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아집이 성경을 만날 때
편견과 아집이 성경을 만날 때
  • 지성수
  • 승인 2016.03.24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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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교회 안 나가는 목사 이야기 (5)
▲ 독선, 아집, 편견, 집착. 이 단어들은 각기 독립된 단어들이 아니라 종합 세트로 함께 붙어 다닌다. 즉 편견을 가졌다면 아집과 집착, 독선을 골고루 균형 있게 갖추게 된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누구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불안전한 인간이 항상 모든 것을 알고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경 중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해 마치 편견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독선, 아집, 편견, 집착 중에 좋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각기 독립된 단어들이 아니라 종합 세트로 함께 붙어 다닌다. 즉 편견을 가졌다면 아집과 집착, 독선을 골고루 균형 있게 갖추게 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독선, 아집, 편견, 집착마저 가졌다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지만, 적당한 지식과 교양으로 치장되어 있는 사람의 그것은 잘 들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신앙으로 포장되어 있으면 MRI 촬영을 해도 발견하기 힘들다. 성찰할 줄 모르고 자기 신념을 지킬 줄만 아는 사람은 테러범 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다.

신앙의 편견을 가져다주는 근본주의 신학은 내재론적 해석을 취한다. 즉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저 '성경 구절에 이렇게 쓰여 있다'로 돌아간다. 이런 입장을 택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서를 바라보는 어떤 객관적인 시각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판단의 근거를 두고 있는 성경이 어떻게 해서 자기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처럼 편견도 세련되면 고치기 어렵다.

나와 가까운 사람 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있다. 이 여성에게는 '어머니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주변 기독교인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것'을 해결해보겠다는 갸륵한 뜻을 지닌 대학생 아들이 있었다. 그는 독학으로 희랍어를 공부해서 신약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여호와의 증인을 부정하는 기독교인이나 목사들을 만나면 논쟁을 벌였다. 

한 번은 자기 어머니가 존경하는 내가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으로 생각하는지 알기 위해서 희랍어 원어 성경을 들고 왔다. 그래서 나는 "희랍어가 아니라 예수가 직접 말한 아람어로 성경을 읽는다고 해도 제대로 이해 할 수가 있는 일이 아니다.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성경에 관한 책’을 읽어서 성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점잖게 물리쳤다. 

그는 자신만만한 자기의 공세를 의외로 비껴나가는 나의 태도에 대해서 그는 어의가 없어 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편견을 원어 성경에 대한 편견이라는 것으로 물리치려고 했던 것이다. 가끔 희랍어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 가운데, 원어를 해석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원어 해석이 모든 편견을 물리치는 방법은 아니다. 편견을 이기는 방법은 통찰이며,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성서비평학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 근본주의 신학은 내재론적 해석을 취한다. 즉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저 '성경 구절에 이렇게 쓰여 있다'로 돌아간다. 이런 입장을 택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서를 바라보는 어떤 객관적인 시각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성경을 신문기사 읽듯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기사는 해석이 별로 필요 없다. 의미를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되고 좀 더 깊이 혹시 들어간다면 기사를 통하여 데스크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파악하려는 시도 정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성서는 다르다. 기록된 문자 보다 해석이 더 중요하다. 성서의 기록들이 반드시, 기필코, 틀림없이, 분명히, 절대로 사실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는 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영적 세계는 당연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 역시 문자로 된 한계 속에서 갇혀 있어야 하니까. 그러나 해석학을 통하여 성서의 문자를 넘어설 때 더 깊은 영적 세계를 탐문할 수 있다.

자료를 찾다가 10여 년 전 민병희 강원도 교육감의 부인과 주고받은 메일을 찾았다. 

"어려서 부터 주변의 사물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품고 있던 습성 때문인지 신앙생활에서도 무성한 질문들 속에 신앙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헤매는 것에 대한 진단을 나름대로 내려 보기도 하지만 얼마큼의 시간이 더 지나야 방황의 종지부를 찍고 정착을 하려는지 그저 힘들다는 생각뿐입니다. 

한 때는 (전교조 강원지부 재직시절) 방황하던 신앙생활을 접고 마음대로 살아보기도 하였지만, 내면의 종교성 때문인지 선택받음 때문인지 다시 교회 생활을 착실히(?) 하고 있답니다. 목사님께서 계속해서 삶을 치열하게, 진지하게 대하시는 모습에 존경을 드립니다. 참 하고픈 이야기들도 많을 것 같은데 언제 한 번 들어오세요. 전에 품었던 오해와 편견들로 인한 사죄도 드리고 싶고 한 번 모시고 싶습니다."

이 편지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답을 했다.

"의문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 문제는 제대로 질문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틀린 질문에는 틀린 답이 나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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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 2016-03-26 15:03:07
기독교인들의 독선과 교만에 감탄합니다. 무슨짓을 해도 천당을 가고 이땅에서도 누릴수 있다는 독특한 구원관 때문인지 교만이나 무례함 독선 따위는 아랑곳 않습니다. 하나님도 은혜? 로 철저히 보호하시니 자신의 야심을 신앙으로 포장하여 스스로 속이면서 살던지 아니면 그냥 드러내고 뻔뻔스레 살아가던지 대부분 둘중 하나인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