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엔 구원이 없다
십자가엔 구원이 없다
  • 홍신해만
  • 승인 2016.01.04 11:50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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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십자가 피엔 그 어떤 성스러움도 없다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이자 세계적 여성신학자인 델로어스 윌리엄스(Delores S. Williams)의 '십자가'와 '구원론'을 정리한 홍신해만의 글을 소개한다.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였던, 델로어스 윌리엄스는 하나님이 죄지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 예수를 십자자가 희생제물로 보내셨다는 대속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며 비판한다. 왜 윌리엄스는 십자가 구원을 거부한 것일까?

 

흑인여성들의 고난과 예수의 대속

윌리엄스의 우머니스트 신학은 미국 흑인여성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흑인여성들은 노예제 하에서 백인 집안의 가정부로서 가사와 백인 아이들의 양육을 담당했다. 자의가 아닌 강요된 노역이었다. 대농장에서 일하던 흑인여성 노예들의 삶은 더욱 비참했다. 이들은 남성들의 일이라 여겨지던 중노동들을 강요받았고, 노예 주인에게 성적인 착취를 당한뒤 버려지기도 했다.

백인 남성 노예주들은 법적인 아내와는 자녀 생산을 위해 성관계를 맺은 반면, 흑인여성 노예들로 부턴 오로지 성적 즐거움을 얻기위해 강간했다.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후에도, 노예주는 고용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흑인 여성들의 비참한 삶은 바뀌지 않았다. 빈곤에 시달리던 흑인여성들은 노예제 시기와 마찬가지로 가혹한 노동착취로 고통받아야 했고, 백인 고용주들의 강간 역시 이전과 다를바 없이 자행되었다. 백인 가정은 여전히 가사와 양육을 담당해줄 가정부가 필요했고, 이는 흑인여성들의 값싼 노동력으로 이를 메꾸어졌다. 대표적인 예로 1960년대 뉴욕 할렘과 브롱스에 성행했던 “노예시장”은 흑인여성들의 값싼 노동력이 백인여성들의 필요와 교환되던 장이었다. 물론 흑인여성들은 노동자로서 정당한 권리들을 누리지 못했다.

노예제나 짐크로우(흑백분리정책)이 사라진 후에도 백인들은 흑인여성들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 이런 요구들은 흑인여성들에게 거룩한 고난을 겪고 있단 대속의 역할자로 이미지를 덧씌운다.

윌리엄스에게 전통적인 십자가 대속론에 맞서는 것은 곧 흑인여성들을 향한 착취에 대한 신학적 저항이었다. 고난 그 자체가 구원의 목적이라면 흑인 여성들은 착취의 구조에서 벗어날수 없으며, 십자가 고난을 미화하는 것은 백인 가부장제의 착취를 고착시키는 것이었다. 윌리엄스에게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기 위해 보낸 하나님은 흑인 여성들의 희생을 묵인하는 가부장적 폭력의 하나님이었다.

구원은 어디로 부터 오는가?

윌리엄스는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 피가 아니라 예수가 보여준 목회적 비전과 삶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죽음을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왔고, 예수는 십자가로 죽음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저항과 사랑으로 죽임에 맞섰다. 예수의 광야 경험은 죽음을 극복한 삶으로 극복한 대표적인 예다. 예수는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다. 그는 물질과 권력에 저항했고, 자살을 시도하란 마귀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삶을 택한다. 구원의 근거는 바로 이러한 삶속에서의 저항에서 비롯된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은 정의로운 관계로 모든이들을 품어내는 목회적 비전으로의 초대이지 아들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아니다.

십자가는 오직 좋음을 파괴하는 역사적인 악을 대변할 뿐이지 부활의 근거가 될수 없다.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가 아닌, 예언자적 비전을 통해 쟁취한 악에 대한 승리다.

예수는 죽음이 아니라 삶 속에서 죄를 정복했다.

하나님은 흑인 여성들의 대속적 희생의 경험을 의도하지 않으셨다.

구체적으로 윌리엄스에게 구원은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이 땅에서 흑인여성들이 누릴 생존과 의미의 발견, 더 나은 삶이다. 죄는 흑인여성들을 착취하는 인종주의, 성차별, 빈곤과 같은 사회 구조이며 이런 사회적인 죄에 저항하고 억압의 고리를 끊는 것이 중요하다. 죄는 사회적인 것이기에, 구원 또한 사회적인 것이 될수 밖에 없다. 재클린 그랜트는 구원을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닌 과정으로 이해하며, 악에 저항하는 행위들을 혁명적 구원의 과정으로 규정했다. 윌리엄스에게 구원은 고통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가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것이다.

