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초라한 퇴장 선택한 어느 목사 부부
가장 초라한 퇴장 선택한 어느 목사 부부
  • 홍성종
  • 승인 2008.01.01 16:56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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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55세에 시작해 짧지만 큰 목회 한 텍사스 온누리침례교회 조용국 목사 조은혜 사모

“예배당 건물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헤쳐보아도 몽매라도 사무치던 예배당을 떠올릴 수 없었다. 다만 20여년 전 살았던 소박한 집과 오가던 학교 길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갖은 고초 끝에 예배당 건축을 끝낸 조용국 목사(67)는 2005년 4월 텍사스 지역 부활절 연합예배 사회를 보러 가던 중 고속도로 램프를 운전해 나오다 밤새 내린 비와 우박이 뒤엉킨 길에서 미끄러지며 사고를 당했다. 자동차가 제어를 잃더니 몇 차례 회전한 후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몸이 튕겨나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마치 얼음판이 푹 꺼지듯 짙푸른 암흑 속으로 인생이 곤두박질쳤다. 조 목사는 중환자실에서 속수무책으로 3주 동안을 그렇게 보냈다. 그 즈음 희미한 의식이 환영처럼 흐늘거렸다. 반쯤 열린 그의 눈은 눈물이 고여 축축했다.

사고는 잔인했다. 출혈은 말할 것도 없고, 갈비뼈가 8곳 이상 부러졌다. 목뼈를 비롯해 대퇴골인 허벅지는 완전히 탈골되었다. 7~8차례 걸친 수술에 마취의 연속이었고, 기관지로 넣은 호흡기는 목소리조차 변하게 해 단순한 의사소통까지도 가로막았다.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이 작은 새 가슴에서 뽑혀난 새털처럼 처연하다 못해 엷은 콧김에도 흩날려 나갔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처참하게 망가져 혼을 일탈하려는 육신도 육신이지만, 어디서 출현했는지 알 수 없는 어둠이 최근의 기억을 온통 앗아가버렸다. 생각이 도통 나질 않았다. 예배당의 도면, 성당처럼 솟은 천정, 얼기설기 엮은 벽돌 색깔, 곳곳에 조개 모양으로 심어둔 조명, 빛이 새어 들어오던 창틀. 어느 것 하나만이라도 잡아내려고 기억의 바다에 수없이 자맥질을 해보아도 심연에 다다르기도 전에 숨이 차올라 이내 물 위로 올라올 뿐이었다.

중환자실에서 생사와 씨름하며 조 목사는 광명한 천사의 인도로 천국 한번 구경 못했다. 암흑도 오래 견디다보니 어떤 의미가 되기도 했다. 그 어둠을 헤매며 어릴 적 동네 바퀴를 돌 듯 돌고 돌았다. 그러면 자식이 하나님의 섭리로 태어났다던 어머니가 저 감나무 아래서 손짓하였다.

중환자실서 생사와 고투…사고 충격으로 일시적 기억 상실

조 목사는 1960년대 미국에 건너와 고초 끝에 화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자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뉴멕시코주립대 교수 시절인 나이 쉰다섯, 한참 늦게 불현듯 교수직을 접고 목회에 들어섰다.

조 목사의 왼쪽 눈썹 위 이마에는 움푹 팬 작은 상처가 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시절 공비 토벌 당시 국군이 쏜 유탄에 맞아 절명할 뻔한 자식의 이마에 난 총알 자국을 어루만지며 “너는 특별한 하나님의 자식이다”고 했다. 어머니는 “1센티만 더 들어가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 너는 주의 일을 해야 한다”고 습관처럼 되뇌었다.

1994년 어느 날, 미 과학재단 등으로부터 받은 연구 지원비로 연구에 몰두하던 중 갑자기 한쪽 눈이 보이질 않았다. 기별 없이 다가온 실명이었다. 원인은 이마 주위의 커다란 종양이 좌우로 엇갈려 있는 시신경을 짓누르고 있던 탓이었다.

갖은 수소문 끝에 당대 최고의 의사를 찾아내 캘리포니아로 수술을 떠났다. 일주일이면 충분하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무사히 수술은 끝났지만, 감염이라는 복병을 만나 후유증에 시달려 꼬박 넉 달을 입원했다. 다행히 학과장은 한 학기 휴직 처리를 해주었다.

그러나 병상에서 조 목사는 이마에 난 상처와 이마 속의 종양을 연결하며 자꾸만 마음이 쇳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자신의 인생이 자신 밖에서 자꾸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어머니의 기도로 성장한 세월과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서원했던 자신의 모습이 스치듯 지나갔다.

