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기독교인들의 악마성
착한 기독교인들의 악마성
  • 천정근
  • 승인 2016.03.24 0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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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현대판 ‘장화홍련전’이라고 해야 할까? 친아버지와 계모가 여중생 딸을 때려 숨지게 하고 은폐한 충격적 사건이 알려졌다. 딸을 죽인 아빠는 47살의 현직 목사이자 해외유학파 박사에 신학교 교수로 밝혀졌다. 부부는 죽은 딸을 11개월간 이불에 덮은 채 방안에 유기했다. 발견 당시 시신은 미라처럼 말라 반백골화된 상태였다. 그동안 범인들은 딸의 실종신고를 해놓고 방향제로 사건을 숨겨왔다. 그들은 경찰조사에서 ‘기도하면 딸이 다시 살아날 것으로 믿었다’고 진술했다. 속속 비극적인 가족사의 전말이 세간에 공개됐다.

착한 기독교인 콤플렉스

▲ 19세기 조각상 '루시퍼'(부분). (이미지: 위키피디아)

첫째로 나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물어뜯는 이리처럼 사건과 진실에 목말라하는 언론에 경의를 표한다. 대상을 선별하는 그들의 빼어난 감각과 진실을 파헤치는 열심과 성과들.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꼼꼼한 디테일과 악을 징계하고 사회의 경종을 울리는 기승전결의 플롯까지. 세월호 사건, 위안부 밀실 합의, 노동법 개정이나 북한 위성발사와 개성공단 폐쇄 같은, 왜 꼭 필요한 국가적 사안에서도 동일한 저널리즘 정신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느냐 꼬집고 싶진 않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 플롯이다. 5W 1H. 누가 어디서 언제 무엇을 어떻게 왜? 미주알고주알 와글와글 떠들어 대는 동안 사건의 실체도 의미도 사라지고, 결론은 언제나 ‘버킹검’. 개봉 당시엔 떠들썩했어도 결국은 시시한 명절영화처럼 반복 재생될 뿐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우울하거나 비참하거나 언제나 현실의 진짜 진실을 가리고 덮는 데 효과적인 게 아닌가. 

세 단계쯤이었다. 처음 사건이 알려졌을 때의 엽기성에서, 현직 목사와 해외유학파 박사에 신학교 교수라는 충격, 그다음엔 가족사적 비극에 담긴 비참으로 뉴스의 초점이 이동했다. 친딸 살해사건과 시신 방치는 얼마나 괴기한가. 그러고도 태연하게 딸의 시신이 있는 집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잤다. 발각되기 전날까지 학교에 가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목회도 했다. (이것도 엽기적이긴 하다.) 그리하여 이들 인면수심의 범인에 대한 성토와 분노가 들끓었다. 엄마 잃고 학대받아온 아이들에 대한 동정과 슬픔의 물결이 일었다. 

사람들이 아직 충격과 슬픔에 휩싸여, 목사들과 한국교회 및 기독교 자체에 대해 끓어오른 불신과 증오가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다른 쪽에선 벌써 생활고에 시달리던 목사와 우리의 보편적 악마성에 관해 온정주의에 기댄 신학적 해설이 등장했다. 이해가 간다는 연민의 표명과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과학적 통찰력,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기독교적 사랑’까지 혼합 착종이 돼버렸다. 

골자는 이렇다. ‘나는 그 목사가 저지른 일에 충격을 금치 못한다. 죽은 아이를 생각할 때 너무나 가슴 아프다. 어쩌다가 그런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면 이해도 간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나도 그럴 수 있다. 인간에겐 보편적 악마성이 있으니까. 응분의 벌은 받아야 하겠지만, 그를 위해(어떤 경우는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한다.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가족을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내가 읽은 이런 착하고 거룩한 취지의 글들은 놀랍게도 전부 다 목사들이 썼다. 이 사건에 관한 일종의 설교라 할 수 있을 터였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서둘러 모든 입을 막는 비답을 내려야 직성이 풀리시는 몇몇 분들이 어김없이 이 콘서트에 연대하셨다. 나름 성심의 진정성과 기독교적 거룩함이 묻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마치 이번 사건도 자기들처럼 (차분히, 냉정히) 생각해야 한다고 설교하는 듯했다. 세간의 격렬한 반응을 잠재우려는? 아니다. 먼저는 자기 안의 심리적 혼란을 직면하지 않고 얼른 벗어나려는 무의식적 회피가 아닐까? 기독교(복음)라는 이미 완성된 명분의 편리함으로. 문제는 여기서도 플롯이다. 판에 박힌 기승전결에 결론은 ‘버킹검’. 왜 이런 도식을 반복하게 되는 걸까? 어느 페친의 글에서 해답을 얻었다.

