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이 못내 그리운 시절
김교신이 못내 그리운 시절
  • 김명곤
  • 승인 2016.01.10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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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성서신앙'으로 '민족구원' 갈망한 선각자

군대에서 제대한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던 1980년대 초, 그때는 우리 땅이 군화발 앞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캄캄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이 계속되던 때였다.

'중생한 기독교인'으로 5·18을 부끄럽게 비켜서고 난 직후 나는 '우리의 지도자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땅에서 복음이, 크리스천이, 교회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따위의 뒷북치기식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화문의 어느 기독교 서점에서 막 나온 회색빛 표지의 <김교신 인물평전>을 발견했다. 손에 넣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보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나는 것인가.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그 책을 읽으며 가슴이 벅차올랐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 김교신 선생(공개자료)

나는 이미 1970년대 중반 내공이 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던 백발성성한 노인들의 성서 연구 모임에 참석해 지나치듯 몇 차례 '김교신'이라는 이름을 주워듣고 있었다. 성경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있던 나는 언젠가 버릇처럼 청계천 고서점을 뒤적이다 누렇게 변한 김교신의 구약 <느헤미야> 강해 단편을 우연히 발견해 읽고 탄성을 내질렀던 기억도 있다. "그 시대에도 이런 강해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이제는 '무교회주의를 비판한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김교신에 관한 조각 글들이 신문, 잡지와 일반 대학원, 신학대학원 논문들을 통해서 발표되어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 김교신은 여전히 은밀히 숨겨두고 즐기는 애인 같은 존재다.

복음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가

멀쩡하던 시절의 김동길 연세대 교수는 한국 근대사에서 존경할 만한 두 인물을 고르라고 한다면 첫 손가락에 김교신을 꼽겠노라고 했다. 지금은 변질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두레마을' 김진홍 목사는 한때나마 그의 여러 편의 설교와 글에서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 신앙을 깊이 흠모하는 마음을 토하였고, 어느 미주 집회에서는 그가 주도하여 발간했던 <성서한국>이 김교신이 전력을 다하여서 발간하였던 <성서조선>에 담긴 신앙 유산을 이어받은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성품이 강직하다 하여 '양칼'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었던 김교신은 눈물이 많은 스승이기도 했다. 그의 눈물에 대한 일화는 무수히 많다. 김교신의 양정학교 제자였던 손기정은 마라톤 동경 예선에서 선두를 달리는 자신을 보고 선도차에서 시종 눈물을 훔치던 스승 김교신의 눈물만 바라보고 뛰어서 끝내는 우승했다고 한다.

그는 새 시대를 열어 나가야 할 조선 학생들이 교실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고, 특히 컨닝하는 제자를 뒤에서 지켜보며 장탄식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무개는 더럭더럭 내주는 졸업장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툇자를 놓고 나간 적이 있는데, 그대는 어쩌자고 그 짓을 하고 앉았는고.... 남의 것을 보고 베껴 좋은 끝수를 땄다고 치자. 그런 식으로 학교를 나오고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협잡꾼밖에 더 되겠는가... 한심한 노릇이로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는 것이었다. (동요작가 윤석중의 <잊을 수 없는 스승>에서)

김교신은 소외당한 소록도인들에게 '문둥아!'라는 '연애편지'를 쓰면서 참회의 눈물을 훔쳤으며, 끝내는 흥남 질소 공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 심장에서' 마지막으로 체험한 '민족' 속에 누웠다. 그는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렸다.

▲ 올릭픽 출전에 앞선 대회에서 손기정이 뛰고 있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달리고 있는 손기정을 보며 김교신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치고 있는 듯한 장면을 연상시킨다(공개자료)

1902년 함남 함흥에서 태어난 김교신은 1920년 6월 동경 유학 중 결신하여 그곳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기성교회 지도자들의 타락과 위선에 회의를 느껴 일본의 반전·반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 신앙 수업을 했다.

그는 1927년 귀국하여 함석헌, 송두용, 유석동, 정상훈, 양인성 등과 함께 <성서 조선>을 창간, 1930년 주필로 편집, 발행을 책임지면서 심혈을 기울였고 중세기 수도승 같은 경건 생활을 계속했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이어 김교신은 1924년 <성서조선> 158호에 실린 권두언 '조와'(죽은 개구리를 애도함)라는 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살아남은 한 마리의 개구리를 묘사하여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고 썼는데, 이 표현이 민족의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하여 폐간과 함께 피검, 함석헌, 유달영 등 13인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4년에는 흥남 질소회사에 입사하여 노무자의 복리를 위해 진력하며 발진티프스 환자들을 돌보다가 감염되어 이듬해 4월 25일 해방을 4개월여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여기 함께 일했던 외과의사 안상득 앞에서 숨지기 전 힘없이 그가 토한 마지막 말을 적어본다.

