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드 마이어즈, 여전히 시대를 앞서가다
체드 마이어즈, 여전히 시대를 앞서가다
  • 허현
  • 승인 2016.03.19 01: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브라이언 왈쉬 기고문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되죠!”

한 학생이 계속해서 반대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구요!”

내가 정중히 답했다.  

“흠… 자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뜻만은 아닐세… 이 저자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거지.”

“그렇지만, 그건 용인된 것이 아니라구요. 이 본문을 그렇게 연구하는 것은 책임있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녀가 답했다.

“누가 그렇게 말했지?”

“성서학회에서도 그렇고, 성서학이라는 학제 자체도 그렇고, 제 성서학 교수님들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당시는 1980년대 후반이었고 나는 대학원과정 세미나 한 과목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 수업 시간에 체드 마이어의 시대를 앞서간 책, <Binding the Strong Man(강한자 결박하기)>을 강독했는데, 이 학생은 저자가 어떻게 이런 책을 썼는지 그 무모함을 믿을 수 없어했다.

▲ 체드 마이어스의 'Binding the Strong Man'

솔직히 말해, 나는 이 학생이 당시 주된 패러다임이었던 성서비평의 틀을 깨길 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 본문을 삶의 모든 영역을 향해 오시는 살아계신 말씀, 더 나아가 결박된 것을 해방하시는 말씀으로 읽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주류 신학 콘소시엄의 박사과정 중에 있었고, 그 학제의 규범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분명했다.

그녀는 패러다임에 의해 묶였고, 체드 마이어즈는  굽힘 없이, 규범에 따르지 않고 신명나게  놀았다.

어쩌면 우리는 그녀가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이라 불리우는 강한자에게 결박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체드 방식의 마가복음 읽기가 바로 그 강한자를 결박하여 그 패러다임을 무장해제 시키고, 그녀를 성서학회의 헤게모니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한 마디로 그녀에겐 너무 두려운 것이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다. 만약 체드가 <강한자 결박하기 Binding the Strong Man>에서 의도한 것을 그녀가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면, 자신의 지도교수와 갈등을 일으켰을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녀가 꿈꾸는 성서학자라는 직업에 대한 자살 행위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했다면, 그녀는 성서학이라는 게임에서 십년 정도는 앞서갔을 것이지만. 그것이 <강한자 결박하기 Binding the Strong Man>가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아이러니 중에 하나다. 그책에서 체드가 시도한 어떤 것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흔들었다는 것인가?

그는 상징적 틀들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 속으로 복음을 위치시킨다. 이제 이 방법에 대해선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는 수사비평(rhetorical criticism) 작업을 하고 있다. 요즘 그걸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그는 마가복음을 제국(empire)이라는 상황 속에서 읽고 있다. 흠, 당연히 그래야지.

체드는 이 모든 면에서 시대를 앞서갔다. 그는 성서학계의  ‘자격증 없는 실천가’요, ‘종신직 보장(tenure)’과 ‘학술지 발행(refereed publication)’ 같은 제국이 부여하는 상급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이러한 성향이 학계를 조정하는 강한 남성들(strong men)에게 복종하지 않도록 그를 해방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남성 복수명사로 표기했다.

당시 그가 하고 있던 상징적, 수사적, 그리고 제국비판적 해석은 그러한 작업이 학계에서 일반화 되기 훨씬 이전에 행해진 것이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 학생이 계속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되죠”라고 말한 또다른 이유가 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어떤 것’이 <강한자 결박하기 Binding the Strong Man> 란 책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성서 본문이 이천년이라는 역사적 거리를 두고 있는 어떤 상황 속으로 들어와 말씀하시도록 계속해서 요구한다면 책임있는 역사비평학을 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진부한 문구(shibboleth)요, 죽은 전통이요, 학문적 기만이다. 이 모든 것들이 기껏해야 본문과 거리를 유지하기 위함이요, 나쁘게 말하면 본문이 침묵하게 하기 위함이다.

체드는 본문을 1세기에 남겨두기를 거부했다. 그는 그 본문이 근대의 마지막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 맺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본문을 그렇게 가까이 읽으려고 애쓸 이유가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우리가 제국, 기업의 탐욕, 국가의 폭력, 인종차별과 성차별이란 틀 안에 있는 강한자(the strong man)를 보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것이 본문을 영예롭게 하고 진정성(integrity)을 가지고 읽는 유일한 길이다.

그는 마가복음과 씨름하도록, 그리고는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와 뒹굴도록 우리를 소환한다. 언제까지? 다리를 절 때까지, 자유케 될 때까지.

객관적 중립성의 추정 아래서 성서읽기는 필연적으로 본문에 폭력을 가하게 되며, 그 본문이 책임지고 증언하려는 분에 대항해 지속적으로 제국의 폭력을 가하는 것이 사실이다.

▲ 체드 마이어즈 (Ched Meyers)

체드 마이어스는 2월 1일로 환갑을 맞이한다.

이 말은 그가 강한자 결박하기(Binding the Strong Man)를 저술했던 때는 30대 초반의 잃을 것이 없는 대담한(in-your-face-with-nothing-to-lose) 신출내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여전히 잃을 것이 없는 대담한 신출내기다.

그리고 여전히 주류 성서학회 보다 10년을 앞서 간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다.

해피 버쓰 데이, 체드!

번역: 허 현 목사 / 마운티뷰 메노나이트 교회 공동목사, ReconciliAsian 대표

2015년 1월 30일 체드 마이어즈의 환갑을 맞아 브라이언 왈쉬가 Empire Remixed (http://www.empireremixed.com/2015/01/30/ched-myers-60-years-old-still-ahead-game/)에 기고한 글의 번역문이다.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체드 마이어즈에 대한 소개글로 적합하여 저자의 허락하에 번역 게재한다.

필자 브라이언 왈쉬(Brian Walsh)는 신학자겸 행동가이며, 토론토대학에서 개혁교회(CRC) 캠퍼스 담당 사역자이다. 신학과 문화에 관련된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다. <제국과 천국> (IVP), <세상을 뒤집는 기독교> (새물결플러스), <그리스도인의 비전> (IVP) 등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