“딸을 때려 숨지게 한 목사이자 신학대학 교수 이야기에 사람들이 경악에 휩싸이는 동안, 동업자들은 가슴을 졸이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나 보다. 조금 전, 목사인지도 (사실은 내 페친인지도) 몰랐던 한 분이 긴 글을 페북에 올렸다. 목사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게 아니란다. 문제의 목사 집을 보니 초라한 살림살이가 가슴을 메이게 했단다. 그리고 페북에 가보니 두 딸의 사진을 올려놨더란다. 그는 분명 딸들을 사랑했고 행복하게 살아보려 했을 테지만, 엄마를 잃은 아이들의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저 지경까지 왔을 거란다. 죽은 아이뿐 아니라 목사 부부를 위해 기도를 청한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있었다. 목사님의 거룩한 뜻에 동의하는 수많은 댓글들과 함께. 물론 나처럼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다.” 

그 페친은 ‘미꾸라지 한 마리가 기독교를 흐려 놓을까봐’ 감싸고 도는 동업자들의 계산적 발언이라고 썼다. ‘착한 기독교인’의 심리의 배면에는 안 착한 업종적 계산이 깔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정직하지 않은 회피와 기만의 악마성

그들의 말은 일면 지당하고 성경에 권위를 둔 윤리적인 말들인 것 같다. 하지만 매번 속는 듯, 속이는 듯, 기묘한 거부감이 든다. 왜일까? 동일한 이 플롯. 성경과 착한 신앙을 방패로 동료 인간들의 현실과 진실, 그 고통스런 외침과 요구에 직면하기를 한사코 거부하려는 기만 때문 아닐까? 깨지지 않는 미련을 무의식 속에 꼭꼭 봉인해 둔 전도(轉倒)된 착함. 마치 마지못해 불가피한 듯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러나 항상 의도된 언제나 같은 결론들. 그 메시지가 날아가 꽂히는 과녁에는 ‘떠들지 마라’ ‘너도 똑같다’ ‘침묵하고 회개하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가만히 있으라’가 적혀 있다. 왜? 성경이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복음주의’의 심리적 바탕(혹은 상상력의 한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성경(복음)으로부터 나온 죄인의 고백적 연대의식은 방향을 잘못 잡았다. 죄인임을 알기에 더욱 그걸 알고 부인해야 하는 게 십자가가 아닐까? 나도 죄인이고 너도 죄인인 건 맞다. 그 때문에 죄를 더욱 더 죄로서 철저히 자백하고 밝혀 나가야 한다. 그러나 소동을 금하고 침묵을 종용하는 판에 박힌 작금의 설교들은 우리가 죄인이므로 서로의 죄를 용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너도 그와 같은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너도 그 자리에 올라가면 부패할 수 있기 때문에, 성 추문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뇌물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권력과 명예를 탐할 수 있기 때문에, ‘너나 잘하라’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정직한 것 같으나 정직한 게 아니고 기독교적인 자기비하인 것 같으나 아니다. 인간에겐 보편적인 악마성이 있다고? 천만의 말씀! 인간의 악마성은 오히려 끝까지 정직하지 않은 그것이다. 끝까지 이기적인 것이다. 회개할 줄 모르고, 죽을 줄 모르고, 오로지 살려고만 하는 그것이 계속해서 인간을 죽인다.