하나님의 일을 안 한 것도 아니다. 평신도로서 교회도 개척하고, 틈나는 대로 복음을 전했지만, 그렇게 버텨가는 자신이 왠지 궁색하게 느껴졌다. 조 목사는 하나님과 지킨 약속을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여겼다. 퇴원 후 조 목사는 모든 연구를 중단하고 당장 신학교에 등록했다. 가족들의 반대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 대학 교수를 그만두고 뒤늦게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 10년 동안 목회한 후 가장 초라한 퇴장을 선언한 조용국 목사와 조은혜 사모. 짧은 목회지만 진한 감동을 남기고 있다. 사진은 지난 12월 30일 송년을 맞아 교인들의 초청으로 플로리다 탈라하시한인침례교회를 찾은 조 목사 내외의 모습. 이 교회는 조 목사가 22년 전 초임교수 시절 몇몇 교인들과 힘을 모아 개척한 교회이다.
하나님과 서원,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결심으로 퇴원 후 신학교 입학

나이 쉰다섯. 남들은 중년 목회자로 이미 꽃피고, 열매를 거둘 즈음, 그렇게 시작한 목회였다. 버린 것이 많은 만큼 꿈도 많았다.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회를 개척하고, 성도들을 온 힘을 다해 섬겼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님 대하듯 섬겼다. 사례비도 반납했다. 달라스 공항에 나가 성도들을 마중하고, 병원과 법정을 좇아다니며 통역하고, 심방하고, 일대일 성경을 가르치며 말씀을 전했다. 심지어 교인 가정의 자녀 문제까지 학교를 찾아다니며 해결하기도 했다.

그러다 목회 3년 차에 접어들어 텍사스 앨링톤에 당시 2에이커 땅을 구했다. 구매 자금은 이자를 지급하기로 하고 워싱턴서 직장을 생활하고 있는 아들에게서 꿨다. 이 돈을 종자돈으로 예배당을 지었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모든 것은 조 목사가 감당해야 했다. 조 목사는 자신을 직접 건축업자로 등록했다. 자신이 직접 공법을 선정하고, 규모와 소요 공간, 부대시설, 주차장, 조경까지 직접 기본 설계를 하는 데만 꼬박 6개월을 매달렸다. 실제로 공사 과정에서 토목, 골조, 지붕과 벽체뿐만 아니라 현관과 창문 도어, 정화조, 상하수도 배관까지 일일이 챙겼다.

조 목사는 이즈음 공사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터 파기부터, 기초 철근, 배관, 거푸집을 시공하고 마지막으로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과정에서 혹시 빠진 부분이 없나 일일이 확인했다. 밤늦게 작업이 진행될 때에는 전기도 없는 공사 현장을 모래와 잡석 더미, 건축 자재 사이를 거닐다가 넘어지기 일쑤였다.

뒤늦게 시작한 목회 인생을 걸고 그렇게 지은 교회이다. 개척 3년 만에 100만 달러 이상을 들여 그림 같은 예배당을 헌당했다. 예배당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들러 결혼 예식장으로 빌려 쓸 수 있겠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이제 사람들이 들어오고, 꿈같은 목회를 펼칠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사고를 당한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다. 하나님이 뭔가 실수를 하셨다. 하나님이 부르셨지 않았는가.

뒤늦게 시작한 목회, 열정으로 일하며 개척 3년 만에 예배당 짓고 토대 마련

목숨은 기적으로 위기 상황을 벗어났다. 교인들도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부활절 새벽 살아난 사람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셨고, 목사님이 사셨다”고 감격했다.

그러나 회복 과정은 더뎠다. 마음이 앞서 갔다. 교회에 돌아와 보니 상당수 교인이 흩어져버렸다. 교회를 왔다가 목사도 없고 하니 빠져 나가기를 반복한 것이다. 조 목사는 이를 악물고 휠체어에 의지하는 목회를 했다. 우선, 임시목사를 수소문해 선교사로 나가는 목사를 불러 몇 달을 견뎌냈다. 이후에는 간간이 설교자를 청빙해 설교했다.

이즈음, 조 목사를 내조한 아내 조은혜 씨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인들이 지쳐갔다. 영적으로 말씀의 꼴을 먹여야 하는데, 심방도 하고, 새벽기도도 인도해야 하는데, 임시방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괴로운 현실이었다. 사모는 이때 모세의 인생을 생각했다.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이제 거민을 물리치고 약속의 땅에서 꿈을 펼칠 즈음, 하나님은 난데없이 “너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돌팔매질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겨 이른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쓸쓸한 버림을 당한 모세를 떠올렸다.

