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이제 알았어?"
"그걸 이제 알았어?"
  • 박지호
  • 승인 2008.01.11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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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이용남 집사 부부가 킹덤 중보기도팀에 들어간 사연

킹덤 컨퍼런스가 열리는 나흘 내내 이용남·이순임 집사(뉴저지 뉴호프커뮤니티교회) 부부는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각에도 변함없이 1층 중보기도실에서 무릎을 꿇었다. 킹덤 컨퍼런스가 아름답게 잘 진행되는 데에는 이들 부부의 중보기도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들 부부는 프리마켓을 운영하는, 다시 말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넉넉지 못한 형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잠시 뒤로 접고 이곳에 와서 얼굴도 모르는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집사 부부의 자식이 이 행사에 참여한 것도 아니다. 사연이 궁금하다.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풋볼 선수로 활약하며 전액 장학금까지 받고 대학 풋볼팀에 스카우트되었던 큰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어딘가 좀 이상했다. 말문을 닫아버리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머리털이 몇 움큼만 남고 모조리 빠져버렸다. 혹시 죽었나 싶어 노크라도 할라치면 물건을 때려 부수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6개월이 흐르자 우람하던 몸은 온데간데없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어느 날 갑자기 자살해버리기 때문에 마약 중독보다 더 위험한 것이 우울증이라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하늘이 노랬다. 무쇠 체력을 자랑하던 이용남 집사도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일시적으로 팔이 마비되기까지 했다. 누구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다른 교인 자식이 말썽이라도 피우면 부모가 신앙생활 똑바로 못해서 그렇다며 수군댔던 탓이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흑인 동네에서 노점상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도,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문제 한 번 일으키지 않고 번듯하게 커준 자식들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자 보람이었다. 모두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다른 집 자식이 마약이니 뭐니 하며 부모 속을 썩여도 남의 일이었다. 오히려 아들이 물들까봐 교회를 떠났으면 하는 눈치를 은근히 주기도 했다. 그런데 멀쩡하던 자식이 죽게 생겼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지만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었다.

▲ 자상한 눈길로 청년들의 기도제목을 듣고 있는 이용남·이순임 집사 부부.
그런 고통 중에 3년 전 처음 킹덤을 찾았다. 담임목사인 이진석 목사를 따라서 답답한 마음에 발걸음을 옮겼다. 청년 집회라고 못 갈 곳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께만 매달리고 싶었다. 강사 목사님들 만나면 염치 불구하고 조언을 구하고, 아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중보기도 팀에 들어가 청년들의 기도제목을 보면서 자식의 그것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해마다 킹덤에 참여해서 기도하다 보니 자식 같은 젊은이들이 내놓는 기도제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청년들이 털어놓는 고민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자란 1.5세 청년들의 기도제목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부모님 크레디트 카드 회사에서 전화가 와도, 부모님 비즈니스 거래처에서 전화가 와도 이들과 영어로 통화하는 일도 자녀들 몫이다. 주말이면 다른 애들은 놀러 다니는데 부모님이 하는 가게를 도와야 한다. 귀찮고 힘들어도 열심히 도왔는데, 일이 조금 잘못되면 ‘네 탓’으로 돌리니 부모님이 야속하다. 어린 나이에 집안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몸소 체험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백인 친구들은 방학이면 부모님과 유럽을 구경했다느니 하면서 자랑하는데, 1세 교회 어른들 싸움 구경 말고는 한 게 없다. 미국 아이들과 섞이지 못하고, 그렇다고 한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신세를 부모님이 이해할 리 없다.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차별의 벽 앞에서도 한없이 쪼그라들기만 한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이 집사는 혹시나 싶어서 아들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수련회 때 청년들이 털어놓은 고민들을 하나하나 들려주면서, 너도 혹시 그렇게 힘들었냐고 물었다. 아들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걸 이제 알았어?”

이 집사는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러고 보니 아들과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대화가 끊어졌다. 영어가 안 되는데다 시간적 정서적 여유도 없었던 탓이다. 짧은 대화 이후 큰아들은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1년 반 동안 그렇게 달래고 얼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목사님을 붙들고 ‘더 이상 이렇게 살기 싫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쌓아놓았던 분노와 상처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큰아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고, 운동에 빠져 살았다. 그렇게 대학까지 갔다. 그런데 대학교 풋볼팀에서 인종차별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고, 그나마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주던 운동이라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자 그렇게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어린 시절의 상처들도 한꺼번에 올라왔다. 목사님 말이라면 그저 믿고 순종했던 부모님이었기에, 목사를 반대하던 교인들의 비난에 늘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가 교회 사찰처럼 청소를 도맡아 하며 섬기는 것도 못마땅했다. 교회 일은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물건 사러 오는 흑인을 의심하고 무시하는 아버지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보였다.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고 싫었다.

아들의 심정을 되뇌던 이 집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목이 메어 괜히 허공을 응시했다. 이 집사는 그렇게 큰 아들의 마음을 읽기 시작했고, 아들은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아들을 회복하게 만든 것은 약물도, 정신과 치료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와 공감이었다.

▲ 기도하는 이용남 집사(왼쪽)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이 집사는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젊은 시절을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만큼 워낙 거칠고 행패가 심했던 그가 신앙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유일하게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이름 모를 장로님의 작은 관심 때문이다.
큰아들은 그렇게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국 슈퍼마켓에서 하루 7시간씩 일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회계 공부를 시작했는데, 학비에 보태기 위해서다.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한국 드라마를 빌려와 같이 보자고 하고,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물어오기도 한다.

아들을 통해 이 집사가 깨달은 것도 크다. 무조건 열심히 믿으면 복 받는다는 기복주의 신앙의 허상을 벗어버리게 됐다. 우리 교회, 우리 자식만 생각했는데, 킹덤 집회를 따라다니면서 하나님나라라는 큰 그림을 보게 된 것도 감사하다. 뜻하지 않게 문제아의 아버지가 되면서, 교회에서조차 받아주지 않고 내쳤던 수많은 잃어버린 자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왔지만, 교회는 멀쩡한 사람들만 환영하는 것이 안타까워졌다. 이 집사 부부는 “우리 아들 살려주신 하나님이 청년들을 변화시킬 것을 기대하면 며칠 일 못 해도 전혀 아깝지 않다”며 중보기도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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