가령 그 아버지는 딸이 기도하면 살아날 줄 믿었다고 했다. 거짓이다. 어린 딸을 때려서 죽인 아버지가 다시 살려달라고 기도를 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는지가 빠졌다. 그는 5시간 동안 딸을 때리고 다음 날 보니 숨져있었다고 했다. 나의 지인은 내게 이거야말로 그의 첫 번째 거짓말일 거라고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딸을 5시간 동안 때릴 수 있겠느냐고. 딸은 아마도 처음부터 맞아서 죽었을 거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는 왜 ‘5시간’이나 ‘다음 날’을 운운했을까? 단 몇 대에 때려서 죽였다는 것과 5시간 동안 때려서 다음 날 죽었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있다! 거기에 진정 인간의 악마성이 있다. 끝까지 자신의 죄를 가리려는, 줄여보려는, 자신의 죄성과 악마성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그 형벌에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주의. 그리고 이러한 회피와 기만은 갑작스런 당황과 수치에서 생겨난 일시적 퇴행이 아니다. 기도하면 살아날 줄 믿었다는 미신처럼 그것은 어이없게도 신앙이라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국기독교와 기독교인의 보편적 자기모순의 창이자 방패와 같다. 내면적 부패와 탐욕을 표면적 신앙과 착함으로 가리고 있으나 그 둘이 서로 모순되는 패턴, 그것이다.

‘청빈 논쟁’과 ‘헌금 없는 주일’

온 나라가 북한 위성발사와 개성공단 폐쇄로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던 주간에 한가로운 ‘청빈 논쟁’이 나왔다. 해외의 어느 목사가 국내의 더 큰 교회로 부임하게 됐는데 인터뷰 중 공개한 사례비에 관한 논쟁이다. 한쪽은 규모에 비해 적게 받으니 청빈한 것이라 칭찬하고, 반대편은 자신의 청빈함마저도 자기 자랑으로 치장했다고 비판한다. 대형교회에 대한 무조건적 반감이니 소형교회(?) 목회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니 하는 말들도 동원됐다. 어쩜 이리도 똑같은 패턴일까? 

내가 생각하기는 이런 뉴스(논쟁)의 본질은 큰 교회 목사가 더 큰 교회로 옮겨 가는 데서 발생한다. 여기 있든 저기 있든 그의 목회는 (별로 달라질 것 없다는 의미에서) 같은데, 자신만은 청빈하니까 남들과 다르다는 굳센 신념을 자랑한다는 데 있다. (물론 결코 자랑이 아니라 굳게 믿겠지만) 거기 있든 여기 오든 본질은 같다. 비판자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영적(본질적)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 그런데 당사자는 ‘나는 남들(일반적 대형교회 목사들)과 다르니까 더 큰 교회로 트레이드됨에 있어 사심(私心)의 눈총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 다름의 증거가 ‘남들’에 비해 현저히 적다는 사례비다. 왜 한국기독교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지 이해가 간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비판에 대한 동일한 패턴의 유체이탈 대답이다. 또 그 대답을 둘러싼 여전한 유체이탈식의 논쟁이다. 적어도 우리가 목사이고 기독교인이라면 누군가 무엇을 비판할 때 무엇을 왜 비판함인지 그 적확한 의중을 찰떡같이 알아차려야 한다. 동의든 거부든 거기에 직면하는 대답을 해야 한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가 장차 천사들을 판단할 자들일지라도 지금은 본인 자신도 사심인지 공심(公心, 空心)인지 제 마음조차 파악지 못했는데 남의 마음까지 어찌 판단하고 알아주겠는가. 혹은 안다고 그에 정직하게 성심껏 직면하겠는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음과 대답에 정직에 정직을 다해 직면하지 아니하고서는 우리의 문답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언제나 서로 통하지 아니하는 유체이탈일 뿐이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마 23:24) 곧 전체적 제도에 대한 본질적 고뇌 없이 개인적 개별적 개교회적 훌륭함만 내세우는 것. 본질은 같아도 나는 남들보다 훌륭하니까 괜찮다는 것. 이게 ‘당연히 받을 수 있는 사례비’를 적게 받는 청빈한 대형교회 목사고, 이게 헌금 없는 주일을 선포한 뜻 높은 교회가 아닐까?
 
주선우 씨 사망 사건을 아는가?

