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과 예수님
슈퍼맨과 예수님
  • 권연경
  • 승인 2015.12.0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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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성탄에 관한 묵상

성탄의 색조는 언제나 흥분과 설레임이다. 그리스도의 성육 사건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의 생애 어떤 사건 못지않은 절실한 관심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호들갑은 제대로 된 대접과 다르다. 분위기를 잡으며 법석을 떨면서도, 정작 성탄의 의미를 놓칠 수 있는 것이다.

성탄절이면 우리는 예수의 탄생을 기뻐한다. 하지만 그의 탄생이 10년을 기다린 내 딸의 탄생보다 더 놀라워야 할 까닭이 있을까? 사람의 삶이 다 거기서 거기인 마당에, 누군가 또 한 사람이 그런 삶을 공유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게 ‘복음’일 이유는 없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대속의 교리를 들어 성육의 논리를 이해하려 한다. 사람의 죄는 사람만이 속할 수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셔야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처음부터 부자연스럽다. 사람만이 사람의 죄를 속한다면 구약의 동물 제사는 애초부터 무의미하다. 짐승들의 피가 뿌려져 사람의 육체가 ‘정결하고 거룩하게’ 된다는 말(히 9:13)역시 억설에 불과할 것이다. 설사 대속 교리가 성육신을 요구한다 해도 이것이 예수의 ‘탄생’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십자가의 대속이 필요한 전부라면, 불쑥 나타나 야곱과 싸웠던 하나님처럼, 곧바로 십자가의 무대로 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실 ‘아기 예수’의 탄생 속에는 대속만으로 덮을 수 없는 구원의 또 다른 면모가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대속, 하지만 내 삶은?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다. 자신의 고백처럼, 그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를 위한’ 그의 죽음은 또한 ‘우리를 대신한’ 죽음으로 번역될 수 있다. 스스로 죄의 짐을 해결할 수 없다면, 스스로 죄의 고리를 풀 수 없다면, 누군가 우리 대신 그 짐을 지고 그 고리를 풀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해결사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은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대신’ 해주는 것이 은혜는 아니다. ‘대속’이라는 우산 하나로 은혜의 소나기를 가리기는 어렵다. ‘대속’에 대한 신뢰는 쉽게 은혜에 대한 경멸로 변질된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셨기에 우린 이제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누린다고 말한다. 우리가 할 일이라곤 십자가의 굿을 보며 구원의 떡을 먹는 것뿐이다. 다행히도 이제 내 삶은 구원에 아무 여파를 미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은혜의 승리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의 삶 자체는 이런 은혜의 논리에 끊임없이 반기를 든다. 구원이 아무리 ‘그저’라고 해도, 나는 내 삶이 늘 고민스럽다. ‘오직 은혜’라면 자동적이어야 할 구원의 확신조차 미꾸라지처럼 쉽게 내 삶의 틈새를 빠져 나간다. 이것이 믿음의 결핍일까? 나의 성공과 실패가 모두 무의미해지는 은혜의 정상에 아직도 못 오른 탓일까? 내 삶에의 집착을 버리고 은혜만 의지하며 기뻐야 하는데, 아직도 나를 버리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불신앙의 발버둥일까? 할렐루야를 연발하며 한없이 이기적인 김 집사처럼, 그런 속편함이 제대로 된 믿음인 것일까? 하지만 구원이 나의 삶과 무관하다는 주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나로 하여금 오늘의 시간을 살도록 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내 오늘 나의 삶과는 무관한 무엇이라면, 나는 그 소식을 복된 소식으로 느낄 수 있을까? 높이 솟은 나무일수록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버티는 것처럼, 영원으로 향하는 우리의 소망 역시 내 오늘의 삶 깊이 그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내 삶에 아무런 공명이 없어도 천상의 음악이 여전히 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내 삶을 대신하는 구원이 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구원을 향한 참여와 성숙

어른이고 싶은 아이에게 ‘대신’은 은총이 아닌 저주다. 아빠의 ‘대신’이 더 멋진 결과야 주겠지만, 아이가 바라는 것은 깔끔한 ‘대신’ 아닌 실수투성이의 ‘직접’이다. 물론 ‘아빠!’를 외치며 구원 요청을 해야 할 상황도 많다. 아이는 그런 도움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직접’하고 싶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을 꿈꾸고, 그렇게 어른 흉내를 내면서 정말로 어른이 되어 간다. ‘대신’이라는 콩나물시루에 담겨 은총의 조롱물을 마실 수도 있겠지만, 아이는 ‘직접’이라는 논두렁에 심겨 비로 내리는 은혜를 맛보고 싶다. 업어달라고 떼를 쓸 때도 있겠지만, 졸린 눈을 부비면서도 직접 걷겠다고 고집부릴 때도 있는 법이다. 수월한 세발자전거보단 힘겨운 두발자전거를 고집하는 것은 은총을 거부하는 불신앙의 발버둥이 아니라 보다 성숙을 위한 본능적 몸짓일 것이다.

구원은 수동적으로 받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일구어 가기도’(work out)한다(빌 2:12).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면서 또한 자라가야 할 목적지이기도 하다(벧전 2:2). 따라서 이런 구원의 열쇠인 그리스도 속에는 대속과 누림의 수동적 차원 뿐 아니라 참여와 일굼의 능동적 차원도 존재한다. 이 대목에서 하늘의 구원 이야기는 지상의 삶 이야기와 겹친다. 성탄의 거룩함은 바로 이 하늘과 땅의 만남을 포착한다. 하늘 영광에 빛나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의 고난을 함께 하는 사람의 아들로, 하늘의 사랑이 지상의 고난으로 나타난 거룩한 ‘함께 하심’(임마누엘)의 사건이다.

