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들이 제사장이다"
"교인들이 제사장이다"
  • 신성남
  • 승인 2015.12.09 05:3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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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개신교는 썰물, 가톨릭은 밀물
▲ 신성남 집사 © <뉴스 M / 미주 뉴스앤조이>

한국 가톨릭은 지난 25년간 무려 400%의 급성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현대 가톨릭 역사에 매우 드문 기현상으로 외국에서도 경이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가톨릭 역시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결코 지속적으로 큰 성장과 부흥을 이루고 있지 못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같은 기간 한국 개신교는 성장은 커녕 답보와 퇴보를 반복하며 크게 위축되었다. 가톨릭은 밀물인데 개신교는 썰물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 개신교는 가톨릭에 비해 그 교세가 적어도 몇 곱절 이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음 세대가 넘기 전에 오히려 가톨릭보다도 더 작아질 수 있다는 자조적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현실이 이 모양 이 지경인데도 여전히 "한국교회는 평안하다"고 하며 '천하태평'에 '요지부동'인 직분자들은 도대체 무슨 배포인지 모르겠다.

교세 역조 현상은 구조적 원인에 기인 

더구나 이는 단순히 양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최근 한국 3대 종교에 대한 어느 신뢰도 조사에서 개신교는 고작 10%의 지지율로 최하위를 얻었다. 이는 개신교가 노쇠한 솔로몬처럼 질적으로도 타락하여 신도들조차 자기 교회를 온전히 신뢰하고 있지 못 하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요즘은 어느 유명 목사의 '600억 횡령설'까지 나돌고 있어 충격을 더하고 있다. 하여튼 이 양반은 한번 터졌다 하면 최소 100억 단위이다. 도대체 개신교의 추락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개신교의 교리나 신학이 가톨릭보다 열등해서 그럴까. 또는 가톨릭 사제들은 모두 신실하고, 개신교 목회자들은 그렇지 못 할까. 그도 아니라면, 개신교인들이 가톨릭 신도들보다 기도나 충성심에서 크게 부족할까. 필자는 결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이것이 단순히 교리나 직분자나 신도 자질의 문제였다면, 처음부터 한국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교세적 우위를 계속 유지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교 역사도 가톨릭이 훨씬 더 오래 되었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의 교세 역조 현상은 근본적으로 신학과 인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다른 '구조적 문제'에 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실제로 여러 정황상 한국 가톨릭 급성장의 이면에는 자기 혁신과 순수한 헌신을 아끼지 않은 사역자들의 기도와 수고 뿐만이 아니라, 개신교를 탈출한 신도들의 수평적 이동이 적지 않았다는 분석이 있다.

결국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의 동일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두 종교 집단에게 이처럼 심각한 역조 현상이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거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도 제도가 중요한 이유

물론 한국 가톨릭 역시 문제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도 일부 사제들의 타락 현상이 있고 부패도 있고 신도들의 무관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대 가톨릭은 중세 교회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제도적으로 과감하게 자기 개혁을 많이 추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중세적 '십일조 의무화'의 전면적 폐지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성당을 가도 십일조 봉투를 내미는 곳은 없다. 소액의 교무금 정도 외에는 별도의 헌금 강요도 없다. 교무금도 내기 싫으면 안 내도 된다. 적어도 헌금을 이유로 '교인의 자격'을 제한한다는 식의 반기독교적 억지를 부리는 성당은 없다.

필자는 지금 헌금을 적게 하자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공교회가 자율적이어야 할 헌금 문제로 신도들을 압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루터 종교개혁의 원인이 무었이었는지를 잠시 생각해보아도 이는 당연한 지적이다. 교회가 자기 신학까지 기만하고 왜곡하며 돈을 걷으려 하는 시대는 분명히 불행한 시대이다.

가톨릭의 제도적인 노력을 높히 평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들은 '순환 사역제'를 성실하게 시행하고 있다. 수 년마다 사역지를 계속 바꾸기 때문에 '교회 사유화'란 악한 뿌리가 내릴 여지가 거의 없다. 오히려 '공동 사역'과 '팀 사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지역 교회의 신도들도 정기적으로 다양한 사역자들과 동역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이런 목회적 토양에서는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에 '인수인계'의 투명성과 정확성이 더욱 중요시되고, 일부 개신교의 교회들처럼 제왕적 목회 독재나 교회 세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따라서 교회 운영이나 재정 관리가 '구조적으로' 투명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는 제도만 조금 바꾸어도 당장 교회 부패를 크게 줄일 수 있슴을 우리는 잘 안다. 예를 들어 '세습 방지법'을 제도화하여 실행하면 세습은 당연히 크게 줄어들기 마련이다. 목회자들도 바보가 아니다. 그들이 이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목사들은 절대로 그리 안 한다. 왜 그럴까.