십자가를 다시 생각하다

오리겐과 안셀름,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로 이어져 내려온 예수의 십자가 피흘림을 통한 대속론은 억압받는 이들의 특수한 상황들을 담지하지 못한체 일괄적으로 강요되었다. 그 결과 흑인여성들의 고난은 예수의 십자가 피흘림 같은 숭고하고 거룩한 것으로 미화되었고, 착취와 폭력의 사슬은 신학적으로 정당화되고 지속되었다. 윌리엄스는 대속론을 억압받는 이들의 특수한 상황속에서 해석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대신 죽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예수는 삶을 위해 온 것이고, 오래전 사람들이 잊어버린 목회적 비전을 보여주기 위해 온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흑인 여성들은 십자가를 잊어선 안된다. 그러나 그것을 미화해선 안된다. 십자가를 미화하는 것은 착취를 거룩하게 포장하는 것이며, 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홍신해만 / 미국에서 유학 중인 신학생. 현재 연합그리스도교회(UCC·United Church of Christ)에서 인턴 과정을 밟고 있다.

본 글은 https://medium.com/@haemanhong 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Coleman, Monica A. Making a Way Out of No Way: A Womanist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8.
Williams, Delores S. Sisters in the Wilderness: The Challenge of Womanist God-Talk. Maryknoll: Orbis Books, 1993.
Williams, Delores S. “Black Women’s Surrogacy Experience and the Christian Notion of Redemption” in Cross Examinations: Readings on the Meaning of the Cross Today. Marit Trelstad, editor. 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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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두기 2016-01-07 17:35:09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성경구절들입니다.

인자는 ...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막 10:45)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때에 유효합니다. ... (롬 3:25)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일 4:10)
너희가 ... 대속함을 받은 것은...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벧전 1:18-19)
우리가 아직 죄인이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롬 5:8)

이밖에도 정말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불교경전처럼 모호한 책이 아니고 정말 바보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알기 쉽게 쓴 책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크신분이라 인간의 언어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구원에 관해 도저히 다른 뜻으로 해석할 수 없도록 너무나도 명확하게 쓰셨습니다. 윗 구절들을 믿는 것이 문자적인 해석입니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롬5:8)"라는 메세지를 주셨건만 윗글을 쓴 신학자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자기 생각으로 말씀을 왜곡하고 결국 "예수는 대신 죽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을 믿지 않고 그녀를 믿습니까? 그게 바로 이단입니다. 명확한 성경의 말씀을 이리저리 비틀고 왜곡하여 다른 걸 믿게 만드는 것 말입니다.

정신차리십시오. 여러분들은 멀리 있는 나쁜 목사들을 욕하면서 자기의 죄와 뉴조같은 곳를 통해 마음속에 은밀하게 스며든 이단사상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타락도 결국 그 원인이 복음에서 멀어짐에 있습니다. 날 위해 대신 죽은 분에 대해 몰라서 그분의 피가 여러분의 인생과 상관이 없어질때 여러분의 구원은 없습니다.

NewM이단인가 2016-01-06 09:22:08
New M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이런 이단적인 글을 빌려서 하는 듯하다. 전에도 의심했었는데 NewM은 이단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NewsM이 자기들의 믿음 선언문을 올리지 못하는 것도 자기들의 이단성을 숨기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닌지도 의심스럽다. NewM은 선지자의 탈을 쓴 사탄의 추종자들이 분명하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혁한다는 것인가 (행 20:28)? 위선이 극에 달한 것 같다. 분명히 회개해야 할 것이다.

위선이도이단이다 2016-01-06 09:10:40
New M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이런 이단적인 글을 빌려서 하는 듯하다. 전에도 의심했었는데 NewM은 이단이라는 확신이 든다. NewsM이 자기들의 믿음 선언문을 올리지 못하는 것도 자기들의 이단성을 숨기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닌지도 의심스럽다. NewM은 선지자의 탈을 쓴 사탄의 추종자들이 분명하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혁한다는 것인다 (행 20:28). 위선이 극에 달한 것 같다.

NewM은이단 2016-01-06 08:29:23
New M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이런 이단적인 글을 빌려서 하는 듯하다. 전에도 의심했었는데 NewM은 이단이라는 확신이 든다. NewsM이 자기들의 믿음 선언문을 올리지 못하는 것도 자기들의 이단성을 숨기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닌지도 의심스럽다. 분명히 회개해야 할 것이다. NewM은 이단이다.

00 2016-01-05 13:01:32
그러게 말이죠. 죽으면 대속이니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야 하는데 아직도 질곡에서 헤매니. 죽으면 다냐. 죽는게 문제가 아니다. 누구도 죽을수 있다. 노무현도 죽는다. 노무현은 대속한거냐. 죽는게 다가 아니라 무책임한 거다. 죽는게 다가 아니라 삶속에서 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 사실 현 시점 세계의 문제는 미국에서 오고 미국의 문제는 금전과 종교에서 온다. 유물론이 문제가 아니라 배금주의가 문제다. 이기주의를 화장하여 이기주의 아닌 것처럼. 교묘히 역설적으로. 천국에 가면 끝입니다. 거긴 계급도 차별도 경제노력도 필요없고 경쟁도 없는 곳. 거길가기 위해 경쟁하는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