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제사장'이 되려면...
목사가 '제사장'이 되려면...
  • 강만원
  • 승인 2016.02.04 02: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 강만원 (뉴스 M 자료 사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 새삼 질문을 제기한다. '목사는 제사장인가.'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이지만, 이에 대한 대답과 행동은 대부분 일치하지 않는다. 제사장은 짐승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드리는 자를 말하기 때문에 희생제사가 사라진 신약시대에 제사장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대답이며 상식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성경 지식이 있는 목사들은 자신들을 일컬어 때로는 주의 사자, 종, 대언자라고 자처하는 경우는 흔히 보지만, 여전히 사제의식에 사로잡힌 일부 목사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제사장이라는 이름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제로 그런 의식을 갖지 않는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입으로는 자신이 주의 종일 뿐 결코 제사장일 수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많은 목사가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서 '축복의 통로'라거나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스스로 제사장의 자리에 앉아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날,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길게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대제사장의 중재 없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린 대표적인 상징이다.
 
즉,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완전한’ 속죄제를 드렸기 때문에 예수의 희생과 더불어 유대 제사장의 ‘중재’를 통한 '불완전한 제사'는 단번에 종말을 맞은 것이다.

따라서 신약시대에,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목사들이 허투루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제사장인 양 짐짓 거드름을 피우는 것은 심각한 영적, 성서적 무지에 불과하며, 요즘 말로 어설픈 '제사장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관점에서, 이른바 신약성서적인 관점에서 목사와 제사장의 연관성을 추론할 수 있다. 예컨대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일컬어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은 대제사장'이라고 서술했는가 하면, 베드로전서는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라고 기록하면서 예수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제사장'이라고 불렀다.
 
이를 미뤄볼 때, 비록 의미가 다를망정 신약시대도 제사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따라서 오늘날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목사 역시 '너희'로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목사가 제사장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 나아가 목사가 신약시대의 사역자라면, 대제사장 예수를 따르는 목사에 대해 우리는 대제사장의 종으로서 '제사장'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한다는 전제 아래 가능한 주장이지만.)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라는 구절은 특정한 사역자를 일컬은 것이 아니라, 대명사 '너희'가 시사하듯이 모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른바 '성도'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목사가 예수를 따르는 성도라면, 응당 목사도 성경적인 근거에 따라서 '제사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같은 제사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구약과 신약에서 두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에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구약과 신약을 완벽하게 가르는 핵심적인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시대 아론 가문의 대제사장은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 희생 제사를 드렸지만,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은 대제사장 예수는 짐승을 제물로 바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어린 양'인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며 기꺼이 희생 제사를 드린 것이다. 요컨대 예수는 '대제사장'인 동시에 자신을 제물로 바친 '어린 양'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의 성도가 제사장이라는 말은 그들이 짐승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드린다는 말이 아니라 구약시대 제사장의 중재 없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는 의미와 더불어,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는 영적 제사장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자신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쳐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지만, 우리가 자신을 '산제사'로 드린다는 말은 예수처럼 육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영적인 순종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세상에 속한 육적 자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탐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세상에 속한 자의 욕망의 자리에서 떠나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거룩한 자로 신분의 전이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예수처럼 자신의 생명을 바치지는 못할망정, 신약시대에 목사가 자신들을 일컬어 제사장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다른 '성도'와 마찬가지로 목사도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자신을 '산제사'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만약에 당신이 목사라면, 당신은 진정 신약시대의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구약시대에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유대 제사장을 모방해서 종교적인 권위를 찬탈하기 원하는 것인가? 당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후자를 좇았다면, 구약시대 제사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처럼 당신도 그리스도 신앙에서 사라지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다.

반면에 당신이 '주의 종'으로서 진정 예수의 반열을 좇는 제사장을 원한다면 당신은 응당 예수를 본받아 생명을 바쳐 순교를 감당할 믿음과 용기, 그리고 헌신이 있어야 하며,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신약시대 '왕 같은 제사장들', 즉 성도로서 '산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탐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요컨대 신약시대 제사장은 '지배하기 위해서' 권위와 권력을 장악한 통치자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겸손의 멍에를 매야 하며, 겸손에 반하는 권력과 재물, 그리고 명예와 지위를 주저 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당신은 그저 제사장의 권위를 탐하는 '사이비 목사'에 지나지 않는다. 당부하건대 '신약시대 제사장'이라는 영적인 직분의 의미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서 ‘제사장’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신약시대 제사장은 '비유'(그림 언어)로서 상징적이며 영적인 직분이며, 예수의 제자로서 성도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준엄한 제자도'를 전제한다.
 
다시 말해 신약시대 제사장의 이름은 속된 권력과 종교적인 권위를 제공하는 빌미가 아니라 어린 양의 희생과 헌신, 겸손과 순종을 요구한다. 그렇다. 신약시대의 제사장은 예수를 본받아 스스로 제사장인 동시에 어린 양이 돼야 한다. 오늘날 개신교의 목사가 신약시대 예수의 가르침에 걸맞은 '진정한 제사장'이 될 수 있다면, 그래서 희생과 헌신할 수 있다면 한국교회는 새로운 영적 부흥의 시대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룩한 소명' 운운하며 허튼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신약시대 제사장의 직분을 구시대적 권위와 권력의 상징처럼 착각하는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에게 과연 그런 아름다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미 타성에 젖고 교만에 사로잡혀 온통 눈이 가려지고, 귀가 들리지 않는 한국교회의 목사들,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맹신교인들에게 그런 변화는 차라리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강만원 / <아르케 처치> 대표,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저자, <루나의 예언> 역자, 종교 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