소원을 빌 요량으로 기도 제목 리스트를 만들어서 기도의 동산에 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가.

야베스의 기도, 히스기야의 기도,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 기도 응답을 몇 만 번 받은 사람 등등, 기도와 관련한 책이 수백 가지가 출판되어 있고, 신앙 서적의 스테디셀러들은 대개 기도와 관련된 것들이다. 기도는 그만큼 우리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주제다.

그런데 수십만 권이 팔린 책들을 보면, 자식이 아버지와 만나서 따뜻하고 사랑스런 교제를 나누는 것에 대한 내용보다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에게 떼를 잘 써서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받을 수 있는지 그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안내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김영봉 목사가 2002년 쓴 <사귐의 기도>가 지금도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지만,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만큼 왜곡된 기도가 한국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김영봉 목사는 “기도로 흥한 한국 교회, 기도로 망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출판된 지 오래 되었고, 제법 많은 독자들의 손을 탄 <사귐의 기도>를 지금 다시 소개하는 것은, 2008년의 문을 여는 새해 첫 기도부터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 잘못된 기도 방식에 대해서 다섯 가지를 소개했다.
첫째, 하나님을 크리스마스 때 선물 보따리를 짊어지고 찾아오는 산타클로스처럼 여기고, ‘달라’고 떼를 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산타클로스에 있지 않고 선물에 있다.
둘째, 기도로 만사를 변화시키려고 한다. 기도를 통해 일어나야 할 참된 변화는 바로 ‘나’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이고 내 주변의 만사를 변화시키려고 한다.
셋째, 기도로 하늘 보좌를 움직이려 한다.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과부와 재판관’ ‘못된 친구’ 비유를 왜곡시켜 인용한다.
넷째,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을 오해한다. 기도와 삶을 단절해서 생각하고 살아갈 때 이런 오해가 생긴다.
다섯째,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신다’면서 하나님께 억지를 부린다. 그래서 미래의 배우자를 위한 기도 제목을 보면 마치 중매쟁이한테 건네는 신랑 신부감의 자격 기준 목록 같다.

▲ 김영봉 목사가 쓴 <사귐의 기도>와 <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선집>.
저자가 소개한 문제점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문제의 핵심은 하나다. 내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조르기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여기에 과거로부터 이어지고 있는 한국 특유의 무속적 종교성,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는 성공주의와 물질주의, 여기에 편승하는 왜곡된 성서 해석과 설교 등이 결합되어, 기형적인 기도가 한국 교회에서 판을 칠 수밖에 없도록 되어 버렸다.

기도의 본질은 ‘사귐’이다. 사귐의 기도를 하게 되면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하고 행복하다. 우리의 연애 경험을 돌이켜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떠올려진다. 그 사귐이 깊어질수록 상대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는, 결국은 내 자아가 변한다. 영적으로 성숙하게 여물어간다. 하나님께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게 된다.

이렇게 성숙의 길을 걷지 못한다면, 신앙생활 경력 30년, 40년을 자랑한들 걸음마 수준을 못 벗어난다. 목사요, 장로요, 권사라고, 그럴듯하게 직분을 내놓은들 영적 미숙아일 뿐이다. 그래서 2008년에는 기도가 바뀌어야 한다.

이 책의 특징을 꼽으라면 사귐의 기도를 위해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에 있는 것 같다. 침묵기도, 묵상기도, 금식기도, 기도문 읽기, 단문기도 하기, 기도일기 쓰기 등. 한국 교회 정서로서는 익숙지 않은 것들이다. 이 기도 방법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열어놓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지속적으로 훈련해서 하나님과 사귀는 기도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도록 애쓰는 것, 이것이 2008년 신앙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죄인 된 인간의 본성상 이것은 힘겨운 싸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뼈가 부러지면서까지 하나님과 겨뤄서 이긴 장면을 마치 기도의 가장 모범적인 모습인 것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중심적이고 소유 지향적이고 투쟁적인 자아와 겨뤄서 이기는 2008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도가 바뀌면 만사가 바뀐다. 그런데 그 만사가 내가 원하는 대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바뀐다.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고, 영적으로 충만해지고, 사랑의 능력이 나타나고, 피조 세계와의 관계도 회복된다.

바로 이런 것이 참된 ‘신비주의’이다.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뿅’ 하고 요정이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주는 사이비 ‘신비’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이전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교통을 하는 참된 ‘신비’ 말이다. 새해에는 하나님과 사귀는 기도의 세계, 신비의 세계에 빠져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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