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한 거룩은 어디에?
'Real' 한 거룩은 어디에?
  • 지성수
  • 승인 2016.02.15 23:3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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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교회 안 나가는 목사 이야기(2)

한때 세상을 피해서 거룩하고 살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은 날마다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전투와 전투 속에서 보냈다. 그래서 현실을 잊기 위해서 현실 도피적인 꿈을 꾸는 것, 이것은 유일하게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자유였다. 

현실의 쓰라림과 고통, 희망이 절벽인 상황이 오히려 나를 비현실적인 세계를 추구하도록 만들어서 사춘기에 이미 독신 수도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썼는데 당시 야박한 천주교는 전 가족이 신자가 아니라고 나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살면서 천주교 신부나 수도사이었다가 옷을 벗은 사람을 몇 사람 만났다. 심지어는 환속한 신부의 결혼 주례를 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너도 신부가 되었으면 이런 신세가 되었을 거야'라고 암시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 거룩함이 어디에 있는가? 엄숙한 분위기가 차있는 대성당 같은 곳인가? 거룩은 포장할 수 없는 것이다.종교적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거룩하게 보이고 이방인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거룩이 아니다.

거룩함이 어디에 있는가? 엄숙한 분위기가 차있는 대성당 같은 곳인가?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따지고 보면 나무와 돌과 쇠와 헝겊과 색깔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재료로 해서 거룩해 보이도록 장식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거룩은 포장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거룩하게 보이고 이방인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거룩이 아니다. 명동성당에서는 경건하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향내 그윽한 법당의 부처님 앞에서는 이질감을 느껴서 기도를 못 한다면 그것은 참된 경건이 아니다. 분위기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경건이라면 조작된 경건일 뿐이다. 꾸며진 것일수록, 습관화된 것일수록 거룩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종교 놀음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어놓은 종교라는 집에 들어가 않아 아주 편하게 느낀다. 그러나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불편하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김지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상황을 떠나 진면목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종교 놀음에 만족하는 그런 종교를 향하여 마귀라고 했다. 예수는 바로 이런 종교놀음에 맛을 톡톡히 들이고 있었던 당시의 종교인들에게 "화 있을진저? 지옥의 자식들아"하고 저주를 내렸다.

나는 오히려 막노동 공사판 아귀다툼같이 보이는 시장의 한복판, 거대한 기계가 윙윙 돌아가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조그마한 인간, 막장 속의 탄부, 웃음을 파는 룸살롱 여자들의 삶 속에 차라리 거룩함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 이상 거룩한 것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은 하늘에나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밥 먹고 똥 누는 사람 안에 계신다. 종교는 권력과 달리 무거울수록 가볍게 보이고 가벼울수록 무겁게 보이는 법이다. 황금빛 번쩍이는 거대한 부처상이나 장엄한 교황의 행차에서는 장난감 같은 가벼움을 느낄 수 있지만, 고행으로 비쩍 마른 부처상이나 장애인이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교황이 사진을 보면 저절로 경건해지는 것이 그런 현상이다.

▲ 황금빛 번쩍이는 거대한 부처상이나 장엄한 교황의 행차에서는 장난감 같은 가벼움을 느낄 수 있지만, 고행으로 비쩍 마른 부처상이나 장애인이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교황이 사진을 보면 저절로 경건해지는 것이 그런 현상이다.

30여 년 전 진눈깨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부천역 앞의 재래시장에 갔다가 하반신이 없는 장애인이 두꺼운 고무로 배를 대고서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수레를 밀면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질척질척한 시장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노점상을 대상으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파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 저것 보다 더 거룩한 몸짓이 어디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로 볼 때 내가 겪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이 나올 때는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된다. 그런데 영화를 찍는 데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아는 사실과 너무 다를 때는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가 Real 할수록 부딪혀 오는 느낌이 강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Real 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신도 인간이 픽션을 꾸미는 것보다는 논픽션으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교적인 문화나 예식에서 신을 찾기보다는 삶의 현실에서 신을 찾고자 한다.

나는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최악의 조건 속에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보다 더 거룩함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수만 명이 모여서 경건, 엄숙, 장엄하게 드리는 미사는 고상한 장난같이 느껴지고 아프리카 수단의 처참한 난민 캠프의 현장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하는 난민들을 보면 저절로 경건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가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아침에 들고 나가는 도시락의 밥은 제사의 재물과 같은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서 새벽 기도를 드리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일 나가는 남편을 위하여 정성껏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은 예배일 수 있다.

허영에는 물질적 허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허영도 있다. 영적 허영은 아무것도 책임질 일이 없다. 그저 자기가 제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남을 판단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흔히 '어려움을 신앙으로 버틴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자칫하면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신앙이란 독선으로 자신을 가릴 수가 있다. 

폴 틸리히는 '존재에의 용기(COURAGE TO BE)'에서 실존세계에서 지나치게 지식적, 도덕적, 권력적, 정신적으로 고상한 척하는 교만한 인간의 비겁함을 다루었다. 이 세상의 '실존적 곤경'을 거부하는 무지하고 교만하고 위선적인 인간의 비겁은 역설적이게도 지적, 도덕적, 권력적, 영적 교만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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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2016-02-16 11:44:57
그냥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도의 글이지,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란 자기의 가정으로 자의적인 타당성을 확보하고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가 하루를 보내기 위해 아침에 들고 나가는 것을 예배로 본다는건 여전히 자기 생각 아닐까요. 더 타당한 근거들로 글을 채워주시면 더 좋을 것 같네요.

김민웅 2016-02-16 11:43:27
거룩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할지어다.
아무리 세련되고 지금 현실의 맞게 거룩을 재해석하려 해도 성경에 기반한 거룩의 개념은 사라지지 않죠. 레위기 8장이나 요한계시록에도 나오구요. 인간의 입장에서 감히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란 가정이나 어구도 사실 수사법이지 전혀 근거가 없는 내용이고요.

김민웅 2016-02-16 11:42:15
거룩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할지어다.
아무리 세련되고 지금 현실의 맞게 거룩을 재해석하려 해도 성경에 기반한 거룩의 개념은 사라지지 않죠. 레위기 8장이나 요한계시록에도 나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