십자가에서 버림 당하신 예수님은 어떠했는가. 사랑하는 제자들도 저버린 초라한 십자가로 퇴장한 예수님의 형상과 맞닥뜨리자 더는 주저할 수 없었다.

사모의 결론은 우리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살고 교인들이 살도록 우리가 물러나야 한다고 남편에게 권면했다. 조 목사는 펄쩍 뛰었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젊은 부목사를 곁에 두고 담임목사로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늦게 선택한 목회의 길, 화려하게 부흥시키고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예배당 뒤편 땅에 선교센터를 세우고 비전을 선포했지 않았는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의 간곡한 설득을 조 목사는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도 목회요, 하나님이 주신 환경을 받아들여 퇴장하는 것도 목회라는 것을 오랜 번민 끝에 받아들였다.

그렇게 교인들의 만류도 뒤로하고, 개인적으로는 목회의 길로 들어선 후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목회 10년을 정리한 것이다. 육신의 병을 안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쓸쓸한 퇴장을 선택했다. 교회 측은 원로목사로 추대했지만, 이 또한 거절하고 교회를 나와 미국 교회에 출석했다.

이 당시 조 목사의 부부가 남몰래 흘렸던 눈물을 지켜본 지인은 당시를 회상했다. 조 사모는 “나 외롭다. 우리 부부 인생이 너무나 초라하다”며 교인들에게 차마 말 못할 심경을 안고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쓸쓸한 퇴장, 그러나 가장 복음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간 삶

세상은 번영의 신학을 신봉하고, 모든 일이 잘 되어야 하나님의 뜻이라는데 조 목사 내외는 거꾸로 살았다. 성공한 목회를 벤치마킹하기에 바쁜 세상에 조 목사는 그렇게 목회를 접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 조 목사 부부의 목회 인생. 보기 드문 결단이 난의 향기가 천 리를 가듯 번져나가고 있다.

조용국 목사 프로필

∆ 텍사스 온누리침례교회 개척 및 담임 (1997. 5 - 2006. 11)
∆ 미남침례교신학대학 졸업 (the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M.Div, 1995. 1 - 1997. 12)
∆ 뉴멕시코주립대학 교수 (Chemical Engineering, 1988. 8 - 1994. 12)
∆ 플로리다주립대학 교수 (Chemical Engineering, 1984. 5 - 1988. 7)
∆ 루이지애나주립대학 Research Associate (1980. 10 - 1984. 5)
∆ 텍사스 휴스턴대학 졸 (Ph.D. in Chemical Engineering, 1977)
∆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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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똘로메와 같은생각임 2013-06-14 12:04:45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보니 교회모기지내는데만 눈이 벌겋고 영혼구령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삯군들입니다.

hurkyong 2008-01-24 23:51:24
마지막 기사글의 내용과 같이 세상은 번영의 신학을 신봉하고 모든일이 잘되야 하나님뜻이라는데 이기사의 긴 여운이 한참동안이나 마음을 치는군요.

바르똘로메 2008-01-04 09:14:55
그러나 제가 글을 읽으며 불편했던 것은 위 글이 검증을 거치지 않은, 홍기자님의 주관적인, 또 미화된 기사라는 사실입니다. 아마 조목사님도 불편해 하시지 않겠나 싶습니다. 물론 홍기자님께서 옛교인에 관해 좋은 의도로 쓰신 것은 압니다만, 만일 뉴조가 개교회 회보 수준이 아닌, 객관성과 사실에 바탕을 둔, 권위있는 크리스쳔언론을 지향한다면 본 기사와 같은 글은 뉴조의 객관성과 권위를 심히 의심케 할 것입니다

바르똘로메 2008-01-04 08:58:32
물론 조용국목사님 나쁜 분 아니시고 파렴치한 목회자아니셨읍니다. 그러나 그분밑에서 사역했었던 부사역자들, 온누리 교인들, 그리고 알링턴 지역의 목회자들에게 자문을 구하시면 그분에 대한 평가가 조금 다를 것입니다. 조목사님 귀한 간증있으신 분이시고, 목회시작하셨단는 것 자체로도 귀하기때문에 그분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는 유보하겠습니다.

바르똘로메 2008-01-04 08:50:10
이런 류의 댓글을 한번도 써보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이 댓글이 과연 덕을 세울수 있을까 많이 망설였지만, 뉴스앤조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뉴조의 기사가 좀더 객관적이고 검증된 기사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쓰게되었습니다. 홍성종기자님께서는 혹시라도 조용국 목사님의 사역내용을 그분이 사역하시던 알링턴 지역 목회자들, 또는 알링턴 온누리침례교인들에게 자문을 구해보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