나는 최근 아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한 아버지를 돕는 일에 매달려 있었다. 경동택배 신입사원 주선우(27) 씨는 사무직 공채 입사 한 달 만에 지게차 사고로 현장에서 순직했다. 그 한 달 동안 그는 사무실이 아닌 수하물집하장에서 하루 13~16시간을 지게차 하역 작업을 했다. 누가 봐도 채용 갑질이 부른 희생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현장을 꾸며 사고의 진실을 은폐했고 본인의 과실로 조작했다. 이 사건은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알리기 위해 만든 사이트(http://cafe.daum.net/kdexpress)에 낱낱이 공개돼 있다. 그동안 부친의 노력과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몇몇 언론의 집중 취재가 있었고 수차례 방송에도 나갔다. 그러나 경동택배는 여러 의혹과 영상 증거 제시에도 꼼짝 않는다. 일방적으로 본인 과실이 60%라는 판정을 내려 1억 원의 공탁금을 걸어놓았다. 회사는 자신들의 신입사원을 용역업체 직원으로 서류를 꾸며 보상을 산정했다. 그 과정의 파렴치함은 여기에 일일이 적지 못한다. 

나는 그간 사망한 청년의 부친을 도와 여기저기 글을 써 진상을 알리는 작업을 해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결코 거창한 요청이 아니었다. 내가 쓴 글들을 공유해 알려달라는 것, 사용 중인 SNS에 몇 마디 코멘트를 해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정치인, 종교인, 활동가, 문인, 파워블로거 등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 가운데는 직접 청년운동을 하는 활동가들도 있었고, 하나같이 청년 실업문제와 흙수저 금수저의 불평등에 관한 문제, 비전과 긍정적 마인드, 소통·공존·화해·상생을 설파하는 이 시대의 유명 인사들이고 오피니언 리더들이었다. 그러나 고백컨대 공유를 해주거나 요청대로 코멘트를 해준 사람은 단 한 분뿐이었다.(지면을 빌어 염무웅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망한 청년은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죽기 전 주일까지 야간 중노동에 시달린 몸으로 주일학교 교사의 직분을 다했다. 첫 월급을 타면 교회 동료들에게 한턱을 쏘기로 약속까지 잡아 놨었다. 설레며 기다리던 첫 월급 파티를 이틀 앞두고 27살 청년은 지게차에 깔려 피 흘리며 죽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자세히 써 교계언론 <뉴스앤조이>를 통해 교회들에게 호소해 보았다. 널리 알려 줄 것, 성명을 발표해 줄 것,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듯 사회적 반향과 압력의 대열에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다. 즉각적인 선행과 응답, 가능한 자리에서 가능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작은 실천의 연대를 호소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스 4:4) 능욕당하고 살해당한 여인의 시신을 잘라 각 지파에게 보냈던 심정으로, 할 수만 있다면 성령이 교회들을 일으키시는 부림의 전례를 각성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구원파·신천지만도 못한 교회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 청년이 어린 시절부터 다녔다는 교회에선 어떻게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났다.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생명을 살리는 교회’란 로고가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올라온 설교 제목들을 보니 온통 축복에 관한 말씀들 일색이다. ‘복 있는 성도’ ‘고난도 축복이다’ ‘이삭에게 주신 축복’ ‘야곱에게 주신 축복’…. 나는 혹시 다른 활동을 하고 있나 찾아보았다. 전혀 없었다. 사망한 청년에 관한 기록은 그 주간의 교회 소식란에 ‘소천 주선우 형제(지난 11월 13일)’라고 짧게 공지된 게 전부였다. 매 페이지마다 헌금을 낼 수 있는 농협계좌 안내만은 빠지지 않았다. 놀라움, 배신감, 민망함…, 생각이 좀 복잡해졌다. 

참을까 하다가 교회에 전화를 걸었다. 담임목사님은 몸이 아파 기도하러 기도원에 가 있고 전화 받는 이는 부목사라 했다. ‘사망한 청년이 그 교회 소속이 맞느냐? 그 아버지가 홀로 분투하고 있는 것을 아느냐? 여러 매체에 사건 관련 기사들을 읽어 보았느냐?’ 그는 내 질문에 그저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답했다. ‘아니 나에게 왜 미안하고 죄송하냐,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할 게 아니냐’ 재촉했으나 역시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답변뿐이었다. 나는 화가 났다. ‘이게 무슨 생명을 살리는 교회고 무슨 생명을 돌보는 목사들이냐’ 따졌다. ‘그의 죽음이 어떻게 해서 소천(召天)이냐?’ ‘살해당한 게 아니냐?’ ‘거기에 무슨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고난도 축복이냐?’고 따졌다. 역시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답변뿐이었다. 

