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다가 아니고 빌라도인가
왜 유다가 아니고 빌라도인가
  • 김기대
  • 승인 2015.11.20 09:0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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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한기총과 한교연은 빌라도에게서 배우라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대목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사도신경이 처음 작성될 때는 없었다. 이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공공의 적'으로 사도신경에 추가되었다.

4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이라면 반드시 외어야 할 사도신경에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흉'을 유다로 하지 않고 왜 빌라도로 했을까?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전승에 따르면 빌라도는 우유부단하고, 예수를 살려줄 마음도 있었고, 성명 미상의 그의 아내는 기독교인이었다고 전해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반면 유다는 예수를 판 배신자이고 직접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일차적 책임자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 유다의 배신으로 죽음에 이르사'라고 하지 않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하고 있다.

로마서 1장 1절만을 가지고 <남겨진 시간> (코나투스, 2008년)이라는 걸출한 책을 썼던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빌라도와 예수> (꾸리에, 2015년)를 통해 빌라도의 역할에 주목한다.

 

아감벤은 예수의 재판 장소가 무려 7번이나 바뀌었던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날 밤의 일을 연극적 서사로 설명한다. 5시간 동안 진행된 이 재판에서 빌라도는 '진리'와 '왕국(하나님 나라)'에 대해 궁금해 한다. 여기서 재판석은 베마(bema)인데 이 베마에서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이 대립” 하고 있다. 이 재판 이후 세속과 하늘, 판결과 구원은 철저하게 분리된다. 고린도 후서 5:10에 따르면 베마는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베마) 앞에 나서야 합니다." 이처럼 베마는 성서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곳이다.

세속과 하늘, 판결과 구원이 분리되면서 위기(크리시스)상황이 발생한다. 이는 감히 사실이 진실을 판결하고 지상의 왕국이 영원의 왕국을 판결하려 함으로써 초래된 위기 상황이다. 아감벤이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굳이 신학적으로 해석을 하자면 현대 문명의 위기는 '영원'과 세속이 분리되면서 생겨난 위기다.

 

빌라도 재판의 의미

예수의 재판은 판결문조차 없었던 재판 같지 않은 재판이었다. 우유부단한 빌라도는 예수를 대중들에게 '넘겨줌'으로써 판결없는 사형 집행을 묵인한다. 이런 판결없는 재판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서구 사회를 지탱해 온 법적 질서가 이미 예수시대부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감벤의 설명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판결받은 것이다. (…) 이것이 판결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복음 3:18-19)는 예수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세상에서 말하는 법적 판단의 기준을 파기해 버린다.

영리한 빌라도는 직접 예수를 심판하지 않고 대중에게 넘겨줌으로써 최종 판단을 유보한다. 그는 이미 진리를 '법'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빌라도의 이런 선택이 도리어 예수를 진리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유대민족의 원로 회의가 아닌 로마 제국의 대표가 예수를 심문한 것은 구원사적인 의미에서 필연적인 일이었다. 예수는 진리, 즉 자기 자신을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십자가를 통해 제 살과 피를 넘겨줌으로써 예수는 스스로를 증명했다. 완전한 진리가 된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로마 제국의 공적인 시스템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빌라도와 예수>, 123쪽

빌라도가 예수에게 던진 질문, "진리가 무엇인가"는 세속 법정의 판단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고민의 흔적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사도신경을 최종적으로 승인한 교부들이 유다보다 빌라도를 집어 넣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유다와 빌라도 모두 예수에게 고난을 가한 인물이 맞기는 하지만 그 중 빌라도는 역설적이게도 예수를 인정하고야 말았다.  

 

한기총과 한교연 소속 목사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지만

지난 11월 14일 서울 광화문에서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다. 정부 측은 법적 조항을 들이대며 이 날의 시위가 불법 시위였음을 강조한다. 반면 시민들은 평화시위를 정부가 불법적으로 진압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농민 한 명이 뇌사 상태에 빠졌다. 개인에게 퍼부어진 살기 어린 물대포가 설사 적법한 행위라 할 지라도 그 때 말하는 '적법'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시위대건 정부건 '법의 테두리'안에서만 논쟁을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아감벤의 <빌라도와 예수>를 읽은 뒤 물어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세속 법의 집행자들이 과연 진리를 재판할 수 있는가? 역사는 왜곡되어서는 안되고 민중의 삶은 개선되어야 하고,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런 종류의 진리' 말이다.

국정교과서 찬성이 악이고 반대는 선이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런데 감히 진리의 영역을 판결하려는 정부측의 손을 들어주는 한기총과 한교연은 빌라도의 재판에 담긴 의미를 알기는 하는가? 그들은 입으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면서 항상 세속적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집단이다. 세속의 법이라는 것이 빌라도가 앉아 있던 베마에서 이미 효력을 상실했는데 이들은 여전히 세속으로 영원을, 사실로 진실을 판단하는 데 앞장 서고 있다. 자신의 신념을 권력에 예속시키는 이들에게 <빌라도와 예수>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지만 책이 많이 어려운 게 흠이다.

책의 내용을 기독교적으로 요약하면 이것이다.

'빌라도는 제아무리 당시 세계의 보편적 질서의 토대인 로마 제국을 위해 일하는 총독이라 할지라도 영원한 진리인 예수를 재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비겁하게도 예수를 끝까지 보호하지는 못했지만 영원한 진리가 드러나는 시기를 종말까지 유보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러므로 진리에 의한 심판(베마)은 종말의 순간에 일어난다. 그들이 그렇게 편들고 싶어하는 세속의 가치와 권력과 법은 그때 진리로 인정받지 못한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 미쥬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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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나생각 2015-11-24 09:58:10
이 글에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성도가 앞으로 살게될 영원을 암시하고 가르치고 교훈하는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배우고, 그분이 통치하시는 그 나라를 배워야 할 곳입니다. 따라서 빌라도(이 땅의 감독자, 통치자)가 예수님(영원한 하늘의 통치자)을 판결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비진리가 진리를 판단하는, 잠깐이 영원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지요.
이 글은 교회가 이 세상 정부의 정책을 옳다 그르다고 판단하는 기준을 다룬 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영역에 속한 영적실체이지 정부통치권을 확대하고 설명하는 그런 세속적 실체는 아니라는 것에 기초한 글입니다. 한가지, 이 글을 쓴 나 자신은 NEWS M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고, 단지 무슨 말인지 이해못하시는 몇몇 분들의 이해를 돕기위해서만 댓글을 쓴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땡구아빠 2015-11-20 13:18:18
글의 요점이 뭔지 모르겠군요. 제목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모호하구요...

진리 2015-11-20 12:01:18
소위 목사이며 편집장이라시는 분이 진리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민중의 삶이 개선돼야 하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 진리라고요 ?
김기대 편집장님은 공인으로서 본인의 글 주장에 더욱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글은 글쓴이의 신앙인격이기도 함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