성육을 통한 구원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면에 있어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한다(2:17). 이들은 모두 ‘혈과 육에 속한’ 존재로서(2:14), ‘일생동안 죽음의 공포에 매여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간다(2:15). 예수의 오심은 이 죽음의 공포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다(2:15). 물론 이 해방은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마귀의 처치를 전제한다. 결국 그리스도는 죽음의 세력을 쥔 마귀를 처단하기 위해 ‘혈육에 속한 자’가 되셨다. 말하자면 죽음의 공포를 해결하려고 스스로 죽음의 공포 아래 놓였다는 것이다(2:14).

내가 나를 해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의 구원은 대속적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해방은 하늘에서 날아와 나를 낚아가는 슈퍼맨의 구출과는 다르다. 그는 내 입장이 되었고, 내 입장에서 죽음의 공포와 투쟁하였다. 물론 십자가는 이 투쟁의 절정이지만, 탄생 이후 그의 삶 전부는 이런 대결의 과정이었다.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였다(4:15). 내가 시험에서 자유롭지 않듯, 그 역시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했고’(2:18), 그 또한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울부짖어야 했다(5:7). 나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나의 ‘형’이었다(2:11, 17). 하지만 그는 ‘죄가 없었다’(4:15).

이 진술의 핵심은 존재론적 순결이 아니라 그의 철저한 순종이다. 그는 비록 아들이셨지만, ‘받으신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웠고’ 이를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5:8-9). 말하자면 그는 나처럼 한계 속의 인생을 살면서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실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여기서 구원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5:8-9). 그는 신적 온전함을 포기한 채, 인간의 고난을 겪으면서 온전함에 이르러야 했다(2:10). 이것이 구원의 방식이었다.

내 삶의 구원

여기서 예수의 구원은 슈퍼맨의 구출과 인간의 탈출을 절묘하게 결합한다. 스스로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을 타개했다는 점에서 그의 구원은 슈퍼맨의 구출처럼 대리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슈퍼맨은 푸른 쫄바지와 빨간 망토 대신 안경 쓴 아저씨로 악당들과 맞선다. 그리고 그들을 눌러 이긴다. 날개를 접고 평범한 소년으로 후크 선장과 대결하는 피터 팬과 같이, 예수의 투쟁과 순종 속에서 인간의 삶은 구원의 약속을 배태한다.

그의 승리는 슈퍼맨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의 승리다. 그러기에 그의 삶은 내 삶의 구원을 위한 가능성이요 통로로 작용한다.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5:9). 피터 팬의 활약을 따라 포로였던 네버랜드의 꼬마들이 해적들과 맞서 승리하듯, 우리 역시 ‘형님’이요 ‘오빠’이신 예수의 지휘 아래 우리를 누르던 죽음과 맞서 승리한다. 바로 여기에 복음이 있다.

그가 먼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셨기 때문에 나 역시 죽음의 공포와 싸워 이기며, 나와 같은 인간이 걸어간 길이기에 나 역시 그 길을 갈 수 있다. 예수는 바로 이런 승리의 길을 닦아 주셨다. 구원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다. 그의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이자 또한 나의 승리이기도 하다. 나와 같은 사람의 승리, 바로 나의 승리 속에서 우리는 구원의 희망을 감지한다. 여기서 구원은 ‘대신’의 단계를 넘어 ‘함께’의 자리로 나아간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다. 나와 같은 인간이면서 나의 죄를 속하는 분, 스스로 시험을 받으셨기에 시험 받는 나를 이해하고 도우시는 분이다(2:17; 4:14-15).

그리스도의 고난은 나 역시 고난 속에 있다는 사실에서 그 의미를 얻는다. 그의 고통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내가 죽음의 고통 아래 있기 때문이며, 그의 시험이 흥미로운 소식인 것은 나 역시 동일한 시험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길은 ‘대신’ 가신 길이 아니라 ‘앞서’ 가신 길이 된다(6:20). 내가 가야할 길을 만들어 내고, 그 길의 안내자가 되시는 분, 내 구원의 ‘개척자’요 내 ‘선구자’다. 믿음의 길을 먼저 가며 우리를 부르시는 분, 순종으로 온전케 된 사람으로 우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는 분, 그래서 그는 우리 ‘믿음의 개척자시며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다(12:2; 2:10. 개역에는 믿음의 ‘주’로 번역됨).

성탄, 예수와 함께 걷는 구원의 길

훈련소 시절 동료 하나가 가스실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다섯 명의 조교가 막고 있는 문을 밀치고 달아났었다. 놀랍게도 중대장은 그 친구를 벌주지 않았다. 공포에 떠는 그 친구와 오랜 대화를 나눈 뒤, 그는 그 친구의 손을 잡고 ‘함께’ 가스실로 들어갔다. 중대장은 그 친구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삼았고, 그 친구는 중대장의 승리를 자기 승리로 만들었다. 중대장이 ‘대신’ 가스실로 갔다면, 그것이 그에게 구원이었을까?

아기 예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함께 구원의 여정을 떠나는 성탄의 밤은 거룩하다. 그가 내가 되심으로써 나를 자기처럼 만드시는 분, 먼저 영문 밖에서 죽음의 고통을 감내하심으로써 우리가 뒤따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자애로운 대 제사장(13:12-13). 먼저 영원한 제사로 성소를 향한 길을 내심으로써 성소를 향한 우리 걸음에 담력을 주신 믿음의 선구자(9:12; 10:19-20). 그래서 우리는 이 거룩한 성탄의 밤에, 아니 성탄의 거룩함을 간직한 우리의 하루하루에 은총과 희망을 노래한다.

권연경 교수 / 안양대학교 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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