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착각이 진실이 되려면
나의 착각이 진실이 되려면
  • 김종희
  • 승인 2008.01.2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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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애틀랜타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관을 다녀오다

▲ 마틴 루터 킹 목사 부자가 목회했고, 킹 목사의 모친이 총에 맞아 숨진 Ebenezer침례교회. 옛 건물과 새 건물이 도로를 마주보고 서 있다.
착각이었다. 북쪽 뉴욕에서 남쪽 애틀랜타로 가면 따뜻할 줄 알았다. 얇은 옷만 몇 벌 싸들고 갔는데, 이날따라 눈이 내렸다. 하늘은 아침부터 잔뜩 인상을 쓰더니 결국 늦은 오후부터 굵직한 눈송이를 뿌려대고야 말았다. 애틀랜타에 사는 사람들은 난데없이 내리는 눈에 당황해 하기는커녕 모처럼 펼쳐지는 눈 잔치를 만끽하는 표정들이다.

▲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가와 주변 거리는 말끔히 정돈되었고, 방문객들은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
예상치 못한 눈이 내린다 해도 가야 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관, 그의 생가, 아버지와 자신이 목회했던 Ebenezer침례교회가 있는 Auburn Ave를 가야 했다. 비록 그의 생일인 1월 15일은 하루 지냈지만, 애틀랜타를 와서 여기를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전 세계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 기념관이 있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의 본거지이자 작가 마가렛 미첼이 살던 집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건재하고, 세계적인 미디어 CNN 본사 빌딩이 불끈 솟아 있고, 유엔 가입국보다 더 많은 나라에서 팔리고 있는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 코카콜라 본사에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거대한 수족관과 바위산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내 마음을 잡아당기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그래서 애틀랜타에 머무는 사흘 중에 이틀을 Auburn Ave에서 보내기로 했다.

또 착각이었다. 애틀랜타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Auburn Ave를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일지라도 말이다. 내 발음이 시원치 않은 탓인지는 몰라도 내가 물어본 사람들 중에 그 동네 이름을 알고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집과 교회가 있는 동네라고 하니, 그제야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었지만 정작 가보았다는 사람들은 또 전혀 없었다. 흑인들한테 물어보지 않은 탓일까. 하긴 서울 사는 사람치고 63빌딩이나 남산 올라가본 사람 별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하 좌우 십자 모양으로 연결된 전철(MARTA) 노선은 아주 간단했고, 다운타운의 한가운데에서 오른쪽으로 두 정거장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이 동네가 있었다는 점이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아주 단순했다.

▲ 잘 정리된 마틴 루터 킹 목사 생가와 기념관와 묘지 주변의 Auburn Ave. 그리고 궂은 날씨 때문에 안개에 휘감겨 있는 다운타운이 저 멀리 보인다. 이 두 곳 사이에 있는 어두운 거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깊은 단절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 깊이 패인 골짜기와 높이 솟은 산봉우리를 메워서 평지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전철에서 내려서도 착각은 끝나지 않았다. 4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그의 생일 즈음인 1월 셋째 월요일은 국경일로 지켜지고 있다. 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와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그를 자기네 편으로 끌어당기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정도 위세를 가지고 있으니, 그의 고향 동네로 가는 거리부터 뭔가 다를 거라고 착각한 것이다.

전철역에서 나와 마틴 루터 킹 기념관이 있는 곳까지는 나의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10분 조금 넘게 걸렸다. 물리적으로 짧은 시간이 심리적으로는 왜 이다지도 길게 느껴지는지. 저 멀리 보이는 매끈하게 솟은 다운타운의 빌딩들 앞에서 잔뜩 움츠린 검은 동네의 골목길을 걷는 기분은 아무리 좋게 표현하고 싶어도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카메라 가방을 배낭 안에 집어넣을까?”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걸을까, 아니면 잰걸음으로 이 음산한 거리를 빨리 벗어날까?”

인종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 역사의 현장을 간다고 나름 ‘똥폼’을 잡아보지만, 축축한 공원을 어슬렁어슬렁 배회하거나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습한 벤치에 너부러져 있는 아이들의 딱딱한 얼굴, 넝마를 걸치고 깡통 따위를 줍는 아저씨의 몸에서 뿜어나는 악취, 인적 드문 뒷골목에 널브러져 있다가 가벼운 바람이라도 불면 그거나마 반가운 듯 사뿐히 몸을 흔드는 쓰레기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어느새 내 몸과 마음은 겁에 질려 있었다.

“아니,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적이 있는 동네가 이렇게 초라하단 말이야?” 하고 분노할 겨를은 저만치 달아나고 없었고,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 이곳에 대한 섣부른 기대와 나의 근거 없는 똥폼이 결합된 착각이었다.

아무튼 기념관과 생가, 교회가 있는 곳은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지만, 그곳까지 걸어가는 10분 거리의 동네는 미국에서 흑인들의 삶의 질이 여전히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길을 가르쳐주겠다고 1분 정도 친절을 베풀더니 배가 고프니 돈을 달라고 이내 뻔뻔하게 손을 내미는 키 큰 흑인 청년의 요구를 “사지 멀쩡한 새끼가 일은 안 하고 왜 나한테 손을 벌려?” 하고 박정하게 물리칠 만큼 내 양심이 굳어 있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솔직히 말하면, 돈 없다고 거절했다가 총 맞아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양심보다 몇 걸음 앞서 가고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 친구는 경험이 적었던지 순진했던지 둘 중에 하나였다. 기념관 앞에서 만난 다른 흑인은 수준이 영 달랐다.