지금 현재 한국 개신교인들은 구원파나 신천지만도 못하다. 행동하지도 않고 행동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한심하다. 왜 이렇게 어리석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 무력하게 되었을까? 나는 이 모든 게 모든 현실적 모순을 ‘교회적’이라는 꽉 막힌 관념과 그래도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자기광고(교회선전)의 개별적 훌륭함으로 바꾸어 버린 소위 ‘복음주의권’의 독점적 부흥에 있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주의권이란 내용적 복음과는 무관하게 현실과 괴리된 신학적 정치적 보수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그 모든 메시지는 여하한 현실을 향한 근원적이고 실천적 행동에 제동을 걸어 ‘가만히 있으라’는 결론으로 간다. 오로지 교회 안에서 말 잘 듣고 딴생각 안 하며 잘 따라오는 착한 성도요 유순한 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훈련이니 양육이니 하는 말들의 진실한 내용, 목자도 양도 그것이 비유인 줄 모르고 자기가 진짜 목자인 줄 진짜 양인 줄 알고 ‘나를 따르라!’ ‘메에에~’ 화답하는 것이다.

늙은 선지자 샌더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74살의 버니 샌더스가 기성 정치인들을 도장 깨기로 각개격파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의 연설은 가히 늙은 선지자의 포효와 같다. 천하의 자유자재 당당한 힐러리 클린턴의 얼굴이 납덩어리가 되도록 그는 대충 봐주지 않는 직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의 말에 새로운 것은 없다. 그는 일생을 그 말을 갈고 닦으며 그 말만 해왔으므로 조금도 거침이 없을 뿐이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줄이라면 제도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상위 1%가 하위 90%를 능가하는 지상의 소유를 독점하는 불공정한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 그가 제시하는 구체적 수치와 불평등한 현실은 그동안 세상 사람들이 (특히 목사들이 설교에서) 자주 인용해 써먹던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기부와 선행의 모범이 얼마나 기만적인 시스템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몇몇 개별적 선행은 전체 구도에 아무런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본질상 같으면서 자랑의 광고로 소비되는 몇몇의 모범적 사례가 전체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유지시켜 주는 선전도구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청빈 논쟁이든, 헌금 없는 주일이든, 행동할 줄 모르고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리석음이든, 이 착한 기독교인 콤플렉스 하에서는 ‘가만히 있으라’일 뿐이다. 시대의 근원적 영성(분위기)과 제도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가 가능한 자기 자리에서 가능한 모든 정직에 직면하여 성심을 다할 때,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즉각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을 지향할 때, 영성과 제도는 바뀐다. 모두에게 칭찬받고 아무에게도 책잡히지 않는 착한 기독교인이 되려면 (다만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면 되겠지만) 굳이 노력할 필요 없다. 지금이 그 상태이니까. 부러워라. 조금만 영향력을 획득하면 어느덧 세상만사를 다 헤아린 중늙은이 원로 도사 스승의 행세를 하는 우리네 장로(長老)들의 풍토를 생각할 때, 온통 점잖은 권위로 은근히 찍어 누르는 압력이 지배하는 우리네 자체검열의 피라미드와 생존의 먹이사슬을 생각할 때, 온 유대를 소동시켰던 예수님 같은 ‘백발의 청년’ 샌더스의 유세(遊說)가 남의 집 얘기 같지 않다. 우리가 얼마나 미국을 좋아하는가? 차제에 샌더스가 미국 대선에서 낙선한다면 우리나라에 영입이라도 했으면 싶은 심정이다.

천정근 / 자유인교회(경기도 안양) 담임목사. 모스크바국립대학 및 대학원(석사)에서 19세기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합동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 《연민이 없다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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