"안 의사, 나 언제 퇴원하여 공장으로 갈 수 있습니까…. 나 40 평생에 처음으로 공장에서 민족을 내 체온 속에서 만나보았소…. 이 백성은 참 착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불쌍한 민족입니다. 그들에게는 빵보다도 따뜻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제 누가 그들을 불쌍한 무리로 만들었냐고 묻기 전에 이제 누가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느냐가 더 급한 문제로 되었습니다. 안 의사, 나와 함께 가서 일합시다. 추수할 때가 왔으나 일꾼이 없습니다. 꼭 갑시다. (김정환 저 <김교신 평전> 중에서)

공장에서 만난 '민족'

김교신에게서 '조선'을 빼고 그의 신앙과 삶을 이해할 수 없다. 한국교회사를 쓴 민경배는 "김교신의 신앙고백은 진리에 대한 충성과 함께 민족의 얼과 양심의 표현이었다"고 적고 있다.

김교신은 구미 선교사들의 성서 해석과 복음 이해의 유풍을 벗어나서 조선 사람의 다리로 체험되어지고 조선 사람의 심장으로 녹아진 순수한 '조선산 기독교'를 형성하는데 처절한 내적 투쟁을 했던 인물이다. 함석헌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뒤늦게 고난당하는 조선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부여한 섭리사적 존재 이유를 체험하게 되었다.

김정환은 섭리사적 민족의식에 터전한 김교신의 신앙적 몸부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한다. 그렇다면 몇 천 년에 걸쳐 이 땅에 터 잡고 영고성쇠의 역사를 경영해온 우리 민족의 섭리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이것을 외국의 신학자가 다듬어 줄 것인가? 또 외국의 역사가가 알려줄 것인가? 그게 아니다고 외친 사람이 김교신이었다."

김교신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다 보면, 기독교 신앙이란 단지 '말의 성찬'과 '깨달음'에 그 궁극이 있지 않다는 것, 총체적 의미로서의 복음(예수의 말씀과 삶)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창조된 '민족' 속에 들어가 영글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절로 알게 된다.

그는 개인주의적 이기와 정치적 경박까지도 벗어나 고난당하는 우리 민족의 삶의 현장에서 깊은 영적·도덕적 구원을 기원했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을 발간하면서 서문으로 쓴 '성서조선의 해'에는 그의 순영적 민족구원의 신앙이 절절이 배어 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 주고 싶으나 인력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혹자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혹자는 문학을 주며, 혹자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절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 같은 기독교도로서는 혹자는 기도생활의 법렬의 경을 주창하며, 혹자는 영적 체험의 신비세계를 역설하며, 혹자는 신학지식의 조직적 체계를 애지중지 하나, 우리는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더 좋은 것을 조선에 주려는 이는 주라. 우리는 다만 성서를 주고자 미력을 다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성서조선> 창간호 '성서조선의 해'에서)

오늘, 김교신이 못내 그리운 이유

▲ <성서조선> 창간 동인 6명. 1927년 2월 촬영한 사진이다.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류석동·정상훈·김교신·송두용. (출처 <김교신 전집>)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을 정당화 시켜주는 기복주의, 그리고 기복주의의 종착점에 절묘하게 따라 붙여진 '개인구원'에 천착하고 있는 교회들. 타자의 고통에 눈 감은 채 스스로의 게토를 형성하여 집단적 자기도취의 황홀경에 빠져 있는 교회들. 허탄한 성장주의 신화에 들뜨고 정복적 복음주의를 무기로 휘두르며 세상을 지배하려드는 교회들이 허다한 지금. '하나님의 세속도시'로 탈출하여 낮은 자리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작은 자들을 부둥켜안았던 김교신이 그립다.

어느 배에 타고 있는지 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탈색된 경전에 매달려 '참을 수 없는 구원의 가벼움'으로 즐거워하며, 우상이 불어대는 피리 소리에 자기 암시의 소고로 춤추며 열지어 따라가는 군중들이 허다한 지금. '신 앞에 홀로서기'를 깨우쳐 내고, 운명공동체로서의 이웃과 더불어 인격적 연대를 실천해낸 김교신이 그립다.

'저 높은 곳'의 삶을 '지금, 여기서'의 삶으로 환치하기를 꿈꾸고, 순수 성서신앙을 통해 잃어버린 민족의 골절을 세우고 혈액을 만들어 민족 구원을 꿈꾸었던 김교신. 60년 넘게 남으로 북으로 갈려 있으면서 찢겨진 가슴으로 살아가는 남북 백성들의 구원이 절실한 지금이어서 못내 그가 그립다.

김명곤 / <코리아위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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