“어이, 다음 주 월요일(마틴 루터 킹 목사 생일 기념일)에 부시가 여기 온대. 빨간 카펫이라도 깔아줘야 하나?” 하고 내게 너스레를 떨더니, “어디서 왔냐? 한국? 나 군인이었을 때 한국에 있었어!” 하고는 마치 함께 총탄을 뚫고 적진을 향해 진격하던 전우를 아주 오랜만에 재회라도 하는 것처럼 악수를 청했다. 일단 군대 얘기가 나오면 좋아 죽고 못 사는 한국 남자들의 근성을 간파한 것처럼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한국 어디서 근무했는데? 얼마나?” 하고 물었더니, 그때부터 딴청이 시작됐다.

▲ 한국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면서 나에게 괜히 친한 척하던 이 친구는 '인종을 가리지 않고' 돈이 몇 푼이라도 있어 보이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했다. 'FBI'라는 글자가 선명한 모자를 쓰고 왠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외지인들의 호주머니를 잘도 털어낸다. 하지만 그 행동이 그리 얄밉지는 않았다.
절룩거리는 다리에서 흐르는 피가 구멍 뚫린 청바지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걸 보고는, 이빨 사이에 뭔가 누런 이물질이 잔뜩 낀 것을 보고는, 어디를 봐야 할지 초점을 잃은 채 방황하는 시선을 보고는, ‘약에 취했나 보다’ 추측하고 나니 더 이상 할 얘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도 결국은 돈을 달라고 했다. 먼저 만난 친구랑 똑같은 액수를 줬는데, 그는 수준이 한 단계 위였다.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것의 전부라는 시늉을 하면서 동전 몇 개를 얹어주니까,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과 더 실랑이해봐야 시간만 낭비라는 표정을 한꺼번에 지으면서, 나랑 비슷한 다른 멍청이를 찾으러 절룩절룩 엉금엉금 자리를 옮겼다.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관 주변에는 이곳을 관리하는 차량과 사람이 수시로 순찰하기 때문에, 이 안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그와 아버지가 목회했고 어머니가 총에 맞아 죽은 Ebenezer 침례교회는 수리 중이었고, 건너편에는 훨씬 넓고 웅장한 새 예배당이 우뚝 솟아 있었다. 킹 목사의 생가와 주변은 너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어린 킹이 친구들과 뛰어놀면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몸으로 배웠으리라는 것은 머리로 간신히 그려낼 수 있었다. 

기념관 안에는 인종차별에 맞서 싸웠던 흑인들의 투쟁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킹 목사가 입었던 옷이며 지녔던 시계며 읽었던 성경책은 미국의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한 인간이자 한 목회자의 일생을 보여주었다. 수영장처럼 가득 고인 물 한가운데 마치 둥둥 뜬 것처럼 만들어진 킹 부부의 묘비에 새겨진 "Free at last.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I'm Free at last."는 지금 억압받고 있는 모든 이들의 자유를 염원하는 동시에 자신은 마침내 하나님나라에서 완전한 자유를 경험하고 있는 것을 외치고 있는 듯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 극단적인 백인우월주의 그룹이었던 KKK는 흑인 노예들을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이거나 집을 불로 태우거나 흑인 여성들을 강간하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이런 장면들을 바라보고 카메라에 담는 백인 관광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가.
▲ 총에 맞아 죽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시신을 옮겼던 수레. 비록 낡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뒤따르면서 인종차별 철폐의 그날을 위해 싸웠다.

▲ 단절과 분리의 계곡을 메워서 참 자유와 평등과 정의가 넘실대는 하나님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나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모든 감동은 나의 무딘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경계선으로 갈라놓은 울타리 안에서만 충만한 것 같았다. 이 울타리 바깥에서는 여전히 검은 사람들이 검은 표정으로 검은 거리를 때로는 비틀거리면서 때로는 무겁게 걷고 있었다.

 Ebenezer교회 옛 건물과 새 건물 사이에 조각상이 하나 놓여 있다. 근육 덩어리의 흑인 아버지가 갓난아기를 하늘로 번쩍 들어 올리고 있는 모양이다. 발밑에 써 있는 설명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쿤타 킨테(Kunte Kinte)’. 아프리카 노예들이 목숨 걸고 했던 저항의 상징 쿤타 킨테가 자신의 딸을 하나님께 바치는 모습이다. 마치 마틴 루터 킹이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쳐서 참 자유·참 정의·참 해방의 역사를 일구었듯이, 쿤타 킨테의 후예들이 자유와 정의와 해방의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께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겠다고 맹세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착각이 진실이 되려면, 여전히 수많은 쿤타 킨테와 그의 Kizzy들이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행렬을 이어가야 한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착각이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더 크고 깊은 착각의 함정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을 뿐이다.


▲ 1930년대에는 백인들이 마시는 물과 흑인들이 마시는 물이 따로 있었다. 이 뿐이던가. 식당이며, 버스며, 학교며,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었고 단절되어 있었다. 오늘은 사정이 얼마나 나아졌는가.
▲ 비록 운동의 방법은 정반대였지만 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는 인종차별 철폐라는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사진처럼 이들이 마음과 힘을 모아서 더욱 자주 만나 활짝 웃었다면 흑인 인권 문제는 더 빨리 전진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40세도 채 안 되어서 암살당하는 비극은 둘 다 피하지 못했을 것은 분명하다.
▲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비폭력 평화주의의 모델 간디를 철저하게 따르려고 애썼다. 기념관 밖에는 간디가 낡은 슬리퍼와 지팡이만 의지한 채 인도 땅을 걷는 모습의 동상이 있고, 안에는 간디와 인연을 맺고 서로 주고받았던 편지 등 몇 가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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