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순진함이 사람 잡는다
기독교인의 순진함이 사람 잡는다
  • 지성수
  • 승인 2016.03.27 0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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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교회 안 나가는 목사 이야기 (6)

대학 때 어머니가 술집을 운영했다. 대학가 술집에도 여자가 있던 때였다. 주로 직업소개소의 원조인 인간시장을 통해 술집으로 왔는데, 한 번은 예쁘고 키 큰 대숙이라는 어린 여자가 들어왔다. '동백 아가씨'를 불렀던 문주란처럼 되고 싶어서 철없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정작 갈 곳이 없어 인간시장에 갔다가 우리 집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대숙이는 노래도 잘하고 활달해서 시쳇말로 인기가 '짱'이었다. 

어느 날, 대숙이가 술에 취해 내 방에 들어와서 잠을 자던 나에게 볼을 비벼대며 울었다. "오빠, 오빠. 남자들은 다 도둑놈이야.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주정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이놈의 계집애가 어디서 주정을 해"하고 소리를 지르며 내쫓았다. 내가 대숙이에게 한 단 한 마디였다. 

그 사건 때문에 어머니에게 혼이 난 대숙이는 우리 집을 나가버렸다. 1년 후, 대숙이가 다시 동네에 나타나 여관방에서 손님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었다. 여관방에서 손님을 받는다면 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몸을 파는 단계로 전락한 셈이다.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 대숙이를 찾아가 보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없었다. 내가 대숙이에게 조금만 친절하게 해주었다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자책감이 그 후부터 늘 따라다녔다. 이 사건은 나중에야 예수가 창녀의 친구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영화 '어둠의 자식들'의 한 장면.

80년대 초 개봉한 영화 '어둠의 자식들'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하반신이 없어 손으로 땅을 짚고 다니는 걸인이 여자 생각이 나서 사창가에 갔다. 그를 본 창녀들이 모두 무서워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골목 끝까지 갔다가 쓸쓸히 돌아서는 장애인에게 한 창녀가 다가서더니 "손님 제가 모실게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그녀는 창녀가 아니라 성녀였다.

한 번은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우리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는 제목의 책을 보았다. 백인들이 노예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이용하여 가르치던 것을 비판한 책이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청교도들은 흑인 노예들에게 내세와 천국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참게 하는 마취제로 사용했다.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함은 더럽혀지지 않았을 뿐이다. 언제라도 더러워질 수 있는 취약한 순수함인 탓이다. 때가 묻었는데도 순수해야 진짜 순수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몰라서 하지 않아 순수한 게 아니라 온갖 모순과 부조리를 수용하고 극복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순수함이 드러난다.

순진함은 무서운 것이다. 자고로 순진한 사람들은 물불을 가리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어떻게 벌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순진함은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몰라서 순진한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양순해야 한다" (마태10:16)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양과 이리는 정반대의 품성을 가진 동물이다. 뱀과 비둘기 역시 속성이 전혀 반대되는 생물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리떼 사이에서 사는 양을 보고 뱀같이 살기도 하고 비둘기 같이 살기도 하라고 가르친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양이 이리를 만나서는 당할 재간이 없듯이 순진한 사람은 교활한 사람을 만나면 당할 재간이 없다. 상대방의 먹이가 되지 않을 방어력이 전혀 없는 까닭이다. 

이 말씀은 예수가 세상 본질을 꿰뚫어 보신 까닭에 내릴 수 있었던 가장 정확한 처방이다. 비둘기의 순결함이 먼저가 아니고 뱀 같은 지혜가 먼저다. 한 마디로 양이 이리들 가운데 살려면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멍청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교활한 자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본질을 빨리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세상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초월한 체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실제로는 세상에 역행해 가면서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도 있다. 대개 기독교인은 세상을 추상적으로 악하게 보든지, 두부의 모를 자르듯이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 나누어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가끔 예배 시간에 기도할 때 '저 죽어 가는', '썩어 가는 세상'이라고 표현하는 교인들이 많다.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은 싱싱하고, 세상 사람들은 썩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들이 바닷속이 아니라 냉장고에 들어있기 때문에 싱싱한 것인 줄은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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