솔직하게 한 가지만 스스로 자문해보자. 작금의 개신교 현실에서 노회나 연회를 중심으로 '순환사역제'를 하자고 하면, 과연 어느 교단의 담임목사가 자기 자리를 순순히 내려 놓으려 할까. 대형 교회 담임목사를 하다가 같은 지역의 작은 교회로 가라고 하면 기꺼이 갈 목사가 몇이나 있을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밥상보다 중요시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많을까. 독자들은 그 답을 이미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조용기 목사와 프란치스코 교황

교회 부패는 인위적 제도의 소산

필자는 지금 특정 직분자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는 현재 제도적으로 심각한 구조적 취약점을 지니고 있고, 그보다 더욱 심각한 점은 대다수의 직분자들은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도 이를 근원적으로 고치고자 하는 최소한의 의지조차 부족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분명히 사람이 즉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이 있는데도, 종교 귀족들은 그것을 인위적으로 기피하거나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개혁이 늘 겉돌 수 밖에 없다. 자기 목에 스스로 방울을 다는 그런 거룩한 고양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득권의 단맛에 심취한 일부 귀족 목사들은 명목상의 제도만이라도 바르게 고칠 마음조차 전혀 없다.

대부분의 이슬람권 국가에는 도둑이 매우 드물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슬람 경전에 남의 물건을 고의로 훔치면 손을 자르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보다 크게 정직하고 선해서 훔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무섭기에 법을 지킨다. 때로는 제도란 이처럼 강력한 역활을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변화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도 소용이 없다"고 주장하며 '제도무용론'을 열심히 역설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자기 개혁을 기피하기 위한 궤변적 기만이며 알량한 속임수이다. 사람이 쉽게 변화하지 않으니, 그럴수록 도리어 제도라도 더욱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현재 여러 교단에서 '세습 방지법', '담임목사 임기제', '무기명 헌금제', '십일조 자율화', 그리고 '교회 장부 공개' 등이 어떻게 표류하고 있는지만 살펴 보아도 이들의 속내를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교권과 조직을 장악한 성직주의자들이 새로운 변화를 완강하게 거부하는데, 어찌 하든 외형적 제도만이라도 다소 개선해 보려고 일부 사역자들이 애쓰며 수고를 반복있는 것이 작금의 개신교가 깊은 수렁에서 고생하고 있는 애처로운 모습인 것이다.

더구나 대다수의 순진한 교인들은 그저 개인적으로 복 많이 받고 은혜 받는 것만 알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지금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그 정확한 실상을 잘 모를 경우가 너무 많다.

교인들이 '제사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냥 비관론을 펼치자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바르게 선 시대도 많았다. 어떤 시대였을까. 그것은 성도들이 각성하여 교회와 세상 속에서 진정한 '제사장'으로 사역하던 시대이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왕과 같은 제사장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벧전2:9)."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양들은 거짓된 이리들에게 빼앗긴 '교권'과 '성직권'을 되찾고, 신앙 공동체 운영의 진정한 주체가 되는 교회를 회복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에서 이 '교인 제사장 정신'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니 교회가 갈수록 부패하고 교세가 급격히 퇴조하는 것이다.

본래 개신교의 목사직은 교인들 위에 군림하여 구약적 제사장 행세를 하라고 세운 직분이 아니다. 참된 목사는 오히려 교인들이 스스로 교회, 가정, 직장, 학교,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고 세워주는 사역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모든 성도가 세속적인 '기복신앙'과 무속적인 '목사중심신앙'을 극복하고, 배부른 꿈에서 어서 속히 깨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신성남 /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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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먼 2015-12-11 11:03:31
신집사님..항상 올바르고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글을 보고도 악플다는 비뚤어진 사람들이 있네요..내버려 두세요..아무도 공감하지 않을겁니다. 계속해서 한국 개신교를 위해서 좋은 글 써주십시오. 저도 부지런히 퍼날라서 잠자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겠습니다..^^

김남철 2015-12-10 08:02:06
칼빈에 대해서 근거없는 이야기했다가 그렇게 망신을 당했으면 ... 뭔가 부끄러운 줄도 알아야 할텐데 ... 정말 큰 개인것 같은데! 양으로 위장한 개 닮은 이리인가?

성남아! 2015-12-09 07:58:58
오늘 이 글은 너의 수명을 더 많이 단축시키는 좋은 글이구나!
잘한다!
이게 너의 ....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